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거듭난 삶 2024. 3. 18.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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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시험 3

 

누가복음 41-13: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10)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이른바 광야(황야)의 시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임한 시험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에 보통 사람에게 임한 시험이 없었다.

악마는 예수의 이욕에 호소하여 그를 시험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도 무익한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악마는 또 예수의 정욕에 호소하지 않았다. 이는 특히 주의를 요하는 일이다.

 

대개의 사람의 경유에 있어서 시험이라고 하면 정욕의 시험을 말한다.

석가모니(2282역주)의 경우에 있어서 마저, 시험은 이 형태를 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악마는 미인의 모습을 취해 성자에게 나타났다는 것은,

한결같이 명승 성인전이 기록하고 있는 바이다.

 

그런데 예수의 경우에 있어서는 이 시험이 없었다.

그는 이 시험으로서 시험되기에는 너무 거룩하셨다.

 

밀튼(1120역주)낙원의 회복, 마계의 왕 사탄이, 예수 유혹의 방법에 대하여,

마족의 의견을 물은 때, 색마 벨리알은 조언을 제출하여 말했다.

 

그의 눈에 부인을 보이시라, 그의 가는 곳에 부인을 있게 하시라.

사람의 자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인을 구하여, 이것을 그 앞에 두시라.

 

그런데 사탄은 예수의 경우에 있어서 이 방법이 전연 무효로 끝날 것을 말했다.

예수의 목적은 너무 높고, 그의 눈은 너무 거룩하여,

그는 도저히 정욕의 유혹으로서 가까이 할 수 없음을 말했다.

그리고 사탄으로 하여금 이 진술을 하게 한 밀튼은 잘 주 예수의 마음을 안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프랑스의 르낭(910역주)이 그 소설적 예수전에 있어서,

예수로 하여금 나사렛의 남겨둔 그의 연인을 생각게 한 일단은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잘 저자 자신의 심리상태를 폭로하고, 신앙의 일에 있어서,

프랑스 문호는 도저히 영국 시인에 미치지 못함을 보이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예수에게 저열 야비한 정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높은 귀한 정은 있었다.

 

그는 부인중에 애인을 가지지 않았으나, 그에게는 부인 이상의 애인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하나님께 택함 받는 여자들이었다.

그는 그들을 생각하는 일 뜨거워, 그들에게 끌리고, 그들의 구원위해 움직여졌다.

 

어떻게 하여 그들을 구원할까? 그 수단 방법을 어떻게?

이 문제를 마음에 간직하고서 그는 광야로 갔던 것이다.

 

그리고 누가복음의 예수의 광야의 시험에 관한 기사는 이 방면에서 본 기사라고 생각한다.

 

예수의 마음을 점령한 것은 두 가지였다.

그 첫째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었다.

그 둘째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리고 들(황야)의 시험을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시험으로 본 것이 마태복음이 보는 태도(견해)이다.

사람, 특히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사랑의 시험으로 본 것이 누가복음의 견해라고 생각한다.

 

물론 동일한 시험이 동일시에 예수의 사랑의 양방면에 호소한 것인데,

양복음의 저자는 각자 자기에게 가장 강하게 호소(appeal)된 방면을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는 굶주리셨다.

그리고 굶주리심과 동시에 느끼신 것은 기아의 고통과 식물의 요구였다.

악마는 그때 예수의 마음속에 속삭여 말했으리라.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으로, 돌로 빵이 되게, 먼저 당신 자신의 굶주림을 고치고,

그런 후에 전체 당신의 백성을 기르는 것이 어떨지?

 

인생 최대의 문제는 식물(食物) 문제이다.

먼저 백성을 기르지 못하고서 무슨 일도 안 된다.

보라, 세상에 기아로 고생하는 백성이 얼마나 많은가를.

굶주린 백성에게 양정을 실시할 수 없다.

굶주린 백성은 복음을 듣기 위한 귀를 갖지 못한다.

식물에 풍부하지 못하고서 순량 고덕의 백성 없다.

 

그러므로 당신,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제 뜻을 결하여 식물의 공급자로 되시라.

이는 가장 실제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세상의 구주 되는 일이다라고.

 

그리고 그러한 유혹은 애정 예민하셨던 예수를 강하게 움직였음에 틀림이 없다.

공중의 새가 부양되는 것을 보고 기뻐하신 그는,

인자가 식물이 부족하여 고생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괴로워 하셨으랴!

하지만 그의 깊은 사랑은 얕은 사랑에 이기셨다.

그는 성서의 말씀을 생각하셨다.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자 아니다라고.

 

빵은 확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자가 아니다.

빵 이외에 더 많은 필요물이 있다. 정치도 필요하다. 사상도 필요하다.

특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가장 필요하다.

사람 각자 천직 있다. 식물을 백성에게 급여하는 업은 이것을 타인에게 양보하련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 아버지를 사람에게 보여주며,

그의 의와 사랑을 세상에 전하고, 영원히 사는데 필요한 생명의 빵이 되어 끝마치련다.

