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거듭난 삶 2024. 4. 10.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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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예언자(선지자)

 

마태복음 715-20: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참조 : (누가복음 643-45)

 

 

산상의 수훈에 부록으로서 세 개의 훈계가 더해졌다.

 

그 제1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는 것이다.

2거짓 예언자를 조심하라고 하는 것이다.

2는 제1의 계속으로 볼 수가 있다.

 

예언자는 진리의 문지기이다.

참 예언자는 좁은 문을 지키고,

거짓 예언자는 넓은 문을 지킨다.

 

그러므로 멸망에 이르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것과

거짓 예언자를 삼가 조심하라는 것과 그 근본의 의미는 한가지이다.

하지만, 문과 문지기에 대하여 주의를 더하여, 주의는 일층 깊어진다.

 

예언자(선지자), 앞서 미리 예언하는 자에 한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는 모두 예언자이다.

목사, 전도사, 감독, 신학자 모두 예언자일 것이다.

 

여기서 거짓 예언자란 거짓 그리스도교의 교사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라고 닥터 마이어(Dr. Meyer)는 말한다.

 

예수는 여기서 그의 이름으로서 불리는 교회 내에 그런 자가 일어날 (생겨날)것을 그 자신이 예언자로서 예언하신 것이라고 그렇게 보는 것이 아마도 진리()이리라.

 

*참조 : (마태복음 24:23-28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25)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26)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7)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28)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

 

거짓 예언자는 어떠한 자인가 하면,

 

그들은 양의 모습으로(옷을 입고)오지만, 속은 엉큼한(굶주린) 이리라.

 

겉은 죄 없는 유화한 양 같이 보이지만

속은 탐람(avarice) 그칠 줄 모르는 이리라고.

즉 겉은 참 예언자처럼 보이고, ()은 하나님의 적이라고.

 

그리고 거짓 예언자에 한하지 않는다.

거짓된 충신, 거짓된 애국자, 모두 그러하다.

 

센다이하기에 있어서의 하라다가이, 카가소우도우에 있어서의 오오츠꾸덴조우는 그러했다.

그들은 가장 충신인 듯이 보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실은 대역무도의 신하였다.

 

그리스도교의 교사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가장 유화한 사랑의 권하(權賀) 그것인 듯이 보이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적, 신앙의 파괴자는 세상에 결코 적지 않다.

 

하지만 이에 의하는 자 많은 것으로서,

그리스도와 그에게 특별히 택함받은 자만이, 그들이 거짓 예언자임을 안다.

 

다시 주의해야 할 것은, 거짓 예언자는 과연 자기가 거짓말하는 것을 자각 하느냐의 문제이다. 이리는 자기의 잔인함을 알지 못한다. 잔인은 그의 생래의 성질이다.

다만 이리 이외의 사람이 이를 알고 미워하며 겁내는 것이다.

 

그같이 참 거짓 위선자는 자기가 위선자임을 모른다.

그들은 어떤 때는 하나님의 백성을 죽여 스스로 하나님께 쓰이는 것으로 생각한다.

 

(요한복음 16:2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위선은 그의 생래의 성질이다. 그는 참 위선자이다.

언제나 자기의 위선을 알아차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두려워하는 자는 결코 위선자는 아니다.

 

참 위선자에게 철저한 데가 있다.

그가 잘 사람을 속일 수 있는 것은 그의 통일된 사상과 시종일관 한 행위에 의한다.

위선자는 자기가 위선자임을 모른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를 참된 선인으로서 받아들이기가 쉽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가 위선자임을 아신다.

하나님은 그에 대하여 선고하신다.

 

그는 충실한 하나님의 종 같이 보이지만 실은 엉큼한 (굶주림)이리라.

 

마치, 슬퍼하는 자는 자신은 불행한 자라고 생각해도

그리스도는 그 사람은 복되다고 선언하신 것과 한가지이다.

 

사람의 여하는 그 표현(expression)으로 알지 못한다.

또 자각으로도 알지 못한다.

 

하나님만이, 이것을 아신다.

그리고 그 생애가 맺는 열매에 의해서만 사람은 이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 열매로 알 것이다

그들의 맺는 열매에 의해, 너희는, 그를 알기에 이르리라. ’

그것 나무는 그 열매에 의해 안다’(12:33)고 예수는 후에 말씀하셨다.

 

열매는 생애의 총괄이다. 단지 사업이라고 해서는 부족하다.

악인이 선한 일을 하는 일도 있고, 선인이 실수하여 악사를 하는 일도 있다.

실로 사업은 위선자가 사람을 속이기 위해 쓰는 최량의 수단 방법이다.

 

그 열매에 의해 알 것이다’.

 

그 생애의 대방침에 의해, 그 사업의 성질에 의해,

특히 최후의 재판(심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판결 여하에 의해 알 것이다.

 

알 것이다란 미래동사이다. Shall know이다.

지금은 모르지만 후에 명백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날, 이것을 밝혀줄 것이다. 이것은 불로 밝혀질 것이다.

그 불, 각 사람의 한일이 어떤지를 시험할 것이다’(고린도전서 3:13)라고

바울이 말한 대로 이다.

 

그때까지는 우리들은 확실히 교사의 진위를 판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또 말한다.

