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거듭난 삶 2024. 4. 6.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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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하지 말라

 

마태복음 71-5: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참조 : (누가복음 637-38)

 

대체(大體)의 의미는 명백하다. 하지만, 명백한 까닭에 오해되기 쉽다.

또 무시되기 쉽다.

 

이것을 문자대로 해석하여, 어떠한 심판도 행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또 실행 불가능의 교훈으로 해석하여 자유로 이에 어기는 사람이 있다.

 

성서의 말씀을 전후의 관계에서 떼어 읽고서,

그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그 목적을 그르치기 쉽다.

 

1: ‘너희는, 심판(비판)하지 말라. 심판 받지 않기 위해서이다라고 한다.

 

심판한다는 것은 넓은 말이다. 비평, 비판, 판단, 심사, 감정, 모두 심판한다’(헤아린다)이다.

 

그리고 심판하지 말라를 문자대로 해석하여 이상 어느 것에도 종사할 수가 없게 된다.

그리하여 법률상의 재판을 비롯하여 문학 미술상의 비평, 도덕상 선악의 판별까지가 죄악시 되기에 이른다.

 

참으로, 만약, 심판하여 나쁘다면, 인류의 진보 개선은 곧 그쳐 버리는 것이다.

 

철학은 지능의 심판이고, 도덕은 행위의 심판이며, 종교는 마음의 심판이다.

우리는 항상 심판하고, 또 심판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진보하면서 또 구원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비평의 불이 불타지 않는 곳에 생명도 진보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해서는 안 되는 심판이 있다.

 

그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 사람을 죄로 정하는 일이다.

 

그리스어의 <카타크리네인 Katakrinein>

영어의 <cond. emnation>의 의미에 있어서의 심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능에 속하는 일,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일, 또 할 수 없는 일이다.

 

즉 사람의 의지를 심판하고, 혹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구원으로 정하며, 혹은 죄의 사람으로서 멸망으로 정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는 바리새인이 한 일, 또 많은 종교가가 하는 일로서,

특히 종교가가 빠지기 쉬운 죄이다.

 

이 종류의 사람에 대하여 바울은 말했다.

 

너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심판하는가?

그가 혹은 서고, 혹은 넘어지는 것은, 그 주로 말미암는다.

그가 또 반드시 서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능히 이것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로마서 14:4)라고.

 

사도 야고보도 또한 말했다.

 

율법을 세우고 사람을 헤아리시는(심판하는)이는 한 분이시다.

그는 구원하시는 일, 멸망시키는 일을 하실 수 있다.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헤아리는(심판하는)’ (야고보서 4:12).

 

사람은 누구이든 남의 종곧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이외의 사람이 그를 죄로 정해서는 안 된다.

 

 

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심판(비판)하는 대로 심판받는다.

 

인세(人世)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하다. 세상에 천벌이라는 것이 있다.

자기에게서 나와서 자기에게로 돌아간다.

인세는 자기의 반사경이다.

사회는 죄를 사하고, 사하지 않는 자를 사하지 않는다.

 

누가는 예수의 이 말씀을 이 의미로 해석했다.

 

*참조 (누가복음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하지만 세상의 반향(echo)은 불완전하다. 또 불공평하다.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리스인의 네메시스 이상의 보복의 신이다.

다윗이 노래한 대로이다. ,

 

자비한 자에게는 주, 자비한 이로서 하시고,

완전한 자에게는 완전한 이로서 하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 깨끗한 이로서 하시고,

사곡한 자에게는 주, 엄격하신 이로 하신다’ (사무엘하 22:26-27).

 

어떤 의미에 있어서 사람은 자기처럼 하나님을 변케 할 수가 있다.

자애의 신으로도 할 수가 있다.

잔혹의 신으로도 할 수가 있다.

 

자비는 심판에 이긴다고 있어, 남에 대한 자비의 행위에 의해,

하나님의 자기에 대한(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키게 할 수가 있다.

실로 고마우신 일이다.

 

 

3-4: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죄로 역()된 그리스어의 <카르포스 Karphos>,

나무지저귀 또는 나무부스러기로도 역할 수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의미는 대동소이이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라도 자기를 알 때, 먼저 제1로 자기의 죄가 큰 것을 안다.

남의 죄는 개개로 이것을 보는 것으로 목편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자기 죄는 덩어리로서 보이는 까닭에 들보이다.

객관적으로 보는 타인의 죄와 주관적으로 보는 자기의 죄와의 사이에 이 별() 있음은 당연하다.

 

바울이 자기를 칭하여 죄인의 괴수라고 한 것은 결코 거짓된 겸손은 아니다.

모든 의로운 사람은 가장 많이 자기의 죄에 대해서 안다.

그러므로 타인의 죄를 심판할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자기는 죄인의 괴수, 지금은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어진다.

하지만 사함 받은 죄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을 죄로 정함의 자격은 절대로 없다.

 

버년(4250, 292역주)이 형장으로 끌려가는 죄인을 보고,

 

만약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지 않는다면 저기로 갈 자는 죤 버년이다라고 했다는 것은,

잘 그리스도 신자의 실험을 말하는 것이다.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위선자(hupokrites)' '가면을 쓰는 자’, 배우의 뜻이다.

 

무대 위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연기하는 자이다.

