사도행전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거듭난 삶 2023. 12. 10.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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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시디아 안디옥 전도

 

성 경: [13:13-18]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14) 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15)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18)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13: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 - 박수 엘루마의 사건 이후, 누가는 여기서부터 바울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누가의 관점에서, 바울이 엘루마와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총독 서기오 바울을 기독교인으로 회심시킴으로써 선교 사역에 있어서 지도자격으로 부상된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 - 구브로 섬을 떠나 바울 일행이 두 번째로 찾은 밤빌리아는 지중해 북단에 있는 소아시아의 남쯤 해안에 접한 지역이다. 해안의 길이가 120km이며 내륙 쪽으로 폭이 48km 정도의 이 지역은 동편에는 길리기아, 서쪽에는 루기아, 북쪽에는 비시디아가 인접해 있다.

 

그리고 버가는 밤빌리아의 중심 도시로 해안에서 내륙 쪽으로 13km정도에 위치해 있다.

 

바울은 돌아오는 길에서 다시 이곳을 들르게 된다.

 

(14:25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이곳에서의 바울 일행의 선교 행적에 관한 언급은 없다. 아마 별다른 성과가 없었던 듯하다.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 예루살렘에서부터 바울과 바나바를 동행하여

 

(12: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그들을 도우며 따라왔던

 

(5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

 

마가 요한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만 누가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요한이 떠난 이유에 대해서 학자에 따라 다음과 같이 추측이 다양하다.

 

(1) 사전에 구브로까지만 동행하기로 함.

(2) 사촌 바나바를 따라왔다가 바울이 선교의 주도권을 잡고 바나바가 소외된 데 대한 불만(Alexander),

(3) 향수병,

(4) 용기 부족으로 여행을 포기함(Lenski),

(5) 바울이 풍토병에 걸려(고후12:7;4:13, 14) 겁을 먹었음(Ramsay).

 

(고후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4:13-14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그러나 모두 다 설득력이 부족하다. 어쨌든 나중에 요한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지게 되는 점으로 보아 바울은 요한의 귀향으로 크게 실망하고 상심한 듯하다.

 

(15:37-39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13:14] 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 이곳은 안디옥 교회가 있는 수리아 안디옥과 구별되는 곳으로

 

(11: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해발 약 100m에 달하는 고원지대이다. 오늘날의 터키 중남부 지방의 얄바크(Yalvach) 근처의 폐허 지역을 말하며 당시에 이곳은 로마의 식민지였다.

 

바울은 3차 전도 여행 때에도 이곳을 들르게 된다.

 

(18:23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 셀류쿠스 왕조 때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거주했으므로 유대인들을 위한 회당이 있었다. 따라서 바울 일행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거행되는 예배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구브로나 이곳에서도 바울 일행이 회당을 먼저 찾은 것은 이방 땅에서 동족에 대한 친밀감을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방 선교 이전에 유대인에 대한 방문이 선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13:15]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 - 회당의 예배 순서 중 한 부분이 소개되고 있다. 여기서 율법서는 모세 오경을 가리키며 선지자의 글은 예언서를 말한다.

 

1세기경의 회당 예배는 쉐마(6:4-9) 기도,

 

(6:4-9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율법서와 예언서 낭독, 그리고 설교나 권면의 말씀과 축복의 순서로 진행되었던 것 같다.

 

성경이 회당에서 낭독되었던 전통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시작되었으며 B.C. 163년부터는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가 율법서 낭독을 금지하여 예언서만 낭독되었으나 마카비 혁명 때에 다시 율법서가 낭독되었다.

 

회당에서 성경은 히브리어로 낭독된 다음 다시 아람어나 코이네 헬라어로 통역되었다(Robertson).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예배순서상 권면의 말씀을 할 차례가 되었는데 회당장은 바울에게 사람을 보내어 설교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당시 예배 중에 설교 또는 권면의 말씀을 담당할 대상을 회당장이 자유롭게 선정할 수 있었다.

