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거듭난 삶 2023. 12. 17.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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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으로 귀환

 

성 경: [14:19-28]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20) 제자들이 둘러 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24)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7)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활동을 시기하며 비방했던 안디옥 유대인들과,

 

(13:14 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로 오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던 이고니온에 사는 유대인들이 (2,5)

 

(2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루스드라까지 쫓아와서 박해를 가하였음을 진술한다.

 

무리를 초인(招引)하여 - '선동하다'란 의미를 더 강하게 나타낸다.

그들이 루스드라 사람들을 어떤 방식으로 선동했는지 본문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으나 짐작컨대 그 두 사람이 마술과 같은 속임수로 루스드라 사람들의 종교를 파괴하려 한다고 선동했을 것이다.

 

실제로 본서 19장에서 은장색(銀匠色) 데메드리오가 에베소 지방의 사람들을 선동할 때도 바울이 에베소의 여신 '아데미'를 무시하고 그 종교를 폐하려 한다고 소리쳤다.

 

(19:26-27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27) 우리의 이 영업만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도 경홀히 여김이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돌로 바울을 쳐서 본 절에서 돌에 맞은 사람이 바울 한사람으로 언급되고 있다. 왜 바울만 폭력을 당하고 바나바는 언급이 없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다만 바울이 말을 계속 해왔기 때문에(12) 표적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2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그리고 여기서 돌로 친 주체자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문맥상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미 이고니온에서 음모가

 

(5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루스드라에서 성공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면서 누가는 그들의 핍박이 매우 집요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사건을 바울은 고후 11:25에서 회상하며 언급하고 있다.

 

(고후 11: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 이 표현으로 보아 바울을 돌로 친 현장이 성 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13절에서 언급된 장소, 즉 앉은뱅이를 고치고 설교하던 곳에서 폭행을 당한 듯하다.

 

(13성 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일 때는 성 밖으로 스데반을 끌어낸 다음 돌로 쳤으나

 

(7: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바울은 성 안에서 돌에 맞은 후 밖으로 끌어내졌다는 점에서 두 사건은 서로 대조된다. 이는 바울을 쳐 죽이려 하는 무리들이 절차를 무시할 정도로 격분해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따라서 바울에 대한 그들의 박해가 스데반보다 더 잔인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누가는 이 사실을 부각시켜 스데반의 박해자가 스데반과 똑같은 방식으로, 더 나아가 훨씬 더 잔인하게 박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14:20] 제자들이 둘러 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 - 19절에서 바울이 거의 죽은 것 같이 되어 성 밖으로 내다 버려졌던 사실이 언급되었듯이 바울은 죽음에 이를 만큼 깊은 상처를 입고 고통의 신음을 하고 있었을 자리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어났다.

 

그리고 누가는 그 일의 증인들로서 제자들을 언급했다. 이 제자들이 쓰러진 바울을 중심으로 둘러섰던 것은 바울의 상태를 알아보고 죽었으면 장례 절차를 집행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Robertson, Bengel).

 

그러나 본문은 그들이 쓰러진 바울에게 어떠한 조치를 취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아마 누가는 바울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건강하게 일어선 것을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이는 제자들이 그의 주위에 둘러서서 어떤 행위를 취하기 전에 바울이 일어났음을 암시한 데서 더욱 분명해진다.

 

더베 - 루스드라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1차 선교 여행의 마지막 지점인 더베(Derbe)로 오게 된다.

 

 

 

[14: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 이곳 더베에서는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처럼 박해를 받았다는 언급이 없으며 설교의 내용이나 기적 사건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이 없고 간략하게 이곳에서의 활동만이 서술되어 있다. 아마도 주목할 만한 사건이 없었거나 순조롭게 전도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특히 루스드라에까지 쫓아와서 바울을 돌로 쳤던 유대인들은 그가 죽은 줄 알았으므로

 

(19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의 유대인이 거주하던 더베에서는 박해가 없었을 것이다.

 

한편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을 마감하면서 저자는 많은 제자를 얻었다는 성공적인 성과를 언급함으로써 바울의 선교 전체가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간결한 어투와 함께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그리고 안디옥으로 돌아갔다는 짤막한 언급은 그곳에서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뿌린 복음의 씨앗이 어떻게 결실을 맺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 바울의 믿음을 암시한 듯하다. 이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바울의 깊은 애정과 세심한 배려를 보여준다.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마음을 굳게 하여 -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에피스테리조''힘있게 해 준다', '튼튼하게 만든다'는 뜻을 갖고 있다. 이는 바울이 방문한 곳에서 개종자들을 격려하며 믿음 위에 굳게 서게 하였다는 말이다.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 이같은 바울 일행의 권면은 초기 기독교의 신앙을 잘 반영해 준다. 즉 예수에 대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곧 고통과 박해를 겪는 것으로 이해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본 절에서 이것은 초기 기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이 겪어야 하는 것으로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된 실존(實存)에 해당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의 이 말은 당시 바울 및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당했던 박해와 수난들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인해 고난받는 모든 자들에게 위로가 된다.

 

 

 

[14: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각 교회에서 - 바나바와 바울이 전도한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에 신앙 공동체가 성립되었음을 명시해 주고 있다. 그들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자기들을 따르는 제자들을 계속 배출했으며

 

(4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 20-21 제자들이 둘러 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을 중심으로 이방 지역에서 견고한 조직체를 만들어 갔다.

