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거듭난 삶 2024. 4. 3.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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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양면

 

마태복음 61-18: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워진 성은 숨겨질 수가 없다’ (5:14),

예수는 그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한가지로 예수는 또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그 의를 사람 앞에서 행하는 것을 조심하라.

 

, 숨겨질 수 없고 숨도록 하라는 것이다.

아버지를 세상에 보이기 위해서는 숨는 일이 없도록 하라.

자기를 세상에 보이지(나타내지) 않기 위해서 숨으라는 것이다.

 

신앙에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과의 양면이 있다.

 

숨어서는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숨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숨지 않아야 할 때에 숨으면 신앙은 쇠퇴(decay)하여 오르지 않고,

숨어야(은밀해야) 할 때에 숨지 않으면 신앙은 방산(radiation)하여 소실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신앙의 양면을 명시하여, 그 건전을 도모하신 것이다.

 

는 선행이다. 선행은 모두 숨어서(은밀히) 행하라는 것이다.

지나인의 말로서 한다면 덕은 모두 음덕(secret kindness)으로서 시행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예수는 여기서

세 가지 경우를 적시 하셨다.

 

구제(자선), 기도, 금식, 이것이다.

 

구제(자선)는 사람에 대한 선행,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행위,

금식은 자기에 대한 행동이다.

 

자선, 기도, 금식이라 하여 선행의 전부를 말하는 것으로 된다.

그리고 모두 은밀하게 행하라는 것이다.

 

구제하는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에 알리지 않을 만큼 비밀로 하라는 것이다.

 

또 기도하는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곳에 계시는 아버지께 기도하라는 것이다.

 

또 금식하는 때에는 얼굴을 씻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네 금식 상태를 사람에게 보이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즉 선행은 모두를 의식하는 일 없이 하라는 것이다.

 

선행의 경우에 있어서도 이상의 경우에 있어서와 같이, ‘이것, 과연 행할 수 있을지하는 문제가 일어난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다른 문제에 대해서와 같이,

 

이는 사람에게는 능치 못하다, 하지만 하나님에게는 능치 못한 것이 없다’(마태복음 19:26)

주님 자신의 말씀으로써 대답할 뿐이다.

 

사람은 도덕적 노력에 의해 이 완전에 달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하나님에게서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의 은사를 받아, 그러한 마음의 상태로 될 수가 있다.

 

세상에는 실제로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는 자선가가 있다.

그런데 그러한 자선가가 그리스도의 영에 접촉한 일 없는 사람 중에 있을지, 이는 대 의문이다. 적어도 나 자신은 예수의 제자 이외에 그런 사람을 만난 일은 없다.

 

어떠한 형태에 있어서도 보상을 요구하는 자선은 자선이 아니다.

그저 하는 것으로 기뻐하는 자선, 그것이 자선이다.

 

참 자선은 최대의 사치다. 그리고 세상에 사치에 대하여 보상을 요구하는 자는 없다.

그리고 자선을 사치로 하기까지에는 성령의 힘찬 역사(일 하심)를 요한다.

 

먼저 자신이 죄인의 괴수임이 명시되고, 또 이 죄를 사함 받는 길이 분명히 되며

그 위에 다시 신앙을 받아 속죄의 은혜를 자기 것으로 할 수 있기에 이르러, 나는 비로소 자선을 최상의 사치로 하여 즐길 수 있기에 이르는 것이다.

 

덕도 아니다. 의무도 아니다. 그레이스(Grace)이다.

 

은혜로서 시작하여, 침착하게, 친절히, 시행되고,

행위 그것에 최대의 보상을 인정하는 일, 그것이 크리스천의 선행이다.

 

크롬웰(559, 183역주)이 한 말이 있다.

 

나는 이미 하나님께서 많은 급료(salary)의 선불을 받았으니, 무엇을 해도 이것을 갚을 수는 없다.

 

그리고 이 마음이 될 때, 누구도 구제(자선)를 하고서 이에 대하여 아무런 보상도 구하지 않게 된다.

 

예수는 우리에게 계명을 내려, 다만 우리에게 그 실행을 강요하지 않으신다.

이것을 실행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여, 또 그 길로 걸을(행할) 수 있는 힘을 내려주신다.

 

예수의 경계는 모두 은혜 하사의 약속으로서 해석할 것이다.

 

오늘 선행은 점점 조직화, 또는 제도화되어, 은밀한 선의 실행은 점점 드물게 되었다.

선행은 모두 사업으로 되어가고 있다. 자선사업, 전도사업, 사회사업, 모두가 이런 유이다.

 

그러므로 모두가 공적이고, 비밀적인 것은 점점 적어졌다.

이는 능률을 더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하지만 자선은 단지 공복을 채우며, 나체를 가리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적요(lonely)를 위로하고 냉담을 부드럽게 하는 것도 또한 자선의 목적이다.

옳다, 그 주요한 목적이다.

 

자선은 소유물로서 하는 사랑의 전달이다.

그리고 이 목적을 달하기 위해서는 현대의 사회사업으로서의 자선은 아주 미약하다.

마치 사회화된 가정 같아, 가정이 가정이 아니게끔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여 나는 사회사업의 불용을 말하지 않는다.

이것을 보충하는데 구식의 구제(자선)로서 하는 필요를 주장한다.

그리고 모든 대자선가는 자선가이기 전에 빈자의 좋은 친구였다.

