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거듭난 삶 2024. 3. 19. 00:04
728x90

전도의 개시

 

마가복음 114-15: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참조 : (마태복음 412-7절 누가복음 323, 16-31)

 

요한이 잡힌 후, 예수, 갈릴리에 이르러,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여 말씀하시기를,

때는 찼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웠다.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이것을 전파하는 방법은 어떻게 할 것인지를 확실히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란,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자녀로서의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다.

 

이것을 말로서 나타낸 것이 복음이다.

이것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 전도이다.

 

복음은 간단, 이것을 전하는 길도 또한 간단, 대 진리는 모두 간단하다.

진리 중의 최대 진리인 예수의 복음은 아주 간단하다.

 

다만 이것을 믿고, 이것을 행하며, 이것을 남에게 전하는데 강한 결심이 필요할 뿐이다.

 

사상이 간단해지기까지는 활동은 시작되지 않는다.

이점에 있어서, -(7229역주), 아인슈타인(Einstein, Albert 1879. 3. 14-1955. 4. 18 독일출생의 아메리카의 이론 물리학자), 루터도, 칸트(7141역주)도 모두 한가지이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은 내 아버지, 나는 내 생명을 걸고 이 관계를 유지할 것이다라는

간단하기 그지없는 사상에 달하여 이제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누가복음의 기사에 따르면,

때에 예수 나이 약 30으로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고 있다.

 

사람의 30세는 그의 자각의 시기이다. 육체가 그 발달을 이루는 것도 이때,

의기가 그 왕성을 다하는 것도 또한 이때이다.

 

하나님의 아들도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이 취하는 상도에 따르셨다.

세상에는 30세 이하에 대사를 이룩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알렉산드로스(11122역주)22세에 구아(歐亞) 정복의 길에 올랐다.

윌리엄 피트24세로 영()제국의 총리대신이 되었다. 하지만 이는 모두 예외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나이 30세에 달하기까지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으셨다.

 

지금 때라고 스스로 정하여, 신심(信心) 모두 숙성하지 않았는데

사회교화의 길에 나서는 자는, 예수께 배우는 바 있어야 한다.

빨라도 30, 40세에 달해도 늦지 않다.

 

하나님의 명을 기다려 일어서라, 준비는 충분함을 요한다.

 

복음의 진수를 해득하고, 악마를 먼저 자기 마음 안에서 정복하고,

그런 후, 구세의 길에 오르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취하신 길은 우리들이 취해야 할 길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미국인의 권면에 따라 왕의 일이 급하다, 삼상 218절에 있어서의,

 

(삼상 218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여기 당신의 수중에 창이나 칼이 없나이까

왕의 일이 급하므로 내가 내 칼과 무기를 가지지 못하였나이다 하니)

 

사람인 왕에 대하여 한 말을 이끌어 다가 이것을 하나님이신 왕에 응용하여,

그가 부르시지 않는데, 그의 일에 나서서는 안 된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는 갈릴리에서 전도를 시작하셨다고 한다. 이것은, 예수가 요한의 예를 겁내어,

유대를 피하여 갈릴리로 물러간 것이라고 해석하는 주해자가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의 갈릴리 전도는 그의 주의에 의한 것이다.

요한의 투옥은 예수의 전도개시를 촉구한 것으로서, 그 방침을 변케 한 것 아니다.

요한은 갈릴리의 분봉왕 헤롯의 잡는 바로 되어 그가 예수의 소재자,

그 선구자로서의 천직을 끝마친 것이다.

 

그리고 복음 전파는 중절을 허락하지 않는다.

선진 쓰러져 후진 이에 대신한 것이다. 요한 잡혀 예수 일어서신 것이다.

 

복음 전파는 용자가 종사해야 할 사업이다.

함부로 시세에 비추어 보며, 위험은 할 수 있는 대로 이를 피하고,

물이 낮은 데로 처하듯 가능한 한 저항 없는 길을 취한다.

 

이는 근대 전도사가 하는 바라 할 수 있으나, 주 예수께서 하신 바는 아니다.

 

영국인의 아프리카전도에 한 사람의

해닝턴(Hannington, James 1847. 9. 3. -1885. 10. 29. 영국의 아프리카 Uganda 선교사) 쓰러져 수인 외 그를 대신하는 사람이 있었음 같은 것이,

참된 그리스도교 전도이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 갈릴리에 이르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다고 있다.

 

내가 쓰러진 후, 나를 대신하여 설 자는 누구랴?

 

예수는 전도를 갈릴리에 있어서 시작하셨다. 예루살렘에 있어서 시작하지 않았다.

그의 능력을 가지고서, 곧 효과 가장 많은 중앙전도를 개시 못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이는 그의 택하신 길이 아니었다.

 

그는 시골 전도로서 시작하셨다. 갈릴리에서 시작하셨다.

더구나 그 수부(首部)인 디베랴에 있어서가 아니라,

소도시인 가버나움에 있어서 시작하셨다.

그리고 이것이 참된 순서이다.

 

속담에 이르기를 하나님은 시골(농촌)을 만들고 악마는 도시를 만든다.

