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거듭난 삶 2024. 2. 17.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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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항변 2

[벨릭스 앞에 선 바울]

 

 

성 경: [24:16-21]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17)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18)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저희가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19) 저희가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송사하였을 것이요

20)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21) 오직 내가 저희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24:16]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

 

'이것'이란 앞 절의 부활, 즉 의인과 악인이 부활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되는 것을 뜻한다.

 

'거리낌이 없기를'이는 '()함이 없는'(Page) 또는 '에 넘어지지 않는'의 의미이다.

 

'힘쓰노라''부단히 연습하고 노력한다'는 뜻으로 바울은 늘 이렇게 살려고 애썼다.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본문은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기본적인 의무를 반영하고 있으며

 

(3:4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18:2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로 율법을 요약하신 예수의 말씀과 결부된다.

 

여기서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가 강조되어야 한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비롯한 당시의 종교인들은 사람 앞에서의 의를 위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의 의를 상실하거나, 하나님 앞에서의 의를 위하여 사람 앞에서의 의를 무시해 버리는 형태를 보였었다.

 

(20:46-47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7)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동시적(同時的)으로 의롭게 행하려고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는 바울의 겸손이 드러나고 있는데, 그는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쓴다고 말할 뿐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고 단언하지 않았다. 이는 허위적 자신감에 가득 찬 더둘로의 태도와는 전혀 대조적이다.

 

 

 

[24:17]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 '여러 해 만에'는 그의 제2차 전도 여행 끝에 예루살렘을 잠시 방문한 것(18:22)을 기점으로 계산하면 4-5년의 기간이 된다. 바울이 민족의 구제를 위해서 무엇을 했다는 언급은 누가의 기록에는 여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러나 바울 서신들에는 구제 헌금에 대한 기록이 여러 군데 있다.

 

(15:25-26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2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고전 16:1-4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3)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4)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

 

2: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그런데 바울이 구제금에 대한 언급을 할 때 그것이 민족을 위한 것이었다고 진술한 것은 역사적 사실성을 넘어서는 누가의 확대 해석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Haenchen).

 

왜냐하면 본래 바울의 구제금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함이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하고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을 염려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유대 민족을 도외시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늘 자기 민족이 복음을 받아 구원을 받을 수 있기를 원했다.

 

(11:13-14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예루살렘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가 구제금의 힘을 입어 더욱 열심으로 유대인들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결국은 유대 민족을 위해 유익하다고 볼 때, 바울의 구제금이 직접적으로는 유대 기독교 공동체의 가난한 자들을 돕고 그들과의 사랑의 연대성을 굳건히 하는 것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전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것이었다.

 

한편 '제물'에 대한 언급은 네 명의 서원자(誓願者)를 위하여 바친 제물을 바울의 방문 목적에 소급하여 적용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21:23-24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24)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로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26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의 만기 된 것을 고하니라).

 

왜냐하면 바울이 예루살렘에 오기 전에 제물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었고 또 예루살렘에서 서원자들을 위해 제물을 바칠 것을 예견했다고 보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목적 중에는 오순절 예배에 참여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고

 

(20:16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치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행선하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또 그는 늘 율법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으므로

 

(14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전례대로 당연히 제물을 드리려 했을 수도 있다.

 

 

 

[24:18]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저희가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결례를 행하였고 - 21:26-28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압축한 내용이다.

 

바울은 네 사람의 서원자와 함께 있었을 뿐, 그밖의 사람들과의 모임은 물론 소동은 더더욱 없었다. 이를 목격한 증인도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시아에서 올라온 몇몇의 유대인들에 의해 발생했다.

 

사실 바울이 성전에서 결례를 행했던 사실은 성전 관계자들로부터 쉽게 확인될 수 있었으며, 이와같은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 자가 성전을 모독했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은 명백하다 하겠다.

 

 

 

[24:19] 저희가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송사하였을 것이요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 성전에서 바울을 해치려 했던 유대인들(21:27, 28)이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면

 

(21:27-28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

 

당연히 그들은 지금 이 재판정에 나와 증언을 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이 자리에 나와 있지 않다.

 

이는 그들이 아무런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말해주며 바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시사한다. 아시아에서 올라온 유대인들은 허위의 사실로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여론 재판식으로 바울을 죽이려 하였으나 그것이 실패하자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을 것이다.

 

 

 

[24:20]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

 

바울은 더둘로의 고발에 대해 조목조목 반격을 가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문제의 소지가 있는 마지막 사건에 대해서 자기의 결백을 객관적으로 증거한다.

 

공회에 섰을 때 바울이 취한 행동 가운데 조금이라도 죄를 정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면 아나니아 일행이 증언했을 것이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2:30 이튿날 천부장이 무슨 일로 유대인들이 그를 송사하는지 실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저희 앞에 세우니라)

 

결국 아나니아 일행이 바울에 대하여 고발한 모든것은 모두 거짓임이 드러났으며 바울에 대한 고소는 무효화된 것이나 다름없다.

 

 

 

[24:21] 오직 내가 저희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 바울은 자신의 공회에서 했던 유일한 발언이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것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23:6 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바울의 주장은 로마 법정에서도 산헤드린 법정에서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로마 법정에서는 그것이 종교적인 신앙의 문제이기 때문에 소송의 건()이 될 수 없었으며 산헤드린에서는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신앙이 유대교의 정통적 신앙과 일치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