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거듭난 삶 2024. 3. 20. 00:04
728x90

제자의 선택

 

마가복음 116-20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참조 : (마태복음 418-22, 참조 누가복음 5:1-11절 요한복음135-51)

 

하나님의 나라는 선언되어 바야흐로 건설되려 한다.

예수는 그 보유자시며, 또 건설자였다.

 

그리고 이 경우에 있어서, 나라의 건설자가 그 왕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신하의 원조에 의해서가 아니라, 왕 한 분으로서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처음부터 공화국이 아니라 왕국이다.

이 건설도 유지도, 완성도, 왕 한 분의 능력에 의한다.

 

프랑스국의 대왕 루이14세는 나의 곧() 국가’(L` Etat, C`est moi- 역자)라고 했는데,

이 말은 그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다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한 사람만에 적용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 곧 예수이시다. 이것이 해득되지 못하면, 그리스도교는 해득되지 못한다.

 

왕은 그 신하를 택하여 이것을 부르셨다.

그리고 제1로 그 선택을 입은 것이, 이대(두짝)의 형제였다.

 

1(한짝)는 시몬(베드로)과 그 형제(아마도 형) 안드레,

2대는 야고보와 그 형제(아마도 동생) 요한이었다.

 

예수는 다만 그들에게 명하여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라.

 

그리고 그 소리에 응하여, ‘그들은, 곧 이에 따라갔다고 있다.

 

여기에 다만 명령에 대한 복종이 있었던 것이다.

주권자와 시민과의 사이에 협약이 성립된 것은 아니다.

또는 제자가 스승의 문에 들어가 사제의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다.

 

왕이 그 지상권으로서 신하를 부르시고, 신하는 그 복역에 임한 것이다.

 

이같이 하여, 예수는 나라의 왕으로써 무류의 왕이시다.

사람의 스승으로서 무류의 스승이시다.

예수는 단지 우리들의 지배인이 아니시다. 또 선생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수고자 그리스도이다.

 

그를 사람으로서 보는 때는, 그는 최대의 압제가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만 볼 때, 그의 지대한 권능을 승인 할 수가 있다.

 

그리고 크리스천은 모두 이 권능으로써 그리스도에게 택함 받고 또 부르심을 받은 자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한 것이다’(15:16)라고

 

그가 말씀하신 그 말씀은 신자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에게 택함 받고, 누구도 사퇴할 수는 없다.

마치 천황폐하의 소집을 받고 일본신민 누구나 이것을 거부할 수가 없는 것과 한가지다.

 

그리고 예수께 부르심을 입는 것은 최대의 명예 또는 행복이다.

그에게 부르심을 입어, 갈릴리 호수의 어부는 인류의 교사, 세계의 개조자로 되었다.

 

하지만 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께 부르심을 입는 것은, 가난에 거하며, 수치를 참고, 악전고투 중에 일생을 보내는 것이라고만 그들은 생각한다.

그들은 예수의 신하 됨의 환고(患苦)만 보고 그 영광을 모르는 것이다.

 

예수에게 부르심을 받을 것이다.

우리들도 가업을 버리고, 옳다, 일본신민이 폐하의 소집에 접하여, 집을 버리고 국가의 위난 위해 나서듯 우리들도 모두를 버리고 예수의 성소에 응해야 할 것이다.

 

예수는 어떠한 계급에서 그 제자를 택하셨던가.

이스라엘의 스승은 이른바 유망한 학생 중에서 그 제자를 택했다.

가말리엘의 문하에 다소의 사울이 있었던 것 등이 그 일례이다.

 

일본이 귀족국이듯이, 이스라엘은 제사장국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스승인 분은, 그 제자를 제사장 계급 또는 이에 종속하는 자 중에서 택함을 상례로 했다.

 

하지만 예수는 전혀 그 가르침을 달리했다.

그러므로 전혀 다른 계급에서 그 제자를 택하셨다.

그는 후에 가르쳐 말씀하셨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사람은 없다. 만약 그리하면 새 포도주는 그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새어나와 가죽 부대도 또한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가복음 2:22).

 

예수의 가르치심, 즉 복음은 새 포도주이므로

이것은 낡은 가죽 부대인 제사장, 바리새인, 백성의 학자들에게 주입할 것이 아니다.

 

만약, 그리하면, 복음은 그 부대를 터뜨리고, 복음은 없어지며, 이것을 받은 사람들도 또한 멸망하리라.

 

복음은 복음에 상당하는 그릇에 넣어야 한다.

그리고 그 그릇은 이른바 종교가가 아니다. 신학자 성서학자라는 등의 유가 아니라, 어부로서 대표되는 노동의 자녀들임은 최초의 제자 선택에 관한 기사가 명시하는 교훈이다.

 

예수는 그 제자를 택함에 있어서 이것을 박사, 학사, 글을 읽는 것으로서 최고의 업이라고 생각한 사람들 사이에서 찾지 않으시고, 이것을 갈릴리 호반에서 어업에 종사한 어부 사이에서 구하셨다는 것이다.

 

예수가 권한 그리스도교가 무엇인지, 그가 만든 그리스도교 신자가 어떠한 것인지는,

이 한 가지에 의해서 보아 일목요연하다.