예수는 대략 이같이 말씀하시어, 악마의 이 유혹을 격퇴한 것이리라.

 

여기서 악마는 둘째의 구세(救世) 수단을 예수께 제언했던 것이다.

즉 대정치가로 되어 세상을 구하라는 것이다.

 

정치 반드시 나쁜 일이 아니다. 세상에 신성한 정치 없는 것 아니다.

다윗왕 자신이 대 군인으로서 동시에 대 정치가였다.

 

예수는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다윗이라 부르신

그의 위대한 조상 다윗을 본받아, 왕이 되시지 않는가?

 

세상을 구원함의 첩경(지름길)은 왕 되는데 있다.

전에는 페르샤왕 고레스(757역주), 바벨론을 멸하고 세계에 왕 되어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고, 좋은 평화를 넓은 국토에 베풀었다.

 

예수는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예언자로서

그는 내 목자, 전체 내가 기뻐하는 바를 성취할 자이라’(이사야 44:28)고 하신 고레스왕 따라,

보다 크신 고레스가 되어 만민을 구원하지 않으시는가?

 

세상의 소위 정치가의 야심을 떠나서,

하나님의 정사를 세상에 실시하여 백성을 구원하려는 마음,

때로 예수에게 일어났음은, 의심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정치는 정치인 것으로서 이 세상의 일이다.

따라서 문자대로 부복하여 악마를 섬기는 데는 미치지 않는다 해도,

그를 이용하는 것은 면할 수 없는 바다.

 

가장 신성한 정치가라도, 이 의미에 있어서 어떤 종류의 죄를 범치 않고서,

공을 이루고 이름을 올린 예는 없다.

 

가령 또 완전한 정치를 행할 수 있대도, 정치는 백성을 그 외부에 있어서 구하는데 그치고,

그 내심을 거룩하게 하지는 못한다.

 

마음에 노예의 백성 된 자는, 가령 정치적으로 자유라도 아직 의연히 본래의 노예 백성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악마와 아무런 관계없는 길에 의해

사람의 심령 내의 영혼의 깊은 곳에 복지와 자유를 주어야 할 것이다.

 

예수는 인류의 영혼의 왕 되시기 위해,

여기서 또 세계의 왕 되라는 악마의 속삭임을 거부하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영혼의 왕 됨의 그 길은 무언가는, 다음에 일어나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 길에 대하여, 또 악마는 예수께 제시하는 바가 있었다.

그를 예루살렘에 데리고 가서, 성전꼭대기에 세우고 말하기를 이라고 있음은,

악마가 예수께 제시한 전도법을 기록한 말이다.

즉 문중(門衆) 주시(注視)리에 특히 제사장, 장로, 백성의 학자들 앞에서 기적을 행하여,

그들을 놀라게 하고, 그들의 심지를 빼앗아 그들로 하여금 그에게 엎드려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게 하고, 그런 후에 그들에게 도를 말하는 것,

이는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가장 유력하고 확실한 길이라고,

악마는 예수께 가르쳤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또한 이 길을 물리치셨다. 이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길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하나님을 괴롭히는 일인 것이다.

신명기 616절에

너는, 맛사에서 시험한 것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마라고 있는

그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다.

 

, 군중의 기적을 하나님께 강요하여 그의 마음을 괴롭히지 말라시는 훈계이시다.

예수는 여기서 전도용으로서 기적을 단연 배척하신 것이다.

 

세상을 구원함의 수단 방법으로서, 악마는 예수에게,

첫째로 자선,

둘째로 정치,

셋째로 기적을 권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거절되어, 이 이상 그에게 쓸 수단이 없어졌다.

 

여기서 악마, 이 모든 시험을 끝내고, 잠시 동안 그를 떠났다’(4:13)고 있다.

옳다, ‘영구히가 아니다. ‘잠시이다.

후에는 또 베드로로써, 가룟의 유다로써,

최후에는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그를 시험했다.

 

그러나 예수는 최후까지 이기셨다.

예수는 약한 인류를 구원하심에 있어서 그 약점을 이용하지 않으셨다.

도리어 사람의 강처에 호소하여, 그들로 하여금 강하게 하셨다.

예수야말로 진정한 세상의 구주이시다.

 

자선에 의하지 않고, 정략을 쓰지 않고, 기적으로서 하지 않고서,

예수는 무엇에 의해 세상을 구원하려 하셨는가?

단순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이다.

그리고 이것을 증명하는데 자기의 생명으로서 이다.

실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은 작고, 그 길은 좁다이다.

 

악마의 권함을 모두 거절하고, 예수에게 남은 것은 다만 한 길이었다.

즉 십자가의 길이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이에 인() 치는데 자기 피로써 이다.

 

이것 이외에 그가 취할 구세의 길은 없었다.

위대한 예수여.

 

*내촌감삼의 길릴리의 길을 연재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