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거듭난 삶 2024. 4. 5.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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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신자의 간이생활

 

마태복음 619-34: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예수의 수훈에 대하여, 반대를 시도하려면 시도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먼저 제일로,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으며, 창고에 모아두는 일 없다고 하는데,

그것은 반드시 사실은 아니다.

 

사실, 까마귀나 참새는 모아두지 않으나 간직하는 새 없는 것은 아니다.

때까치(물까치 shirike)는 개구리를 볕에 말려 이것을 보존한다.

올빼미(an owl)도 그 둥지에 식물을 저장한다고 하며, 미국산 딱따구리(a woodpecker)

그 쪼아 파낸 나무의 빈속에 도토리류를 간직하는 것 있다는 것이다.

 

기타에 어치(언치새 a jay), 히가라, 동고비(Sitta europra), ()에 저축성이 발달해 있는 것은 조류학자가 전하는 바이다.

 

특히 또 조류 전체에 저축성이 부족한 것은 비상기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조류에 이 전력이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일정한 장소에 식물을 저장해 둘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새에 따르라(배우라)는 것은 무리라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수훈의 주의를 해득치 못하는 데서 나온 반대이다.

주요한 뜻은 저축에 있어서 말한 것 아니다. 염려 즉 걱정에 대해서이다.

 

용의(用意) 저장(貯藏)의 필요에 대해서는 예수는 잠언 제6장에 있어서의 솔로몬의 말을 잊지 않으셨다.

 

이르기를,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 없고, 갑독(간역자) 없고, 주인(주권자) 없어도,

여름 동안에 먹을 것을 예비하며, 추수 때는 양식을 모은다.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일어나지 않겠는가

그리하면 네 빈궁은 도적 같이 오고, 네 부족(곤핍)은 병사 같이 올 것이다’(6:6-11) 라고.

 

하나님께서 염오하시는 일로서 낭비 남용 같은 것은 없다.

남는 것은 저장하여 후일의 용도에 사용한다. 이것은 결코 나쁜 일 아니다.

다만 저축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데서 하거나 장래를 염려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모으다가 아니라 모이다’(늘다)가 아니어서는 안 된다.

 

조금도 잃어버리는 일 없이(버리지 말고), 그 남은 부스러기를 거두라’(요한복음 6:12)는 예수님의 말씀 따라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세상에는 고귀한 저축이 있는 것이다.

 

누가 능히 걱정(염려)하여 그 생명을 한 시간 이라도 늘일 수 있으랴’(누가 12:25 참조)는 것은

과연 사실일까?

 

사람은 위생 양생에 의해 그 생명을 늘일 수가 있는 것 아닌가?

사람의 명수에 정한이 있다고 하면, 그는 앞뒤를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죽음을 재촉하는 것 아닌가고?

 

예수의 이 말씀이 문자대로 진리인가 아닌가를 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몸을 하나님께 맡긴 신자는 하나님의 뜻 이상으로 살지도 못하고, 또 그것 이내로 죽지도 않는다는 것을 안다.

 

두 마리의 참새는 일전에 팔리지 않는가?

그런데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 그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는 일 없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다’(마태복음 10:29-31)는 예수의 말씀은 잘 신자의 확신을 말하는 것이다.

 

이 확신 있음으로서 만이 그에게 참된 용기가 생겨나는 것이다.

 

사람은 그 천직을 끝마치기 까지는 불명인 듯이 보인다는 리빙스턴(후세 최대의 유물 역주)의 말을 참고하라.

 

특별히 과학적으로 일분일초도 늘일 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실제적으로 사람의 생명은, 특히 신자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가 위생을 게을리 않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실로 참된 위생 사상은 복음이 신앙화되는 곳에 생겨난다.

 

이상을 말한 후에, ‘들의 백합화는 수고도 않고 길쌈도 않는다에 대해서 말할 필요는 없다.

 

요컨대 예수는 제자들에게 간이생활을 권하신 것이다.

 

챨즈 와그너(바그네르)가 그 명저간이생활 Simple Life로서 근대인에게 이 생활을 고취하기 전에 예수는 보다 깊은 의미에 있어서의 간이생활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뿐 아니라, 모든 위대한 사람들은 간이생활의 실행자 또는 창도자였다.

 

소크라테스(170역주), 스피노자(67역주), 워즈워드,(낮은 생활과 높은 사상 1440역주), 도로(왈덴의 생활), 니꼴라이(7141역주) 모두 간이생활의 사람들이었다.

 

실로 간이생활은 위대의 특징의 하나이다.

사람은 안()으로 족할 때 밖()으로 간략하지 않을 수 없다.

대사상이 아니면 대희망, 이것 있어서, 그 나머지의 일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문명의 진보라면서 생활이 더욱 복잡해지는 것은 결코 참된 진보는 아니다.

복잡한 근대생활 속에 가공할 혁명과 이에 따르는 파멸이 내포되어 있다.

단지 생존경쟁의 입장에서 본대도 간이생활의 백성이 언제나 복잡한 생활의 백성에 이기고, 이에 대신해 온 것이다.

 

만약 우리들의 신앙이 우리들의 생활을 간이하게 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거짓 신앙이라고 하여 틀림은 없다.