 

장로들을 택하여 - 집단적인 공동체를 조직적으로 관리하고 활동적으로 이끌기 위한 지도자로 장로를 택하게 되었는데 이미 11:30에서 장로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11: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그러나 장로를 택하여 세웠다는 언급은 여기서 처음 나온다.

 

장로(elder)는 감독자라는 직분으로 언급되기도 하며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다스리며

 

(12:8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음으로 할 것이니라;

 

살전 5: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수고하는 자로 언급되기도 한다.

 

(고전 16:16 이 같은 자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하라)

 

그러나 이러한 언급만으로 당시 장로들의 정확한 직분을 규명하기 곤란하다. 단순한 교회의 봉사직으로서 설교할 권한은 부여되지 않았다는 주장(Zahn)도 있으나 오늘날의 목회자와 같은 기능을 하며 성도들을 돌보는 자로서 언급된 점으로 보아(1:5;5:14) 사실상 목회자였다고 볼 수 있다.

 

(1:5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5: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한편 본 절에서 장로를 어떠한 방법으로 택했는지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 없다. 예루살렘이나 기존 교회들로부터 파송된 사람이 장로의 직분을 맡았는지 아니면 각 지역 자치 내에서 믿음이 충만한 자를 택하여 그 일을 맡겼는지 확실치 않다.

 

다만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이나 안디옥 등과 같이 기존의 교회로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장로를 세운 점으로 보아 각 지역 자체 내에서 장로들을 선출하여 임명한 것 같다.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들을 세우면서 금식하고 기도하며 지도자들을 주께 부탁한 것은 선출된 자들에게 지도자로서의 권위와 직분의 거룩성을 부각시켜 주고 있다.

 

한편 여기서 바울이 사도의 권한을 행사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즉 누가는 하나님과 교회 지도자를 중재(仲載)하는 바울의 역할을 보여줌으로써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암시적으로 내세웠다.

 

 

 

[14:24]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 -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음을 간략하게 언급함으로써 빠르게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참고 : (13:13-14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14) 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14:25]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앗달리아 - 바울 일행은 버가(13:13)를 거쳐 앗달리아(Attalia)로 방향을 바꾸어 진행하게 된다. 왜 방향을 바꾸어 앗달리아로 갔는지 그 이유는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버가에서도 복음을 전한 점으로 보아 귀환 길에도 쉬임없이 전도활동을 계속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바울 일행은 전도의 목적을 갖고 앗달리아로 갔을 것이다. 앗달리아는 항구도시(port city)로서 버가의 서남쪽 약 26km에 위치해 있는데 이 항구도시는 B.C.159-138에 버가몬의 왕으로 지냈던 아탈루스(Attalus II) 왕이 건설한 것이다(Jacquier). 지금은 아달라(Adala)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 도시를 찾은 것은 소아시아의 남단에서 이 도시가 가장 큰 항구도시로 인구가 많아 전도 전략상 중요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14: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배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 앗달리아에서 복음을 전한 결과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또한 전도 여행시 처음 찾은 곳인 구브로(Cyprus)(13:4-12)으로 돌아가지 않고 곧바로 안디옥으로 직행한 이유도 밝히지 않고 있다.

 

(13:4-12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

6)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니

7)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8) 이 박수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0)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12)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이는 앗달리아에서는 다른 지역에서의 선교 사역과 비교해 볼 때 뚜렷한 성과나 특별한 일이 없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 - 여기서 누가는 바울 일행이 구브로를 거쳐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더베 등에서 성공적 결과를 거둔 전도 활동이 안디옥 교회에서 출발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부탁하다'라는 말은 안디옥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전도자로 임명하여 파송한 사실을 다시 확인시키는 것이다.

 

참조 : (13:1-3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14:27]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교회를 모아 - 그들이 돌아와 교회를 모았다는 것은 교회 신도들을 불러 모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모임이라는 주장은(Fern-ux) 자연스럽지 못하다.

 

아마 바울과 바나바의 귀환은 안디옥 교회의 큰 경사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래서 온 교우들이 모인 자리에서 선교 보고회를 열었던 것이다.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 본 절에서 누가는 이방인의 개종 사실이 하나님의 역사하심 속에 이루어진 것임을 밝힘으로써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 시작된 이방인에 대한 선교(宣敎) 활동이 하나님에 의한 일임을 밝혀 그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다.

 

물론 베드로나

 

(9:32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11: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빌립보에 의해서도

 

(8:4-13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9)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10)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11) 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

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침례를 받으니

13) 시몬도 믿고 침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가 이루어졌지만 바울과 바나바가 행한 것처럼 본격적인 것이 아니었다. 특히 이방 선교를 위해 안디옥 교회가 직접 나서서 이방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14: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오래 있으니라 - 이 표현은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이미 누가는 9:4310:48에서도 베드로가 한 곳에 오래 유()한 것을 보여줌으로써 베드로의 선교 활동이 매우 고무적인 것이었음을 암시해 준 바 있다.

 

(9:43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피장의 집에서 유하니라;

 

10: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여기서도 역시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활동에 대해 안디옥 교회가 열렬히 찬사를 보내고 환영했음을 짐작케 해준다. 또한 오래 머물렀다는 말은 긴 휴식을 취했다는 의미로 선교 활동이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한 간접적 표현이기도 하다.

 

또한 바울과 바나바에게는 제2차 전도 여행을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바울은 여기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까지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상당한 기간이었을 것이다.

 

그 기간을 대부분의 학자들은 약 1년 안팎으로 본다(Levin, Alford, Lenski). 이렇게 함으로써 안디옥은 이방 선교를 위한 중심 교회로서 그 자리를 굳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