 

주의 오실 때까지 때가 이르지 않는 동안은 판단하지 말라’(5:5).

 

확실하게 판단을 내릴 수는 없으나, 대략은 안다.

 

먼저 제1, 열매는 나무의 종류 따라 다르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따는 자 없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는 자는 없다.

 

그와 같이, 불교에서 그리스도교의 열매를 딸 수 없다.

이 세상의 철학에서 하나님의 복음의 열매를 바랄 수는 없다.

 

종교는 무엇이든 좋다, 교육만 있으면 신앙의 유무를 물을 것 없다고 하여 순복음과 그 기초 위에 행해진 교육과의 열매와 같은 열매를 비 그리스도교적 교육에 바란대도 실망으로 끝날 것은 당연하다.

종류가 다를 뿐 아니라 성질도 틀린다.

 

같은 종류의 나무에서도 선악의 상위가 있다.

선한(건전한) 나무는 선한 (건전한)한 열매를 맺고, 악한(연약한) 나무는 악한(연약한) 열매를 맺는다. 나무의 양부에 의해 되는 열매가 다르다.

그리고 선한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져진다.

 

예언자 또는 신앙의 교사도 역시 그러하다.

그 신학 또는 교회관계는 어떠하다 해도 성령에 의해 인도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사이에는 가시나무와 포도나무와의 상위가 있다.

 

또 같은 신앙의 교사 중에도 강함과 약함과 생명에 넘치는 것과 메마른 것과의 상위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그 맺는 열매에 의해 알 것이다.

 

그 웅변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 풍채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 표방하는 신앙개조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 이른바 사업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 열매에 의해, 그 감화의 힘에 의해, 성령께서 그에게 있어서 맺으시는 바의 열매,

사랑, 기쁨, 평화, 관용, 자애, 선의, 충실, 유화, 자제(갈라디아서 5:22)에 의해 할 것이다.

 

이것을 제외하고 달리 예언자 즉 교사의 진위 선악을 분별할 길은 없다.

(갈라디아서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교사의 진위는 모든 신자의 진위와 함께,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지 않고서는 판명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일에 관하여 그때까지 최후의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거짓 예언자를 조심할 만큼의 길을 예비해주셨다.

하나님은 성서에 있어서 많은 예언자의 실례를 보여주셨다.

참된 자와 거짓된 자와의 모범을 들어 보이셨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아모스, 미가 등은 모두 참된 예언자였다.

 

그리고 예레미야에 대하여 하사엘이 있고, 아모스에 대하여 아마샤가 있었듯,

참된 예언자와 상대하여 거짓된 예언자를 보여 주셨다.

 

그리고 참된 예언자는 어떠한 자인가 하건데,

먼저 제1, 스스로 예언자 되지 않기를 구한 자이다.

2로는 자기의 약함을 알고, 도저히 그 임무를 당해내지 못할 자임을 자각한 자이다.

3으로, 하나님에 의뢰하는 외에 전연 사람에 의뢰 않고, 정부 또는 교회에서 아무런 보호도 받지 않은 자이다.

 

이것과 상대하여 거짓 예언자는 정권의 변호자였고, 교권의 유지자였다.

바스훌(20:1)은 제사장 임멜의 아들로서 여호와의 집 유사장이었다고 한다(예레미야서 20:1). 아마사는 벧엘의 제사장으로서 왕 여로보암의 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아모스서 7:10).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와의 별()은 일목요연하다.

구약성서학의 태두 A. B. 데비드슨이 말한 일이 있다.

 

거짓 예언자는 당시의 애국자였고, 참 예언자는 그 반대로 당시의 난신국적 이다라고.

 

오늘이야말로 예레미야, 아모스등을 참 예언자의 모범으로서 우러르나,

그들이 예언한 당시에는 난신으로서 옥에 던져지고 국적으로서 방출된 자이다.

 

거짓 예언자에 관한 예수의 이 경계를 해석하기 위해,

우리들은 구약의 예언자들의 자세한 연구를 필요로 한다.

 

멸망에 이르는 문은 넓고, 거짓 예언자는 양의 모양을 꾸미고,

겸손, 유화, 온량의 군자로서 나타나 사람을 속인다고 한다.

 

이 세상은 실로 시험의 세상이다.

그리고 시험을 거쳐 선하다(옳다) 여기심을 받는 때에 생명의 관이 주어지는 것이다.

 

시험은 하나님을 알기 위해, 또 영혼을 완성하기 위해 필요하다.

인생 만사 모두 불안하다 해도, 유일의 안전한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비해 주신 구원의 반석이시다.

 

사람은 모두 우리를 속여도 그는 속이지 않으신다.

우리들은 다윗의 말을 빌어 노래하리라.

 

내 마음이 눌릴 때, 땅 끝에서부터 주를 부르오리이다.

원하옵기는 나를 인도하여 나보다 높은 바위에 이르게 하옵소서라고.

주는 나의 피난처, 나를 원수에게서 피하게 하시는 견고한 망대이니이다’(시편61:2-3)

 

거짓 예언자를 피할 수는 없으나 그가 속일 (미혹할) 수 없는 곳에 자기를 둘 수가 있다.

 

*내촌감삼의 갈릴리의 길을 연재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