 

그러나 예수는 단지 욕심을 줄여 생활을 간이하게 하라는 소극적 간이생활을 가르치지 않으셨다.

 

그는 말씀하셨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하나님의)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러한 것은 모두 너희에게 더해질 것이다라고.

 

이것은 간이생활의 원리를 말씀하시고 그 일(기능)을 보여주신 말이다.

즉 적극적 간이생활이라 칭할 수 있는 것이다.

 

간이에도 정도가 있다. 제왕의 간이생활은 평민의 그것과 다르다.

 

노동자의 간이생활로서 학자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간이생활은 외측의 문제는 아니다. 내심의 문제이다.

간이생활에 표준은 없다. 그러나 이것을 지배함의 원리가 있다.

 

그리고 예수의 이 말씀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목적할 때, 생활은 절로 간이 해진다.

 

즉 보는 눈을 밝히하고 곧 단순히 할 때,

생활은 절로 단순, 즉 간이하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인생은 일종의 정교한 기계이다. 이것을 각부별로 운전하고자 하여, 복잡을 극한다.

 

하지만 동력을 그 중추에 주집하여 전부가 간단 용이하게 운전된다.

()주의를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에 기울일 때, 인생의 기계도 또한 원할 무애로 운전된다.

 

예수 자신의 생애가 이 의미에 있어서 간단 원만했다.

그리고 이 의미에 있어서 그의 충실한 제자들의 생애가 단순했다.

 

알프렛 대왕(앨프레드)은 그리스도적 국왕(Christian King)으로서 간이생활을 했다.

철학자 칸트(7141역주)는 그리스도적 철학자로서 간이생활을 보냈다.

 

혹은 예술가로서 어떤 특별한 경우에 있어서는 배우로서 마저도, 크리스천은 간이생활을 보내는 일을 상례로 한다.

 

하나님위한 정치, 하나님위한 학문, 하나님위한 예술, 하나님위한 모든 사업

간단해지지 않으려 해도 부득하다.

 

()을 간단히 하고자 노력하여 무리가 있다.

예로는 위선이 생긴다.

 

하지만 안()을 간단히 하여 반사가 조화적으로 간단해진다.

그리고 이 간단은 또한 단조로 되지 않는다.

무한한 변화 속에 아름다운 일치를 유지한다.

즉 자유로운 생명의 진화 발달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러한 것은 모두 너희에게 더해지리라고 하신다.

 

생활상의 필요물은 신자가 스스로 나아가 구할 것은 아니다.

이방인 곧 불신자는 그렇게 하나, 신자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것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신자에게 더해질 것이다.

스스로 구하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신자에게 생활난 또는 생존경쟁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모두 참으로 하나님께 의뢰한 자는 생활상의 이 안정을 실험했다.

 

독일의 파이어티스트파(pietist)의 조선(祖先)의 한 사람인 A. H. 프랑케(14129역주),

그에게 본받은 영국의 죠지 뮐러, 지나 내지 전도의 창립자 허드슨 테일러 등은 모두 현저한 정도에 있어서 이 진리를 실험했다.

 

여호와이레, 하나님은 예비하신다. 생활문제에 마음 쓸 것 못 된다.

다만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여 이 문제는 자연히 해결된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개인에 한하는 일 아니다.

국가에 있어서 사회에 있어서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라가 하나님과 그 의를 구하는 동안은, 그 나라는 물질적으로도 번영한다.

 

이것을 구하지 않고 저것을 구하는 때에는, 궁핍은 조만간 반드시 여기에 임한다.

이것은 묵은() 경제학이지만, 틀림없는 경제학이다.

 

우리나라(일본)에 있어서는 니노미야손도꾸(79역주), 사또우노부히로(8230역주)등에 의해 제창된 경제론으로서 만세불역의 진리이다.

 

종교 도덕의 위에 서지 않은 경제학은 사상에 세워진 집이다.

홀란드, 영국, 미국이 오늘의 번영에 달한 것도 이 이유에 의한다.

국민이 무엇을 믿는가는, 경제학적으로 생각하여 결코 소문제는 아니다.

실로 최대 문제이다.

 

알젠틴 공화국 대통령의 한 사람이 일찍이 자기 나라 주재의 미국 공사에게 한 말이 있다.

(),

 

귀국의 건설자는 하나님을 구하여 미 대륙에 왔다

그런데 폐국(알젠틴)의 건설자는 돈(Gold)을 찾아 이 땅에 왔다.

귀국과 폐국과의 사이에 경제적으로 오늘의 현격 있음은 이 때문이다라고.

 

실로 그대로이다.

(God)를 구하는 자는 마침내 골-(Gold)가 더해지고,

-드를 구하는 자는 마침내 이것도 잃는다.

 

하나님과 돈, 일본인은 지금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복음 없어도 좋다. 다만 우리에게 부를 달라고,

그 식자(識者)라고 불리는 자마저 그렇게 외치고 있다.

 

식자로서 또한 그러니, 하물며 일반의 민중의 마음 얼마나 낮을지는 상상하여 남음이 있다.

일본의 장래에 한심한 바 있다.

 

*내촌감삼의 갈릴리의 길을 연재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