 

우리들 농촌 전도의 경험을 가진 자는 모두 안다.

가장 확실한 신앙은 농촌에서 일어나고 도시에 일어나지 않았음을,

예수의 세계 교화가,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랴고 한 그 갈릴리에서 시작된 것을 알아,

우리들도 또한 중앙전도라고 하여 많은 것을 여기에서 바라며,

과대한 무게를 이에 두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예수의 전도는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의 전도(선도)로써 시작하셨다.

 

기적으로써 시작하지 않았다.

복음의 요부는 말씀이다. 기적은 그 부수(attendant)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는 그 전도에 있어서 결코 기적을 중요시하지 않으셨다.

 

그는 악마의 유혹에 따라 먼저 기적을 행하여 사람의 주의를 끌고,

후에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지 않으셨다.

때는 찼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웠다.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것이 예수의 전도의 진수(the essence)이다.

 

회개하여 복음을 믿으라’.

하나님께 대하여 반역의 죄를 계속해 온 태도를 고치라,

하늘 아버지는 너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는 말씀을 믿으라고.

이것이 복음의 진수이다.

 

때는 찼다’.

인류가 세상에 출현하여서 부터 오랜 시간이 있었다.

 

인류학자는 말한다.

아마도 지금부터 20만 년 전이었으리라고.

구석기시대에 이미 하나님을 찾는 징후(sign)가 나타났다.

이집트, 그리스, 바벨론 등 긴 시대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가운데 있어서, 하나님은 옛날 많은 구별을 하시고,

많은 방법으로서, 예언자들에 의해, 선조들에게 고하셨는데,

마침내 말일에 있어서, 그 아들에 의해 말씀하셨다.

 

(히브리서 1:1-2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인류 발달의 극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아들 됨을 자각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자각이 가장 선명하게 예수에 있어서 나타났다.

 

시인 괴테(Goethe 1749-1832. 독일의 시인, 작가. 고전파의 대표자)가 말한 대로

인류의 발달은 어떠한 정도에 달한대도,

그 도덕적 우수점에 있어서 예수 이상으로 달할 수는 없다.

 

예수가 복음을 가지고 오셔서 갈릴리 호반에서 전도를 개시하신 때,

인류의 도달해야 할 최고령(最高嶺)은 보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지상에 임한 것이다.

 

(사실)은 후에 이르러 분명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웠다’.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가지는 마음,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예수께 이 마음이 있었다.

악마는 예수의 이 마음을 움직이고자 하다가, 도리어 그의 확신을 굳세게 만들었다.

 

죽는대도 아버지의 명을 따를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을 시험하려 기적을 할 것 아니다.

악마의 길은 일체 취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심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예수의 마음에 임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 있어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운 것은 아니다. 이미 임한 것이다.

그는 자기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서 세상에 임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안에 있었다.

 

그리고 예수로써 세상에 임박해 있었다. 후에 그가

 

하나님의 나라는 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보라, 저기에 보라고 할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누가복음 17:20-21)고 하신 것은 이것을 말하신 것이다.

 

너희들의 안이란, ‘마음 안이라는 것은 아니다.

너희들 사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로써 바리새인들의 사이에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회개하여, 즉 마음을 바꾸어, 그의 말씀을 믿으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에게도 또 임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우리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 있는 것이다.

지금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 있는 것이다.

지금 하나님의 나라는 육체로 되어 나타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들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서로서 우리들의 손안에 있다.

 

그 안에 하나님의 나라는 명시되어 있다.

취하여 자기 것으로 할 수가 있다.

 

예수의 광야의 시험은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족하지 못하다.

시험은 악마에 대한 시험인 것으로서 주로서 하나님 나라의 소극적 방면을 보여주었다.

이제부터 후에 우리들은 그 적극적 방면을 엿 볼 수 있으리라.

그러나 어느 방면에서 본대도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를 떠나서는 없다.

 

예수, 즉 하나님의 나라이다.

 

회개는 신약 성서중의 깊은 말씀이다.

 

그저 죄를 뉘우쳐 이것을 고치는 것 아니다.

원어의 <메타노이아 metanoia>는 심의 일변의 의미이다.

인생관의 일변이라 해하여 틀림이 없으리라.

예수의 아버지이신 참 하나님을 모르고선, 인생관 전부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바꾸어 복음을 믿으라고 하는 것은,

복음을 믿고 마음을 바꾸라는 것과 한가지이다.

 

예수는 만물의 보는 방식을 일변시키라고 가르치셨다.

그는 다만 마음(heart)을 새롭게 하라고만 가르치시지 않으셨다.

만물의 보는 태도(생각, 견해) 즉 뜻(mind)을 바꾸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있어서,

소위 회개는 단지 정의 일이 아니라, 또 지식의 일임을 알 수 있다.

 

회개는 만물을 보는 심안의 일신이다.

 

복음을 믿으라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신 그 말씀을 믿으라.

하나님께서 만물을 보시는 그 보는 방식으로서 보라.

하나님과 심의를 함께 하는 자로 되라.

 

*내촌감삼의 길릴리의 길을 연재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