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거듭난 삶 2024. 2. 16. 00:03
728x90

바울의 항변

[벨릭스 앞에 선 바울]

 

성 경: [24:10-15]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나이다

11)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이틀밖에 못되었고

12) 저희는 내가 성전에서 아무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과 또는 성중에서 무리를 소동케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13) 이제 나를 송사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저희가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14)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15)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24:10]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나이다

 

머리로 표시하여 - '고갯짓으로 암호하다'는 뜻이다. 벨릭스는 재판장으로서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듯, 말로 하지 아니하고 고갯짓으로 바울에게 변호를 시작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이 민족의 재판장 - '이 백성의 재판장'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이 민족'이라고 표현한 것은 로마 총독 벨릭스와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다름을 시사하는 듯하다.

 

바울은 벨릭스가 '재판장'됨을 말하는데 이는 더둘로가 벨릭스의 '통치자' 됨을 집중적으로 말한 것과(3) 대조를 이룬다.

 

(3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무지하옵나이다)

 

현재의 상황은 재판정에서, 벨릭스를 총독으로보다는 재판장으로서 대하고 있는 자리이므로 바울의 인사말이 상황에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바울 역시 벨릭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게 됨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함으로써 재판장에 대한 정중한 예의를 표시하고 있으나 더둘로의 비굴한 아첨에 비해 절제되고 점잖은 인사이다.

 

 

 

[24:11]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이틀밖에 못되었고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 이 표현은 8절에서 더둘로가 자신에게 했던 말과 동일하다. 두 사람 모두 벨릭스의 증언이 확인될 수 있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증언이 서로 다르므로 한 사람은 진실을 말한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거짓을 말한 것이며 이는 구체적인 증거로써 밝혀질 것이었다.

 

예배하러 올라간 지 - 바울은 자신의 예루살렘 방문 목적이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것임을 먼저 밝히고 있다.

 

이것은 더둘로가 바울을 정치범으로 고발한 것에 대한 반대 논증인 셈이다.

 

(5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한편 1절에서는 예루살렘을 떠나 가이사랴에 온 것을 '내려와서'라고 표현했으며, 본절에서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올라간'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예루살렘을 종교적 중심지로 보는 유대적 배경에 따른 관용적 표현이다.

 

열 이틀밖에 -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머문 기간이 정치적 소요(騷擾)를 일으키기에는 상당히 짧은 기간이었음을 밝힘으로써 더둘로의 고발이 근거없는 억지임을 증거하고 있다.

 

더구나 열 이틀 가운데서도 나흘 동안 붙들려 있었다는 점과 칠일간은 성결례(聖潔禮)를 행하였음을 감안하면 그것은 더욱 명백해진다.

 

그 기간들은

 

1: 예루살렘에 도착

 

(21:17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2: 야고보를 비롯한 장로들과의 회합

 

(21:18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39: 7일간의 정결례(21:27) 및 성전에서의 누명

 

(21: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

 

10: 공회에서의 증언

 

(22:30 이튿날 천부장이 무슨 일로 유대인들이 그를 송사하는지 실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저희 앞에 세우니라),

 

11: 바울을 살해하려는 유대인들의 음모

 

(23:12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12: 가이사랴로의 이송.

 

(23:32 이튿날 마병으로 바울을 호송하게 하고 영문으로 돌아가니라).

 

 

 

[24:12] 저희는 내가 성전에서 아무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과 또는 성중에서 무리를 소동케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

 

바울의 자기변호는 매우 논리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는 더둘로의 웅변가적이고 선동적인 주장과 뚜렷이 대조된다.

 

앞절에서는 자신의 예루살렘 체류 기간이 짧았다는 것을 이야기했는데, 여기서는 더 나아가 대중들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전혀 갖지 않았음을 말함으로써 정치적 반란자로 고발된 것이 터무니없음을 밝히고 있다.

 

바울은 성전에서 사람들로 더불어 토론을 벌인 적도 없고 회당과 성안에서 사람들을 선동한 일도 없다.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천부장 루시아가 그의 보고서에 기록하지 않을리가 없을 것이다.

 

한때 소란 사태가 있긴 있었지만 그것은 바울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울을 해치려는 유대인들에 의한 선동의 결과였고

 

(21:27-28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

 

그나마 그것은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에 관한 것이었기에 바울에게는 아무런 흠잡을 일이 없었다.

 

 

 

[24:13] 이제 나를 송사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저희가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 바울의 변론은 논리적이고 치밀하였다. 그는 더둘로의 고발이 터무니없는 것임을 구체적인 증거를 들어 증명한 후 이제는 결정적으로 더둘로의 고발이 거짓임을 선언하고 있다.

 

이로써 바울은 소요죄에 대하여 무죄함을 증명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3절에 의하면 바울은 구금(拘禁) 상태에서 풀려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1) 바울에게 밝혀지지 않은 죄상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거나, 혹은

(2) 바울이 공적(公的)으로 위험한 일을 벌일 수 있는 인물이라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혹시라도 반란의 가능성이 보이면 그를 철저히 조사하는 것이 로마 행정관의 임무였던 것이다.(Howard Marshall).

 

 

 

[24:14]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 바울은 앞의 정치적인 문제에 이어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 변론하기 시작한다.

 

먼저 바울은 더둘로가 '이단'이라고 규정한 것을 ''라고 정정하고 있으며 유대교와 이 ''()가 동일한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러한 연속성에 대한 강조는 이 ''가 유대교와 동일하게 로마법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은근히 시사한다.

 

그리고 더둘로가 '나사렛 이단'이라고 표현할 때 정치적 집단이라는 뉘앙스로 받아들이도록 사용한 것에 대해

 

(5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결코 반로마적인 정치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인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24:15]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 - 여기서는 하나님께 향한 소망과 부활이 동일시되고 있고 그것은 곧 유대인들의 신앙과 동일시 된다.

 

물론 이 자리에는 사두개인들이 대부분이었고 이들은 부활을 부정 했지만 전통적 유대교 신앙과 기독교의 관계성을 논의하는 이 자리에서 사두개인의 신앙을 표준으로 놓고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사두개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부활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은 성경적 근거를 가진 것이다.

 

(22:23-3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 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26)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28)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31)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33)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한편 바울이 부활을 언급함에 있어서 의인과 악인의 동시적 부활을 언급함에 있어서 의인과 악인의 동시적 부활을 말한 것이 여기가 유일한 곳이라는 점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학자가 있다.

 

즉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만이 구원을 이야기하는 바울의 부활 사상을 누가가 잘못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Gardner).

 

그러나 예수께서도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말씀하신 바 있고

 

(5:28-29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바울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부활과 다른 부활을 이야기했다고 볼 수 없으며, 바울이 주로 의인의 부활에 대해 언급한 것들이(고전 15:12-58;살전 4:13-5:11) 곧 영원한 심판으로 이어지는 악인의 부활을 배제한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의 서신들은 기존의 그리스도교인들을 향한 목회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자연히 악인에 대한 관심보다는 의인의 부활에 대한 관심이 집중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