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거듭난 삶 2024. 4. 4. 00:05
728x90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

 

마태복음 619-34: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참조 : (누가복음 1213-34, 19-21)

 

이 세상에 절대적 안전은 없다.

 

금고(金庫) 제조술은 아무리 진보해도, 이것을 파괴하는 술()도 또한 동시에 진보했다.

아세틸렌 가스(카아바이드에 물을 부어 나오는 가스)를 사용하여 강철을 자르는 일은,

나이프로서 납(wax)을 자르는 것만큼 용이하다.

은행제도는 아무리 완비되어도, 은행파탄은 결코 드문 일 아니다.

 

특히 독노의 경우처럼 국가 그것이 파산하는 경우에는, 축재는 국가와 함께 소멸한다.

 

이 세상 그것이 매우 위험한 것이다.

이에 내 생명 재산을 맡길 때, 나는 불안하지 않으려 해도 부득하다.

 

하지만 사물은 옮겨지고 세상은 변한대도 동요하지 않는 것은 천국(그 나라)이다.

 

우리들은 절대적으로 안전한 천국에 내 재화를 쌓음으로서만 절대적으로 안전할 수가 있다.

 

죽음은 가깝다.

이와사끼(후세최대유물 36역주)도 야스다(6325역주),

그 쌓은 거만의 부를 남기고, 자신은 일전도 가져가지 못하고서 이 세상을 떠나갔다.

 

그러므로 예수는 가르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얻으라.

이는 없어질 때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집으로 영접하기 위해서이다’(누가복음 16:9)라고.

 

우리들은 물론 자선으로서, 천국을 살 수는 없다.

천국은 하나님의 아들이 피로 사신 것으로서 우리들은 신앙에 의해 이것을 그에게서 받는 길 외에 길이 없다.

 

하지만 천국에 들어가는데 공수(空手)로 들어가는 것과, 저축을 가지고서 감의 구별이 있다.

 

그곳에 우리들을 맞이하는 자 있고 없음의 구별이 있다.

 

천국의 재화란 구원된 영혼이다.

모든 눈물을 씻겨 주시는 눈물이다.

 

우리들은 천국에 들어가는데 신앙이 필요하다.

천국을 즐기는데 선행이 필요하다.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

 

어찌하여 더 조직적으로, 힘 다해, 내세의 일을 연구하고,

그 행복을 얻기 위해 계획하며, 또 노력하지 않는가?

 

전도회사 설립 같은 것, 그 점에서 보아 필요하지 않은가?

 

22-23: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몸의 빛(등불)은 눈이다. 몸이 밝고 어두운 것도 눈 여하에 의한다.

영혼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만약 속에 있는 빛, 즉 영혼의 눈이 어두우면,

그 어두운 것, 육안의 어두움에 비할 것도 아니다.

 

인생을 어떻게 보는가?

누구에게 있어서나 이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다.

 

이욕의 눈으로써 보는가?

정의의 눈으로써 보는가?

신앙의 눈으로써 보는가?

보는 눈에 의해 우주 인생은 일변한다.

철학 종교의 필요는 여기에 있다.

그 목적은 사람에게 분명한 선한 눈을 제공하는데 있다.

그 의미에 있어서 사람은 누구이든 나면서부터 맹목이다.

그는 그리스도에 개안(開眼) 되어 비로소 볼 수가 있다.

 

요한복음 제9장을 보라.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건전한 밝은 눈은 단순한 눈이다.

그리스어의 haplous는 이 뜻이다.

 

만약 너희의 눈 단순하여 단일의 목적에 향하여 경주 된다면으로 역할 수가 있다.

영어의 If thine eye be single을 참고하라.

 

분명한, 선한 눈은 단순한 눈이고,

어두운 악한 눈은 불순한, 복잡한 눈이다.

즉 둘, 혹은 둘 이상의 목적에 향하여 경주되는 눈이다.

 

그런 까닭에, 사람은 두 주인에게 쓰일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재물(mammon)에 겸하여 쓰일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쓰이려 하면 그의 눈은 어두워진다.

 

이른바 욕심으로 어두워져그 몸을 그르친다.

 

천국에도 가고 싶고, 돈도 갖고 싶다고 한다.

이는 이부(二夫)에게 수종 드는 여인, 이군(二君)에게 쓰이는 근시의 뜻이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이심(二心)을 싫어하신다.

그 자신이 단순하신 까닭에 그에게 아버지로 섬길 자의 단순함을 요구하신다.

 

그런데 사실은 어떤가?

 

25: ‘이러므로 염려하지 말라. ’

 

지상의 만사 모두 불안하고, 하나님만 다만 믿을 분이시매 너희는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전혀 생각하지 말라고는 않으셨다.

염려하지 말라. 31절까지에 세 번 거듭하여 말씀하신다.

 

빌립보서 46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바울의 말을 참고하라.