즉 남을 심판하고 자기 완전을 꾸미면서 자기는 죄로 가득하여, 심판할 자격이 조금도 없는 자이다.

 

아아 너희들, 화 있을 진저, 위선의 학자와 바리새인아. 너희는 회철한 무덤 같도다.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안은 해골과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하다’ (마태복음 23:27)

예수는 후에 말씀하시어, 위선자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셨다.

 

그는 산상의 수훈을 말씀하신 때에, 안중(眼中) 이미 바리새인을 두고서,

그들에 대하여 이 말씀을 발하신 것 아닐까?

 

먼저 자기 눈에서 들보를 빼어내라고한다.

 

빼어보라이다. 그리고 뺄 수 없어 하나님께로 돌아가 그에 의해 제거해 주심 받고,

그리고 후, 비로소 형제의 눈에서 티(나무조박)를 빼어 낼 수 있도록 밝히 보라는 것이리라.

 

말하는 뜻(마음), 죄를 사함 받은 자만이 정당하게 죄를 심판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심판한다든가, 12사도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심판한다든가 하는 것은 이 의미에 있어서 임이 틀림없다.

자비를 받은 자가, 자비하신 이와 함께 세상을 심판한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심판이 이 세상의 재판관이나 교회의 직분들이 하는 심판과 어떻게 다른 지는 이 한 가지 일에 의해 알 수 있다.

 

우리들은 사람으로서, 또는 크리스천으로서, 심판을 절대로 마다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들은

 

첫째로 심판을 좋아 않는다.

둘째로, 심판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 있어서는, 자신도 역시 심판될 자로서 심판한다.

그러므로 무자비한 심판을 하지 않도록 힘쓴다.

셋째로, 사람을 죄로 정하지 않는다. 즉 최후의 재판을 내리지 않는다.

 

사람이 내리는 재판은 모두 가정적이 아니면 안 된다.

최후의 재판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가지고 내리신다.

 

대저 심판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의 숨겨진 일은 심판하실 그날에 될 것이다’(로마서 2:16)라고 있는 대로이다.

 

여하간 심판은 삼가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비평, 평판, , 험담은, 가령 심판이 아니라 해도, 이에 가까운 것이다.

 

프로테스탄트교가 이른바 개인적 판단을 허락한 결과로서 신자 상호를 자유로 비판하기에 이르고, 오늘의 교회내의 냉혹, 암투, 분쟁을 인치하기에 이른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심판하지 말라. 심판받지 않기 위해서이다

미래의 재판을 보여주신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주신 훈계이다.

 

심판하지 말라. 심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판단력에 한계가 있음을 알아 절로 깨닫는 진리이다.

깊은 것은 사람의 개성이다.

 

각 사람의 속 뜻(생각)과 마음은 깊다. 시편 646절에 있는 대로이다.

 

또 유전의 무한 복잡함이 있다. 사람 한 사람을 완전히 알 수 있는 지자도 학자도 없다.

인물 비평으로서 적중된 것 하나도 없다.

비평은 비평가 자신의 고백인데 지나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을 심판하려 하여 불가능을 기도하는 것이다.

 

심판은 교회 특유의 죄이다. 사람이 사람을 심판하는 때, 성령은 그를 떠나신다.

신앙을 냉각시키는 일로서, 심판 및 이에 가까운 인물 비평 같은 것은 없다.

 

학자와 바리새인이 예수를 평하여,

 

이 사람은 귀신의 두목 바알세불을 쓰는 것이 아니고서는 귀신을 쫓아 낼 수 없다.’

한데 대하여,

 

그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의 모든 범하는 바의 죄와 하나님을 훼방하는 일은 용서 받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성령을 훼방(욕설)하는 것은 사함 받지 못할 것이다’(마태복음 12:21절 이하)라고.

 

이에 의해 보건대 가공할 성령을 훼방함(거스림)의 벌은 사람을 심판하는 죄의 일종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어떠한 정도에 달하여 이 죄로 되는지는 알 수 없다 해도, 통틀어 사람을 심판하는 죄는 이에 부류하는 죄임은 분명하다.

 

가령 절대적으로 사함받지 못할 죄는 아니라 해도, 하나님께서 매우 이것을 싫어하시고,

이 죄를 범하는 사람과 교회에서 성령을 제거(take away)하시는 것은 사실이다.

 

허다한 경우에 있어서, 교회쇠퇴의 원인이 이에 있음은 확실하다.

우리들이 형제를 헤아리는 일을 그치지 않으면, 성령은 다시 우리들에게 돌아오지 않으신다.

 

미국에 있어서의 급격한 신앙 타락 같은 것, 그 원인은 거국으로 적국 독일, 즉 실은 신앙상의 형제국을 심판한 일에 있지 않는가?

 

전쟁 중에 있어서의 미국의 독일에 대한 증오와 욕설은 실로 격렬의 극이랄 수 있었다.

여하간, 사람을 심판하는 것은, 심판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위험하기 그지없는 죄이다.

 

그런데도 교회의 교사도 신자도 자유 임의로 이 죄를 범하는 것이다.

 

내가 교회를 피하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내가 이 바리새(8369역주)의 누룩에 화해지지 않기 위해서이다.

 

*내촌감삼의 갈릴리의 길을 연재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