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거듭난 삶 2024. 1. 23.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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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고별 설교

 

성 경: [20:17-24]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18)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0: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

 

배가 밀레도 항구에 닿자마자 바울은 그곳에서 직선거리로 약 50km 떨어진 에베소에 사자를 보내어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presbyters) 청하였다.

이것은 에베소 교회를 향한 바울의 평상시 관심과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한편 '장로들'은 각 교회의 지도자들(leaders)을 가리킨다.

 

(14: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본 설교에서 '감독자들'이라고도 지칭된 그들은

 

(28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교회 내의 행정적 일은 물론이고 목회적 임무까지 수행했으리라 짐작된다.

 

(5: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벧전 5:1-4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20:18]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오매 - 추측컨대 에베소 장로들이 밀레도에 도착하기까지는 삼일이 걸렸을 것이다(Ramsay). 그리고 그들이 바울의 요구에 순종하는 것을 성가시게 여기지 않고 기꺼이 찾아온 것은 겸손의 표시이기도 하다.

 

첫날부터 지금까지 - 3년에 걸친 에베소 사역 기간을 가리킨다.

 

(31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너희도 아는 바니 - 원문에는 이 문구가 본절의 처음에 나와 강조 용법으로 표현되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그리고 그 삶에 대한 에베소 장로들의 지식과 판단에 호소하면서 연설을 시작한다.

 

이처럼 바울은 중요한 순간에 언제나 가르침과 삶이 일치한 자신의 실생활을 증거삼아 복음으로 살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고전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살전 2:1-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감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2)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3)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4)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6)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그러나 너희에게든지 다른 이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

7)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10)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11)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12)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20: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겸손과 - 주님께 예속된 자의 자발적인 봉사와 섬김의 자세를 의미한다.

 

눈물이며 - 31절에서도 눈물이 다시 언급되며 또한 고후 2:4과 빌 3:18에서도 그의 눈물이 언급되는데 이는 그가 고도의 지성인이었지만 뜨거운 감정의 소유자이기도 한 것을 보여준다.

 

(31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고후 2:4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이 눈물은 주님을 섬겨나가는 과정에서 주님을 거부하는 인생들을 보면서 그 아픔에 못이겨 나온 것이며 또한 자기 동족의 회심을 위한 그의 애타는 심정의 표현일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비판자들이 말하는 감상적인 눈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의 영광스러운 확장을 위한 눈물이라 하겠다.

 

유대인의 간계 - 유대인의 간계로 인한 시험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유대인들은 가는 곳마다 바울을 괴롭혔으며

 

(13: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14:2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17: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또한 19:9,13,33,34을 보면

 

(19: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33-34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발명하려 하나

34) 저희는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 동안이나 하더니)

 

유대인들의 적개심(敵愾心)이 얼마나 혹독했던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린도 후서 11장은 에베소에서의 유대인의 핍박이 어떠했는지를 능히 짐작케 한다.

 

주를 섬긴 것과 - 여기서 섬긴다는 표현을 '둘류온'으로 나타낸 것은 바울 자신이 주님의 ''(둘로스)임을 깊이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현재 시제의 사용은 지금도 변함없이 주를 섬긴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겸손과 눈물 그리고 시험을 참고 오직 '둘로스'로서 주님만을 섬긴 것!

이것이 사도가 간증한 에베소에서의 생활 방식과 신앙 태도였다.

 

 

 

[20: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 바울이 복음을 전파할 때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여 부지런히 목회한 것을 본다.

 

여기서 '공중 앞에서'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던 회당이나

 

(18:19 에베소에 와서 저희를 거기 머물러 두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19: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두란노 서원을 뜻하며

 

'각 집에서'란 그들의 필요를 따라 바울이 심방한 에베소 교인의 집이나 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을 의미한다.

