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거듭난 삶 2023. 12. 15.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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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니온 전도

 

성 경: [14:1-7]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2)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4)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

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6)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7)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14: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이고니온 - 이고니온(Iconium)은 헬라인에 의하여 도시국가로 변형되었는데 비옥한 고원지대(高原地帶)에 형성된 도시이다.

 

이곳은 당시 루가오니아(Lycaonia)의 수도였으며 로마로부터 자유로운 도시였으나 하드리안(Hadrian) 황제에 의해 식민지화되었다.

현재의 터키의 중요한 상업도시로 '코냐'(Konya)라 불리어진다.

 

이곳에도 역시 비시디아 안디옥처럼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했으며 회당을 중심으로 하여 신앙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와 마찬가지로 안식일의 예배에 참여하기 위해 회당에 들어갔을 것이다.

여기서는 어떻게 설교를 하게 되었는지 언급을 생략하고 있다. 이는 아마 같은 내용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문화적 배려라고 볼 수 있다.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 이 문장 역시 안디옥에서와 같이 이고니온에서도 유대인과 헬라인의 구별 없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14:2]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 - 이 말은 바울과 바나바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는, 즉 불신앙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 유대인이 바울과 바나바의 반대자로 언급된 것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와 동일하다.

 

참조 : (13: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 유대인들은 바울과 바나바의 설교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집단적인 공격 형태의 움직임까지 나타내고 있다.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 여기서 언급된 '형제들'은 기독교인을 가리키는 말로서 바울의 설교에서는 '형제들'이라는 말이 자주 쓰인다.

 

여기서의 '형제들'1절에서 언급한 '허다한 무리'에 속한 유대인과 이방인 개종자를 가리키며 누가가 본서에서 즐겨 사용하는 '제자'라는 말과 같은 의미다.

 

(6:1-2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9: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5-26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38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컫음을 받게 되었더라, 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13: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15: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6: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모친은 믿는 유대 여자요 부친은 헬라인이라)

 

 

 

[14: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두 사도가 오래 있어 - 개역성경에서는 명확하게 번역되지 않았으나 헬라어 본문에서는 이 문장은 접속사 '멘 운'('')과 함께 시작되어 앞에 진술된 내용과 본절 이후의 진술이 서로 인과 관계에 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 말을 '그래서'로 번역하여 인과 관계를 분명히 해주는 편이 좋다.

 

그런데 이 인과 관계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 학자나 번역본에 따라 두 가지로 분류된다.

 

(1) '개종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반대자들에게 지속적으로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해 두 사도는 오래 남아 있었다'.

 

(2) '주께서 그들에게 기적과 놀라운 일들을 행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은총에 관하여 그들이 전하는 말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 주셨다. 그래서 두 사도는 계속 남아 대담하게 말씀을 전했다'.

 

그런데 접속사 '멘 운'이 본절 초두에 나와서 2절과 본 절을 인과절로 접속시키고 있다. 따라서 두 사도가 이고니온에 오래 머문 직접적인 이유는 유대인들의 선동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영역 성경은 이와 같은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 (KJV).

 

표적과 기사 - 복음서에서 이 두 단어가 함께 언급된 곳은 마24:24와 요4:48 두 곳뿐이나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4: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본서에서는 본절 외에도 2:22,43;4:30;5:12;6:8;8:13 등 수 차례 언급되었다.

 

(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5:12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6: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8:13 시몬도 믿고 침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이는 누가가 사도들을 통해서 나타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기 위해 그 두 단어를 함께 사용했음을 의미한다.

 

 

 

[14:4]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 이고니온 성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두 부류 즉 바울과 바나바를 추종하는 무리와 유대인들의 선동에 의해 바울 일행에 악감을 품은 사람들로 나누어지게 된다. 이것은 곧 논쟁의 출발이며 바울 일행이 겪는 박해의 시작이다.

 

당시 헬라계 성읍에서 이와같은 파벌적 대립과 분열 그리고 그에 따른 논쟁은 흔히 있었던 일이었으므로(Alford)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두 사도 - 이는 바울과 바나바를 지칭하는 말로서 본서에 12명의 제자가 아닌 예수 추종자에게 사도라는 명칭이 처음 붙여지게 된다.