 

따라서 랍비나 방문자에게 설교를 요청할 수 있었다. 그러나 회당장은 예배 전에 설교자를 선정해야지 예배 도중에는 할 수 없었다(Haenchen, Robertson).

 

그러나 여기서는 예외로 회당장이 예배 도중 바울에게 설교를 요청하게 되는데 아마도 바울과 바나바의 일행이 예배 시작과 더불어 회당에 들어왔기 때문에 미리 설교를 부탁할 수 없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를 통해서 볼 때 회당장은 바울 일행에 관한 소문을 많이 듣고, 그들에 관해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 바울에게 설교를 요청하는 본문의 어투는 '만일'(에이)이라는 단어로 시작되는 조건적 제안으로서 상대방에게 공손하게 요청하는 말이다.

 

 

 

[13: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 회당장의 제안에 대한 응답으로 바울은 곧바로 일어나 설교를 하기 시작한다. 본래 회당 안에서의 설교는 관습적으로 앉아서 하는데

 

(4: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바울은 일어서서 손짓까지 하면서 설교를 한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은 열정적인 웅변가로 보여지게 된다. 아마 누가는 바울을 헬라적인 연설가로 묘사하려 했을지도 모른다(Haenchen).

 

어쨌든 이러한 형태의 설교는 유대 회당의 전통과는 다른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 여기서부터 바울의 설교가 시작된다. 서두에서 누가는 설교를 듣는 청중이 누구인지를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출생에 의한 유대인, 및 유대교로 완전히 개종한 이방인들을 가리키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10:2'경건한 사람'과 같은 의미로서,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으나 회당 예배에 참석하는 이방인을 가리킨다.(Haenchen, Bruce, Neil).

 

유대교로 완전히 개종한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으므로 이스라엘 사람에 포함된다.

 

 

 

[13: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 - 여기서부터 22절까지의 내용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요약으로 신앙 고백적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설교의 형태는 7장에서 소개된 스데반의 설교와 그 형식이 비슷하다.

 

그러나 바울의 설교는 스데반보다는 간략하다.

 

바울이 이스라엘을 구원시킨 하나님을 언급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라고 말한 것은 아마도 이방인 청중을 의식하여 언급한 듯하다(Lenski).

 

즉 이방인들이 생각하는 신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출애굽의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 본절에서 '조상들''그 백성'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아니면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히브리인들은 시문학에서는 병행 대구법(parallelism)을 사용해서 그 구절의 의미를 강조하거나 명확하게 하곤 했다. 만일 본 절이 그러한 형식을 취했다면 두 용어는 같은 의미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두 용어가 다른 의미로 쓰여 역사적인 흐름을 차례로 설명하고 있다면

'조상들'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그리고 야곱의 12아들을 칭하는 의미이며

'족장들'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스데반의 설교 내용과 본 절의 바울 설교를 비교해 볼 때 '족장들'로 해석하는 편이 무난하다.

 

큰 권능으로 - 에굽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킨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표현인 '큰 권능'70인역(LXX)역에서 영향받은 어투로(Robertson)

 

6:1, 6;5:15;136:12의 내용을 연상시킨다.

 

(6: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 내리라, 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5: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136:12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18]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 본 구절은 광야 40년간의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관계를 함축하고 있다.

 

'참으시고'로 번역된 혤라어 본문은 사본에 따라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1)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 많은 잘못을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참으신 사실을 부각시켜 준다.

 

(2) 이는 '돌보다'는 의미로 신 1:3170인역(LXX)에 따른 것이다.

 

(1: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 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몇몇 학자들이 이 해석을 지지하지만 (Holtzmann, Zahn, Bruce)

 

어떤 학자들은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만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Haenchen, Marshall, 아사노 중이찌).

 

사본상으로 '참으시고'가 더 많은 지지를 얻고 있으나 의미상으로는 '돌보시고'가 더 어울리기에 어느 하나를 강조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신 1:31의 히브리어 본문은 70인역의 '돌보시다'란 의미보다 '참으시다'의 의미에 더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