 

(18: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따라서 강단에서 왜 선포적인 설교와 동시에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살피고 권면(勸勉)하고 가르치는 심방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공적인 설교만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여 사적인 방문을 태만히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자신이 증거한 하나님의 말씀이 양들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열매 맺는가를 살피지 않은 게으른 종이 될 것이다.

 

꺼림이 없이 - 자신이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이 사람의 비위를 거스릴까 무서워 억제하거나, 움추러 들거나, 또는 교묘한 가장을 하거나 취소하는 것이 없이 즉 교훈과 책망을 비롯하여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삭감이나 은폐함이 없이 담대히 다 증거 하였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복음을 맡은 자로서 증거의 책임을 다한 자신의 떳떳한 사역을 변호한 말이다.

 

 

 

[20: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 회개와 믿음! 이것은 바울이 증거한 핵심 내용이며 기독교의 중심 진리이다.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 모두에게 회개와 믿음을 요구했다.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사람이 죄 사함을 얻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떠나 사는 죄의 자리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오는 회개(메타노이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께 범죄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죄인이로소이다'는 각성과 함께 그 죄에 대한 형벌과 멸망을 알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죄의 자리에서 떠나 하나님께 나오는 회개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왔으면 이제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죄의 형벌을 담당하셨고 또한 자신의 부활을 통해 우리를 죄의 권세에서 해방시키고 의롭다 하시며 새 생명을 주시는 길을 여셨기 때문이다.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마련하신 이 은혜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회개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믿음과 결부되지 않은 회개 그 자체는 개과천선(改過遷善)에 머무는 세속 윤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요컨대 회개와 믿음은 불가분적 관계에 있으며, 구원은 먼저 회개가 있고 이것에 우리 주 예수께 대한 믿음이 결부될 때에만 얻을 수 있다.

 

 

 

[20: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심령에 매임을 받아 - '심령에'를 가리키는 '토 프뉴마티'

 

'심령에'(in the spirit)냐 아니면 '성령에'(by the spirit)냐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리지만,

 

문맥과 전체 내용으로 볼 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이 짊어져야 할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는 표현으로

 

'심령에'라는 해석을 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심령에 매임을 받아'란 말은 바울의 앞에 일을 고난을 확실하게 예견하고 있었으나 하나님의 뜻에 의한 성령의 지시로 가지 않을 수 없는 당위성 속에서 느끼는 하나의 내적인 압박감(壓迫感) 같은 마음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억지로 순종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 일을 위해 자발적으로 여기까지 왔기 때문이다.

 

 

 

[20: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 바울이 친히 성령의 지시를 받았을 수도 있으나 그보다는 바울이 통과해 지나가는 도시에서마다 성령이 예언자들을 시켜 그가 예루살렘에서 당하게 될 운명을 말해준 것을 가리킨다고 봄이 더 자연스럽다.

 

(21:10-14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는 바울의 앞에는 지금까지 당했던 어떠한 어려움보다도 더 심한 상황들, 곧 문자 그대로 실제적인 투옥(쇠고랑)과 견딜 수 없는 극심한 환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무거운 말씀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복음을 위해 사는 사도 앞에 놓여진 현실이었다.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 끊임없이 그리고 오로지 주를 위해 충성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본문은 이런 현실 앞에서 바울이 어떠한 태도를 취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즉 결론적으로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명이 참으로 귀한 것이로되 자기 생명이 자기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생명에 대한 맹목적인 애착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자기 생명 때문에 자기 생명의 존재 이유를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자신의 생명을 관심밖에 둠으로써 자기가 존재하고 있는 그 거룩한 목적을 완성하려고 한 것이다.

 

바우어(Bauer)는 이 구절을

 

"을 다하기만 하면(을 위해서라면) 나는 기꺼이 내 생명을 내놓겠습니다.

(또는 나는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라는 의미로 이해하여 바울이 오직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만 그의 생명을 내놓은 사실을 뒷받침했다.

 

결국 바울에게 있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살아있는 유일한 목적은 주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을 다 마치는 데 있었다.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1:20-2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