 

물론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계속하여 자신의 사도됨을 강조한 적이 있다.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고전 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9:1-2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15: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고후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1:1 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딤전 1: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딤후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그런데 본서의 저자 누가가 바울과 바나바에게 사도의 칭호를 적용시켰다는 사실은 당시 바울과 바나바의 지위가 사도로서 인정받았을 수 있었다는 점과 사도라는 말이 예수를 직접 수행한 12명의 제자 이외의 사람에게도 폭넓게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1: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14: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그 관원들이 - 이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는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로 그 지역을 통치하는 지도자들이다.

다시 말해 바울과 바나바에 대한 박해가 단순히 회당 지도자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한 박해만으로 끝나지 않고 정치 지도자들까지 가담하여 조직적이고 강력하게 대응하는 공격적 박해임을 말해주고 있다.

 

능욕하며 - 이것은 육체적으로 상해를 입히는 폭력행위라기보다는 경멸하는 어투와 마음을 가지고 상대를 괴롭히는 것을 나타낸다.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 그들의 능욕 행위는 투석을 통한 폭력행위로 발전하였다. 본래 돌로 사람을 쳐 죽이는 처형법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사형 집행 방법이었다. 이는 처형당하는 죄인에 대한 저주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미 이와 같은 투석 행위는 스데반에게도 있었던 일이다.

 

(7: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스데반을 향해 유대인들이 돌을 던질 때 그 일에 가담했던 바울이 스데반과 똑같은 폭력을 당하게 될 위기에 직면한 것은 9:16의 예언이 그에게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9: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그리고 이 묘사는 당시의 전도자가 필연적으로 져야 할 공통적인 십자가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런데 돌을 던지려는 행위가 실제로 발생한 것은 아니다. 이 상황 묘사는 박해자들이 돌을 던질 만큼 험악한 분위기에 다달았음을 의미한다.

 

 

 

[14:6]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 이 같은 표현은 바울과 바나바가 단순히 폭력을 두려워해서 도망친 것이 아니라 박해자들과 무리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옮겨갔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도망했다는 표현보다는 피하였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루가오니아 - 루아오니아(Lycaonia)는 소아시아의 중남부 지방으로 북쪽으로는 갈라디아가 있고, 동쪽에는 갑바도기아, 서쪽에는 브루기아 비시디아가 인접하여 있다. 이 지역은 마게도냐에 정복된 적이 있으므로 코이네 헬라어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루스드라 루스드라(Lystra)는 루가오니아의 중남부 지방에 위치한 성으로서 이고니온 성에서 약 38km 남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소수의 로마군이 지배하고 있는 전원 도시였다. 이곳은 해상을 통한 무역을 할 수 없었으므로 그곳 주민은 주로 농사와 목축에 의존했다. 약간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으나 회당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디모데와 그의 어머니 유니게가 살았고(16:2,3;딤후1:5), 바울 일행은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 같다.

 

(16:2-3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 새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딤후 1: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더베 - 이곳은 루스드라에서 동남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길리기아와 인접한 곳으로 로마의 글라우디우스 황제의 이름을 따 글라우디우스 티베라 불리기도 한다.

 

바울은 이곳에서 1차 전도 여행을 마무리 짓고 안디옥으로 되돌아 가지만 그 후 제2차 전도 여행 때 다시 이곳을 방문하게 된다.

 

(16: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모친은 믿는 유대 여자요 부친은 헬라인이라).

 

특히 이곳은 아시아까지 바울과 동행한 가이오의 출신지로 알려져 있다.

 

(20:4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오와 드로비모라).

 

 

 

[14:7]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 이 말은 6절에서 도망했다는 진술이 반대자들을 두려워해서 숨어버린 것이 아니라 반대자들과의 충돌을 피해 활동 무대를 옮겨간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즉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의 일행이 어떤 난관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전심전력하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한편 로버트슨(Robertson)은 바울과 바나바가 이곳 언어를 잘 몰랐기 때문에 안디옥이나 이고니온에서 온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복음을 전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렌스키(Lenski)는 어디서나 헬라어가 통용되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 지역은 팔레스틴 지역과 마찬가지로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점령된 적이 있었으므로 헬라문화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이는 이 지역에서 코이네(Koine) 헬라어가 통용되었을 가능성이 큼을 암시한다.

따라서 렌스키의 의견이 설득력 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