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거듭난 삶 2023. 12. 23.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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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개신(改信)에 대해서

 

사도행전 91-22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12)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침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바울이 격렬한 그리스도교도 박해자에서 곧 변하여 열심있는 사도로 된 일에 대하여, 성서의 기사를 조합해 볼 때 그중에 분명한 모순이 있다.

 

여기서 인가, 우리들은 성서의 기사에 대하여 철두철미 이것을 말 따라서 취함의 필요 없고, 또 세사(世事)에 있어서 모순 당착 있음은 조금도 전체의 정신에 대하여 의심을 품음의 이유로는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사도행전 9장에 있어서 의심스러운 점은 제1로 아나니아의 기사이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인도하심에 있어서, 어떠한 방법으로써 한대도,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본장의 기사처럼, 바울이 교도(敎徒) 박해의 도상에서 이상을 경험하고, 시력을 잃고 다메섹으로 도움 받아 들어가게 되고, 임시 숙소에서 주의 명하심을 기다리는 때,

 

아나니아에게 주께서 이상(異常)중 나타나, 일일이 지명하시고, 아나니아는 이에 따라 바울을 방문하고, 주의 명을 고하여 침례를 주고, 바울은 곧 시력을 회복하고, 회당에 들어가 설교하고, 청중을 놀라게 했다는 것이고 보면, 너무나도 소설화된 있기 어려운 일로서, 믿을 수 없는 점이 있다.

 

어떤 신앙가는 한 일 한 가지 있을 때마다 꿈 또는 이상으로서 하는 주의 특별한 지도(指導)가 있다고 하는데, 이런 종류의 신앙은 물론 느껴야 할 점도 있지만, 대체에 있어서 건전한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바울이 회개한 사실에 대해서는, 사도행전의 기사에 의하지 않고서, 그 자신의 서한에 신뢰를 두고 싶다. 물론 사도행전의 기사를 부인할 증거도 없으나, 우리의 신앙을 키우는 데는 이 편이 좋을 것이다.

 

무릇 그러한 과대의 기사는 그러한 경우에 있어서 극히 흔히 있는 일로서, 우리나라(일본)의 종조상인의 전기에는 반드시 이것이 따르는 것으로서 마치 극작자의 상상 그대로를 실현케 한 것 중, 이것도 저것도 모두 그러하다.

 

모름지기 바울을 존경한 나머지 생긴 사람의 상상이 가해된 것이리라. 이는 명민한 사적두뇌를 가진 자가 곧 해득하는 바이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전연 사실을 부인하려고 하는 것은, 이는 또 매우 잘못된 일이다.

 

그러한 기사가 있는 것은, 그 사실의 존재를 일층 확실케 할지언정, 부인(否認)의 재료로는 되지 않는다. 세상에 이런 종류의 기사는 허다한 것이다.

 

그러면 9장 중에서 얼마만큼이 의심 없는 점일까? 그것은 열심 있는 애국자로서 격렬한 그리스도교 반대자인 바울이, 교도(敎徒) 박해의 한 가운데 있어서 무엇엔가 억제되어, 아연 일변하여 그 신도로 된 것, 단지 그리스도교에 대한 태도 뿐 아니라, 그 생애가 아주 변한 일, 그것만은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어떠한 일이 있었던가, 그가 주 그리스도를 만난 것은 상상일가, 진실인가, 누구도 살펴 알 수는 없다. 그 자신 외에 증인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개신(改信)한 일, 그것만은 사실이다. 만약 이것도 의심한다면, 단지 그리스도교를 해득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세계의 역사를 해석할 수가 없다.

 

이 장에서 배울 점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여 로마 제국에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는가 이다.

 

하나님은 그 자신 직접의 능력으로서, 사람의 수단을 조금도 빌지 않으시고 강적 바울을 눌러(붙잡아) 전도케 하신 것이다.

 

사람의 의표(생각)에 지나는 통쾌사로서 이 같은 것은 없다. 바울은 확실히 그리스도 자신에게 붙잡힌 것이다.

 

무릇 세상의 신자라는 신자는 어느 누구나 모두 무언가에 의해, 어떤 사정위해, 생애의 어떤 때에 있어서, 혹은 병환에 의해서 일지, 혹은 또는 사랑하는 사업의 실패일지, 결국은 무엇이건, 무언가에 의해,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자이다.

 

옳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실로 부득해서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나 자신의 힘에 의해 또는 생각에 의해 신자로 된 것이라면, 오늘의 신자는 내일은 곧 신앙을 버리게 되리라. 어떤 사람은, 신앙이 그런 것이라면 나는 이를 어쩔 수 없고, 다만 하나님의 뜻대로서 어쩔 수 없다고 탄식할지 모르나, 사실은 그런 것이매, 하는 수 없는 것이다.

 

각자 그 생애를 돌아보아 이런 감이 많으리라. 하지만 우리들은 세상에 그리스도에 대한 반대자가 아무리 많더라도, 그것이 또 아무리 유력하더라도 조금도 실망할 것 못된다.

하나님의 뜻이 있을 때는, 어떠한 사람도 이를 믿기에 이른다. 이는 인간이 관여할 바가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하는 일로서, 오늘에 있어서도 많은 좋은 신자는 이렇게 하여 하나님 자신에게 사로잡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본장의 기사로는 바울은 개신하고 곧 다메섹에 들어가 설교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역시 그 자신의 서간 갈라디아서에 의할 것이리라.

 

그는 개신 후 곧 아라비아로 가서, 시내산의 남방에서 3년간을 사고(思考)로 보내고 다소로 돌아와 또한 15년간 고요한 생애를 보내고, 기운의 도래를 기다려 안디옥으로 갔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전도의 소리를 발했는데, 이것이 바울의 본연의 모습(진면목)이다.

 

이 바울에게 비로소 저 대전도가 있었던 것이다.

 

사도행전의 역사적 가치는, 그 시초에 있어서는 적고 그 끝에 있어서는 많은 것은, 연구자가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일이며, 바울의 개신 기사의 경우에 있어서도, 사실은 이 글()에 의하지 않고서 그의 서간들에 의해야 하리라.

 

하지만, 이 모순 이 의심은 중요한 일에는 조금도 저촉되지 않는 것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직접 부르심 즉, 성소(聖召)에 의해 개신된 것은 확실한 대사실이다. 우리들이 사도행전의 이 장에서 배워야 할 점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촌감삼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