 

먼저 착한(선한) 사마리아 사람(누가복음 10:25-37참조)될 수 있고,

그런 후에 선한 자선가 또는 사회 개량가일 수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 10:25-37 보라,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그분을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으리이까? 하매

26)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율법에 무어라 기록되어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느냐? 하시니

27)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하매

28)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옳게 대답하였도다. 이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살리라, 하시니라.

29) 그러나 그가 자기를 의롭게 만들려고 예수님께 이르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하니

30)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나매 그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그에게 상처를 입혀 그를 반쯤 죽이고 떠나갔느니라.

31)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오다가 그를 보고는 다른 쪽으로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 사람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바라보고는 다른 쪽으로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을 하다가 그가 있던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그에게 가서 기름과 포도즙을 붓고 그의 상처를 싸매며 그를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 떠날 때에 이 데나리온을 꺼내 주인에게 주며 그에게 이르되, 그를 돌보아 주라. 당신이 얼마를 더 쓰든지 내가 다시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느니라.

36) 이제 너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생각하느냐? 하시니

37) 그가 이르되, 그에게 긍휼을 베푼 자니이다, 하매 이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기도에 대해서 말하건대 세상에는 기도 전문의 행자가 있다. 또 소위 기도의 능숙한 신자가 있다.

기도는 종교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 그러므로 자연히 신앙을 나타내는 기관으로서 사용된다.

 

바리새인의 기도의 일례로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강탈, 불의, 간음하지 않고 또 이 세리 같지도 않은 것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일주에 두 번 금식하고, 또 모두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을 드렸습니다’ (누가복음 18:11-12).

 

이는 하나님께 대하여 한 연설이다. 또 감사의 말을 빌러 한 자기 상찬이다.

그리고 오늘 교회에 있어서 행해지는 기도에, 이에 유사한 것이 적지 않다.

 

선한 기도를 드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모든 공적 기도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여러 사람 모여 공동의 기구를 하나님께 드리는 때에 공적 기도의 필요가 있다.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여라고 한다.

 

이 임무에 임하는 자는 열성을 다해 회중을 대표하여 기도할 것이다.

실로 제사장의 일을 하는 것으로서, 그에 대하여 두터운 동정과 존경을 표시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제사장의 임무에 임하여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자기의 신앙이 직업화되고, 그 직무가 예술화됨의 위험이 있다. 실로 동정해야 할 지위이다.

그의 위선을 비난하기 보다는 그를 위해 기도할 것이다.

성직에 위선 많음은 성직 그것만의 죄가 아니다.

 

기도의 행복은 홀로 하나님과 상대 하는데 있다. 또는 두 사람 세 사람,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있다.

 

하나님과 영혼과의 관계는 연애의 말로서 하는 외에 이것을 설명할 말이 없다.

내가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고 나는 그에게 속한다.

 

그는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인다(아가 2:16)고 있음 같다.

 

인간이 만든 문자 중에, 그 절실한 일에 있어서, 그 자신에 눈뜬 영혼이 그 조물주이신

하나님을 사모하는 정을 나타낸 문자에 지나는 것은 없다.

 

이 점에 있어서 어떠한 연애 문학도 도저히 아우구스티누스(4248역주), 파스칼(1282역주), 데비드 브레이나드 등의 기도의 말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여 위선은 전연 불가능이다.

그와 상대하여 말하는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데 계시는 하늘 아버지에게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새벽 미명에, 예수 일찍이 일어나 사람 없는 곳으로 가서, 거기서 기도하셨다’(마가복음 1:35)고 있다.

 

기도하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날 가치가 있다.

등산도 이것 위해 할 것이다. 여행도 이것 위해 기획할 것이다.

하나님과 밀회의 장소를 택한다. 이는 신앙양성 위한 대 요건이다.

강가, 산정, 바닷가, 모두 하나님과 말하는데 좋다.

 

다행히도 사람은 사교를 구하여 도시로 집합한다. 우리들은 이 기회를 잃지 말고, 벽지, 인적 없는 곳으로 가서 천연을 통하여 천연의 아버지와 사귀도록 할 것이다.

천연도 또 신자의 기도로써 거룩해져 일층 그 아름다움을 더하는 것이다.

 

부언(附言)

 

주의 기도,

예수께서 산상의 수훈의 일부분으로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가복음 111절 이하 13절까지가,

그가 이것을 그들에게 주신 경우를 기록해 밝히고 있다.

 

(누가복음 111절 이하- 13절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6)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마태복음 기자는 기도에 관한 주의 교훈을 싣는 기회에 이것을 여기에 기입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7절 이하 15절까지를 제외하고 읽을 때, 6장 전반부의 의미는 명백 해 지는 것이다.

 

앞의 구제(자선)와 후의 금식에 관한 교훈은 모두 은밀한데 보시는 네 아버지는 보이도록 갚아주실 것이다.’라는 말로서 끝나고 있는 것을 보면,

 

기도에 관한 교훈도 동일한 말로서 끝난다고 보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그렇게 볼 때, 1절 이하 17절까지가

 

너희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그 의를 사람 앞에 행하지 말라

일정한 교훈을 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주기도의 귀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것은 이것으로서 별도로 연구할 것이다.

이것은 실로 그리스도 신자의 기도의 모형이다.

자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응답되는 것이다.

 

*내촌감삼의 갈릴리의 길을 연재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