 

원어의 merimna?, (생각)을 나눈다. 마음을 쓴다. 걱정한다의 뜻이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을까 하여, 네 뜻을 땅과 하늘과 재물과 하나님과로 나누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돕고 지키시는 것은 확실하다. 생명이 하나님께로 부터 나오는 것은 확실하다.

이것을 기르기 위한 양식을 주시지 않으랴?

 

하나님께서 신체()를 지키시는 것은 확실하다.

이것을 감싸기 위한 옷을 주시지 않으랴?

이미 보다 큰 생명과 신체를 주신분이 어찌 보다 작은 은사를 주시지 않으랴?

 

의식은 인간의 (곁에 따르는 것) 부수물이다라는 속담을 신앙적으로 나타내란 말이다.

 

26: ‘너희는 공중의 새를 보라

 

누가복음에는 까마귀를 생각해 보라’(12:24)고 있다.

 

가장 흔하고 하찮게 여겨지는 새인 까닭에, 특히 이것을 택하여 말씀하신 것이리라.

까마귀는 심지 않고 거두지 않으며, 창고도 헛간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너희 하늘의 아버지는 이것을 기르신다.

 

하물며 너희들이랴? ,

 

이것은 까마귀 따라서 경작치 말라, 저축하지 말라고 하는 말은 아니다.

이에 따라서 염려하지 말라는 뜻이다.

새에게 각각 본능 있듯이, 사람에게도 역시 그것이 있다.

경작과 저장은 사람의 본능이다.

그리고 새가 그 본능에 따라서 염려하지 않듯이,

사람도 또한 그 본능에 따라서 염려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의 명에 따라, 결코 식물(食物)에 부족하지 않는다.

남양제도 및 남미제국에 있어서는 오늘이라 해도 식물 문제 같은 것은 없다.

그리고 구미 제국에 있어서도 식물 문제는 대전쟁으로서 시작한 것이다.

일본에 있어서도 평화주의를 취하고, 술과 담배를 폐지한다면,

오늘날 국민에게 쓰고도 남을 식물(食物)을 공급할 수가 있다.

 

그리고 개인이라 해도, 대개의 경우에 있어서 식물(食物)에 결핍하는 일은 없다.

특히 복음위해 일하고 일본 같은 그리스도교 반대의 나라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그 종, 여종으로 하여금 굶주리게 하시지 않는 것을 나 자신이 실험했다.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의복에 관해서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예수는 이때, 봄의 소산(hill)에서 멀리 헐몬산을 바라보며,

발아래로 갈릴리 호수를 내려다보면서, 교훈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골짜기나 뫼할 것 없이 팔레스티나의 봄 들판에 난만하게 피고있는 아네모네, 학명 Anemone coronaria를 가리키며, 혹은 그 한송이 꽃을 손에 들고서, 이 아름다운 가르침을 말씀하셨으리라.

 

대왕 솔로몬이 그 영화의 극치의 때에 장식했다는 것은, 옛적 왕 옷인 심홍색(scarlet)의 외포였으리라.

 

그 염료는, 소라(해라)의 일종에서 취한 페니키아국 특산의 색소로써, 당시 세계에 소문난 것이었다.

 

하지만 예수는 말씀하신 것이다.

인공의 극을 다한, 대왕 솔로몬이 옥좌에 오른 때의 복장도, 이 아네모네의 꽃 한 송이에 미치지 못했다고.

 

예수는 실로 천연을 보는 눈을 가지셨다.

그는 들풀을 훌륭히 보고 대왕을 경멸하셨다.

 

그리고 예수의 눈은 잘못 보지 않으셨던 것이다.

우리들 오늘의 천연학자는 현미경하에 아네모네의 한 송이를 놓고서,

예수의 말씀이 진리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오늘 들에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풀’ (누가 12:28참조)이라고 한다.

 

소위지중해 연안 지방의 천연을 잘 이야기한 말씀이다.

 

베드로전서 124,

 

대저, 사람은 모두 풀 같고, 그 영광은 모두 풀의 꽃 같다. 풀은 마르고, 그 꽃은 떨어진다를 참고하라.

 

성서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서 미쯔꼬시 또는 시라까야에 가라.

예수나 사도들을 기다리지 않고서, 노방의 들풀이, 이 세상의 유행 남녀를 부끄럽게 하리라.

 

()을 꾸미는 자는 대개는 안()으로 얕은 (천박한)자이다.

 

내적 미를 동경(사모)하는 때에, 사람은 절로 밖으로 질소해 진다.

 

뜰의 아네모네에, 솔로몬의 영화 이상의 미를 인정하신 예수는, 그 자신 인류의 왕이셨다.

왕의 신하가 왕 이상의 생활을 하는 것은 치욕이다.

 

예수는 그 자신 간이생활을 영위하시어,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에 가장 적합한 것임을 가르쳐 주시었다.

 

*내촌감삼의 갈릴리의 길을 연재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