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거듭난 삶 2023. 12. 16.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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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드라 전도

 

성 경: [14:8-1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본 적이 없는 자라

9)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10)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11)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2)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13) 성 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15)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17)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14: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본 적이 없는 자라

 

나면서 앉은뱅이 - 이 환자는 발이 있으나 무기력하여 힘을 쓸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저자는 이러한 상태가 태어나면서부터 있었다고 보충 설명을 하여 그의 질병이 치유 불가능한 것임을 강조한다.

 

이 이야기는 베드로와 요한에 의해서 성전 미문(美門) 앞에서 고침을 받은 앉은뱅이 이야기와 비슷하다.

 

(3: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아마도 누가는 앉은뱅이를 고친 두 사건에 중요한 의미를 둔 것 같다.

 

(1) 베드로처럼 바울도 앉은뱅이를 고침으로써 동등한 사도권이 바울에게도 인정됨을 암시하고자 했을 것이다.

(2) 베드로는 유대인을, 바울은 이방인을 치료한 사실을 대비시킴으로써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 바울을 부각시키고 있는 듯하다.

 

 

 

[14:9]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구원받을 만한 믿음 - 이 표현은 앉은뱅이 환자가 바울의 설교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바울은 이러한 그를 눈여겨 보았기에 그에게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병 고침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으로 '믿음'이 언급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나타나는 병 고침의 전제는 주로 환자의 믿음과 관계된 것으로 묘사되었다.

 

(3: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9:21-29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22)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25)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26)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5: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7: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8: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18:42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여기서 언급된 '구원받을'이라는 말은 '구원하다'란 의미 외에 '온전하게 하다' 또는 '건강하게 하다'의 뜻도 지닌다.

 

여기서는 직접적으로 앉은뱅이의 무기력한 발이 완전하게 되어 건강하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한편 본 치유 사건은 3:2-6에서 언급되는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와 내용상 다르게 언급된다.

 

(3:2-6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즉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는 단순히 무엇을 얻을까 하는 구걸인으로 묘사된 반면, 본문에서는 앉은뱅이의 마음속에 치료받을 만한 믿음이 있다고 묘사되고 있다. 여기에는 저자인 누가의 의도가 암시되어 있는 듯하다.

 

즉 그는 이방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치병 기적을 언급함으로써 이방인에게도 구원받을 자격이 있음을 나타내며 또한 바울의 이방 선교에 대한 정당성을 선포하고자 의도했을 것이다.

 

 

 

[14:10]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 여기서 바울이 큰 소리로 외쳐 말한 것은 아마 환자에게 믿음을 북돋우고 확신을 주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 이 묘사는 3장에서 언급된 미문의 앉은뱅이가 구원받은 묘사와 비슷하다. 즉 걸을 뿐만 아니라 뛰기도 했다는 이 표현은 구원 곧 치유가 바울의 소리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구절은 그 앉은뱅이가 차츰차츰 걷게 되었다든가 다소 불편한 걸음이 아니라 완전히 회복된 정상적인 모습을 갖추었다는 강조적 표현이다.

 

 

 

[14:11]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본 구절은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고 뛰는 현장을 목격한 루가오니아 사람들이 놀라와하며 흥분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그들은 흥분하여 격앙된 목소리로 기적의 현장을 떠들석하게 했다.

그리고 그들이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말하였다는 표현은 이제까지 루가오니아 말로 하지 않고 다른 말을 사용했을 가능성을 암시해 준다.

 

네일(W.Neil)에 따르면 소아시아의 다른 성읍들과 마찬가지로 루스드라는 평상시 3개의 언어가 통용되었다고 한다.

 

(1) 라틴어 : 루스드라는 로마의 식민지였으므로 라틴어가 공식적인 언어였다.

(2) 헬라어 : 로마의 상용어(Lingue franca)로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 말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었다.

(3) 모국어 : 이는 성읍 사람들끼리의 통상적인 의사소통 수단이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이 언어를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Haenchen, Bruce).

 

바울이 설교하는 동안 헬라어가 사용되었을 것이나 그들이 흥분한 나머지 자기들의 언어인 루가오니아 말로 소리쳐 말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 신이 인간의 형상으로 인간에게 나타난다는 믿음은 보편적인 것이었다.

이는 헬라의 신화에서 신들이 인간들과 동일한 생활을 하며 사고방식을 지닌 것으로 묘사된 데서 더욱 분명해진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형상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교리는 헬라 문화권에 결코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14:12]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 - '쓰스'는 헬라어로 '제우스'인데,

'제우스'는 헬라 신화에서 모든 신들의 우두머리로 묘사되어 있으며 '허메'는 제우스의 대변자로서 언어를 지배하는 신으로 묘사되어 있다(Jamblichus).

 

아마 바나바는 당당한 체구와 존경받을 만한 위용(威容)을 지닌 사람(Chrysostom, Zahn)이었기에 '제우스'로 불리었을 것이며, 바울은 앉은뱅이에게 말을 하였다는 점에서 언어를 지배하는 신인 허메로 불리어졌을 것이다.

 

한편 루스드라에 사는 사람들이 헬라 신화 속에 나오는 신으로 바울과 바나바를 이해한 것은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이 얼마나 놀랍고 경이적인 사건이었는지를 암시해준다.

