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거듭난 삶 2024. 1. 21.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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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아 사역

 

성 경: [20:6-12]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7)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8) 우리의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11)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12)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20:7]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안식 후 첫날에 - 그 주간의 첫째 날 혹은 안식일 다음 날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구절은 초대 교인들이 유대인들과 같이 처음에는 안식일에 모였지만 이제는 독립되어 주일날 예배를 드리려고 모였다는 사실에 대한 중요한 증거이며 동시에 최초의 언급으로 여겨진다.

 

(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고전 16: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 강림이 안식 후 첫날에 일어났으므로 교회가 이 날을 교회 예배일로 지킨 것은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죄의 세력과 사망의 권세가 무너지고 참된 안식과 영원 한 소망이 도래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날은 사도 시대부터 그리스도인들의 규칙적인 예배의 날이 되었다.

 

믿는 자가, 새 생명을 주사 영원한 안식의 소명을 갖게 하신 주님을 주일날에 모여서 경배함은 마땅하다.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이 날을 지킴으로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란 것이 확실하게 세상 가운데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Matthew Henry).

 

떡을 떼려 - 안식 후 첫 날에 모인 목적을 가르쳐 준다.

 

그런데 떡을 떼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단순한 식사를 의미하는 애찬(2:42;고전 10:16)을 가리킨다는 견해.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고전 10: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초기 기독교의 풍습대로 성도들이 성례전(聖禮典)의 필수적인 순서로서 가졌던 애찬겸 성찬이었다고 보는 견해(F.F. Bruce, Pulpit, Alford).

 

그런데 이것은 교회 내에서 마음대로 가져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하는 등 많은 폐단을 일으켜

 

(고전 11:20-22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후에 애찬은 없어지고 성찬만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밤중에 떡을 뗀 것은 단지 그것을 맛보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기념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Jonh Calvin)는 주장이 보다 무난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겠다.

 

한편 떡을 떼는 횟수에 대해서는 별다른 규정이 없기에 각 교회는 임의로 그 횟수를 정했으나, 성경을 통해서 나타나는 초대 교회의 주일 회집(會集)은 모일 때마다 떡을 떼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매 주일 성찬을 행하는 것이 사도들에 의해 정해진 관습임을 알 수 있다. (Mc Garvey).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 바울은 의식적으로 월요일 아침에 여행길에 오를 것을 계획했다. 이는 바울이 주일을 하나님께 구별된 날로서 중요시한 데 그 이유가 있다. (R.C.H. Lenski).

 

 

 

[20:8] 우리의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윗다락에 - 초대 교회의 집회 장소로 사용된 개인집의 다락방을 가리킨다.

 

이처럼 개인 집을 신앙 공동체의 목적을 위하여 제공한 것은 초대 교회의 두드러진 모습이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화려한 성전도 회당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불편한 장소일 망정 모이기를 힘썼다. (Matthew Henry).

 

등불을 많이 켰는데 - 밤중 집회의 필요성(必要性) 때문에 모임 전체를 환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보는 견해가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이라 하겠다.

 

 

 

[20: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창에 걸터 앉았다가 - 그보다는 방이 회중으로 꽉 차서 유두고는 청년이기에 노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창문턱에 앉았다는 것과(McGarvey)

 

등불들로 인해 혼탁해진 공기보다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걸터 앉았다는 것이 지배적인 해석이다. (Bruce).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 설교는 그리스도인의 집회(meeting)의 핵심 내용이었고 예배의 중심이었음을 여기서 알 수 있다. (Tyndale).

 

초대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믿음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모일 때마다 강론을 들었고 또한 그 가르침에 부착해서 세상과 다른 독특한 삶의 원칙들을 가지고 살아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천국의 백성임을 능력있게 증시(證示)하였다.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 점차 잠으로 빠져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계속되는 졸음의 결과로 완전히 잠에 곯아 떨어진 객관적인 상태를 진술한다.(Robertson).

 

그렇다면 거룩한 모임에,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이 강론되는 신성한 시간에 왜 이런 현상이 생겼으며 누가는 무슨 목적으로 이 사건을 기록했을까?

 

유두고는 노동자로서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하루 종일 노동으로 피곤하였는데 말씀에 관심이 있어서 졸음과 싸웠으나 결국 그것에 압도되어서 졸다가 잠에 빠져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칼빈(J. Calvin)의 경우는 말씀을 듣는 시간이 한밤중이었고 더구나 온종일 고된 일을 한 사람이 졸음과 싸우다가 잠에 빠진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졸음 때문에 죽음의 벌을 받았다고 유두고의 졸음을 질타하는데 초점을 둔 주석가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강한 이의를 제기한다.

 

이 견해에 대한 증거로 본문에서 누가는 유두고가 졸다가 잠에 빠져든 시간이 한밤중인 것을 말함으로써 이미 유두고를 이해하는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으며 더욱이 바울이 유두고를 책망한 기록이 없다는 점을 제시한다. (John Calvin, Brece, McGarvey).

 

그렇다면 이 사건의 기록 의도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떤 분으로 계시하고 있는가에 해석의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개인의 행위에 역점을 둔다면 이 사건을 통해서 말씀하시려는 성경의 메시지를 놓칠 수가 있기 때문이다.

 

 

[20: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내려가서 - '뛰어 내려가' 혹은 '달려들어'라는 뜻이다.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 여기서 '안고''완전히 껴안다', '함께 둥그렇게 붙잡다'라는 뜻으로서

 

엘리야와

(왕상 17: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엘리사의 경우를 상기시킨다.

 

(왕하 4:34-35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의 입에, 자기 눈을 그의 눈에, 자기 손을 그의 손에 대고 그의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35)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 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

 

그러나 바울의 이런 행동은 구약 예언자들을 흉내 냈다기 보다는 사고를 당한 자에 대한 깊은 연민과 긍휼의 마음의 즉각적인 표현이며 그를 소생시키기 위해 모든 심정을 다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리는 자세이다. (J. Calvin).

 

떠들지 말라 - 갑작스런 사고로 온통 동요되어 울고불고하는 회중들을 진정(鎭靜)시키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다.(Thomas Whitelaw).

 

생명이 저에게 있다 - 혹자는 이 구절에 근거하여 청년이 죽은 것이 아니라 까무라쳐 기절한 것을 바울이 현대의 인공호흡법을 써서 살려 놓은 것이라고 한다(Ramsay, Wendt, Zoeckler).

 

그러나 이는 바울이 그를 끌어 않았을 때 그의 생명이 되돌아왔음을 시사하는 표현으로서(Bruce)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가 소생될 것을 확신하는 믿음의 고백이다.

 

 

 

[20:11]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오래 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 갑자기 당한 불의의 사고로 인해서 모두들 크게 놀랐으나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의한 극적인 이적을 보고 회중은 두려움과 흥분, 놀라움 속에서 이 잊을 수 없는 밤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여기서 '이야기하고'는 바울이 혼자서 더 이상 강론하지 않고 성도들과 자유스럽게 담화했음을 뜻한다.

 

주님의 권능과 그를 믿는 신앙에 대해서 생생한 사건을 목격한 그들은 피곤을 잊은 채 철야를 한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성도의 교통이다.

 

 

 

[20:12]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

 

바울 일행이 떠난 후에 드로아의 신도들은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큰 기쁨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보여주신 놀라운 사랑의 증표(證票)를 보면서

주님이 부활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대로 자기들과 함께 하심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었다. 따라서 대단한 격려와 기쁨과 용기를 갖게 된 것이다.

 

(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