 

진리는 눈을 통하여서 보다는 손을 통하여서 들어가기 쉽다는 것은, 프뢰벨 유치원 교육의 원리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는 대소할 것 없이, 모두 가장 잘 손을 통하여 배운다.

독서는 진리를 아는 길로서 결코 최상의 것은 아니다.

진리는 가장 잘 손을 통하여 손으로써 일하여, 손으로써 하나님의 천연에 접촉하여, 알 수가 있다. 이는 노동에 교육상 최대의 가치 있는 이유이다.

특히 복음의 진리에 있어서 그러하다 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만은 글을 읽는 것만으로는 깨닫지 못한다.

신학교는 결코 최상의 신학교는 아니다.

 

최상의 신학교는 전원이다. 어장이다. 하나님의 지도하에 일하는 공장이다.

 

하나님은 일하여 알 수가 있다. 읽고, 생각하며, 의논하여, 깨닫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그 최초의 제자를 노동자 내에서 택하셨다. 그는 프뢰벨 이상의 교육가이셨다.

 

그러므로 그의 복음을 주로 노동자에게 맡기셨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어느 방면에서 보아도 신학자, 성서학자, 언어학자들이 해득할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니다. 실로 그리스도교를 가장 심히 오해하는 자는 이러한 사람들이다.

 

예수의 최초의 제자는 노동자였다.

하지만 그들은 오늘 이른바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e), 즉 무산계급의 사람은 아니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에게 부르신바 되어,

 

그 아버지 세배대와 삯군들을 배에 남겨두고, 그에게 따라 갔다고 있다.

 

삯군을 사용하고 배를 소유할 수 있었던 그들은 결코 그저 노동자는 아니었다.

시몬도 또 안드레와 함께 일가를 이루어 산 사람으로서, 그들도 또한 오늘날 세상에서 일컫는 노동자는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중류 독립의 사람이었다.

부하지 않고, 가난하지 않으며, 자기의 정직한 노동에 의해 존경할 만한 생애를 보내는 자였다.

 

그리고 예수 자신이 이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고, 그는 또 그 제자를 이 계급에서 택한 사람이다.

 

그리스도교는 그 처음부터 특히 중류계급의 종교였다.

이는 오늘에 이르러서도 한편으로는 귀족, 부호에게 용납되지 않고, 다른 한 편에 있어서는 과격파, 사회주의자에게 배척되는 이유이다.

 

예수는 어부인 시몬과 안드레를 보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나도 청년 시대에는 북해의 어부였다.

수산(水産)을 일으켜 내 나라 부강의 기초를 쌓으려는 것은 나의 청년 시대의 이상이었다.

그런데 나도 베드로와 한가지로 예수에게 발견되어 그 부르신 바로 되었다.

 

그는 내게도 일러 말씀하셨다.

 

너는 그물과 배를 버리고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러나 나는 베드로 처럼 곧 그를 따를 수 없었다. 나는 예수의 음성을 나 자신의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오랜동안 그의 명을 거슬리고 무엇을 해도 사람을 낚는 자로 되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의 명은 도저히 거부하기 어려웠다.

 

예수는 드디어 나를 그가 생각하시는 대로 만드셨다.

그리고 오늘 여기서, 그가 갈릴리 호반 가버나움성에서 전하신 기쁨의 소식을 나의 국인에게 전하는 자로 되었다.

 

아버지여, 옳소이다. 그렇게 하심은 뜻에 합당하니이다’(11:26)이다.

 

그렇지만

 

사람을 낚는 자로 되었다 해도 나는 교회의 목사, 전도사로는 되지 못했다.

 

나의 경우에 있어서

 

사람을 낚는다는 것은 신자를 만들어 이것을 교회에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낚는다는 것은, 그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사람에게 예수의 말씀을 전하고, 그를 충실한 신하 또는 제자로 하는 일이다.

 

나는 이 사업에 부르신 바 된 것을 최상의 기쁨 또는 최상의 명예라고 믿는다.

 

그리고 사람을 낚는 자로 되었다 해도, 나는 오늘에 이르러서도 물고기와 이것을 잡는 업을 잊지 않는다.

 

물고기 하면, 나의 흥미를 분기시킴을 느낀다.

갈릴리 호수에 22종의 물고기가 번식하여 그중 7종이 크로미스(Chromis 점자동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 속이고, 아프리카, 나일계에 속하는 하호에 출산되는 어류인 것을 알 때, 남이 알지 못하는 흥미를 느낀다.

 

마태복음 1347, 48절에 물고기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어,

 

(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그 좋은 것은 이상의 크로미소소(몸은 길이 18cm 가량)이고,

나쁜 것은 우리나라의 메기(catfish)의 유로서

그 길이, 때로는 5(150cm)에 달하는 것이 있다고 듣고서,

 

자신이 베드로, 요한과 함께 그물을 호수에 치는 것 같이 느낀다.

 

나는 그들과 한가지로 회당이나 신학교에 있어서가 아니라, 바닷가에 있어서 예수께 부르심을 받은 것을 최대의 명예 또는 행복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나만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부르신 가장 좋은 신자는 바다나 밭에서 하나님을 안 사람이다.

학교 특히 신학교는 나에게 인연 먼 곳이다.

 

*내촌감삼의 길릴리의 길을 연재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