 

 

 

[14:13] 성 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성 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 - 일반적으로 헬라 지역 내의 도시들은 신전을 중심으로 방사선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루스드라의 쓰스 신당과 같이 헬라 지역 이외의 신전들은 성 밖에 세워졌던 것 같다.

 

그리고 뷔켄하우저(Wikenhauser)에 따르면 신전이 성 밖에 있었던 것은 그렇게 드물지 않았다고 전한다. 한편 신당과 제사장이 있었다는 점으로 보아 종교적인 제사가 행해지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이 지역은 본래 헬라 문화권 밖에 있었으나 알렉산더에 의해 소아시아 지방이 헬라화될 때 헬라문화가 뿌리를 내렸다. 이때 헬라의 다신교가 이곳에 전해져 정착된 것 같다.

 

소와 화관 - 이는 제사장이 예배하기 위해 가져온 제물이다.

 

''는 엄격한 의미에서 황소를 뜻한다. 그리고 화관은 꽃다발(harland)을 뜻한다.

당시 제우스와 머큐리 신에게는 황소를 제물로 바쳐 제사하며 화환을 함께 올려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Robertson).

 

대문 앞 - 바울의 설교가 행해졌고 앉은뱅이가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났으며 신당의 제사장이 달려온 이 장소는 대문 앞이라고만 언급되어 있으므로 정확한 위치와 장소를 알 수 없다.

 

성 밖에 있는 신당의 대문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Ramsay, Bruce) 문맥상 바울의 설교가 성() 안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오히려 성안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즉 성안의 자신들이 머물렀던 집 대문이라든가 아니면 어떤 큰 집 대문을 뜻할 수도 있을 것이다(Alford, Lumby). 그러나 대중 설교를 할 수 있는 대문이라면 가정집이라기보다는 대중들이 쉽게 모일 수 있는 성문 앞으로 생각할 수 있다(Hervey, Blass).

 

당시 이곳은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구걸도 하며 많은 사람들이 모여 거래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언급된 대문 앞은 성문 앞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

 

 

 

[14: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 옷을 찢는 행위는 참을 수 없는 울분과 비통한 심정이나 절망과 증오를 위한 것으로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습관이었다.

 

(37:29 르우벤이 돌아와서 구덩이에 이르러 본즉 거기 요셉이 없는지라 옷을 찢고, 34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7:6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삼하 13:19 다말이 재를 그 머리에 무릅쓰고 그 채색옷을 찢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크게 울며 가니라;

 

왕하 18:37 이에 힐기야의 아들 궁내대신 엘리야김과 서기관 셉나와 아삽의 아들 사관 요아가 그 옷을 찢고 히스기야에게 나아가서 랍사게의 말을 고하니라;

 

19:1 히스기야 왕이 듣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26:65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그리고 군중 속으로 뛰어들었다는 묘사는 옷을 찢는 행위를 통해 보여준 바울과 바나바의 단호한 의지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즉 그들은 루스드라 주민들의 그같은 행위를 절대 용납할 수 없음을 단호하게 보여준다.

 

아마 바울과 바나바는 처음 루스드라 사람들이 그들의 언어로 말할 때는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다가

 

(11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제사를 준비하게 되자 그 내용을 알아차리고 당황하여 다급한 심정으로 이 같은 행동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14:15]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성정(性情)을 가진 사람이라 - 바울과 바나바는 여기서 제사를 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성정(性情)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호모이오파데이스'로 동일한 본성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과 본성이 다른 신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적 본성을 지닌 존재임을 강조한다.

 

이 헛된 일 - 헛된 일은 제우스 신에게 제사하는 행위 또는 사람을 신으로 알고 경배하는 행위를 말한다.

아마 바울과 바나바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염두에 두고 그렇게 말한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곧 루스드라인들에게 신관(神觀)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14: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 여기서 말하는 길이란 삶을 살아가는 가치관이나 종교적 진리, 세계관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각 이방 나라의 관습과 종교생활 등에 대해 책망하시거나 벌하시지 않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14:17]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그러나 이 말의 헬라어 '카이토이게''그렇다해도', '그러면서도'를 의미하는 복합 접속사이다. 이 접속사는 앞 문장과 뒷 문장을 반대적 의미로 연결한다기보다는 앞의 진술과 관련이 있으면서 또 다른 내용의 진술로 전환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 각 민족들이 자신들의 다양한 종교, 가치관, 세계관을 갖고 살아왔지만 그것 역시 하나님과 무관하지 않고 자연의 변화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각 민족들에게 계시하셨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15절에서 언급한 창조자로서의 하나님께서 자연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셨으므로 자연을 통해서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는 자연 계시에 대한 진술이다.

 

바울은 17:24-29과 로마서 1:19,20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을 설교하고 있다.

 

(17:24-29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로마서 1:19-20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따라서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열려 있었다는 말이 된다.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 이 말은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은혜가 풍족하게 주어졌으며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은혜에 만족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보편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모든 민족을 하나님은 공평히 사랑해 왔음을 말하는 일반은총에 대한 진술이다.

 

 

 

[14: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겨우 무리를 말려 - 바울과 바나바가 자신들을 신격화하는 루스드라 사람들의 잘못된 열심을 꺾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음을 '겨우'라는 단어를 통해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