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거듭난 삶 2024. 4. 9.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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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에로 들어가는 문

 

마태복음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참조 : (누가복음 1322-24)

 

산상의 수훈은,

712, 황금률의 선언으로서 끝난다.

 

무릇 사람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것을, 하나님이 너희에게 해주시는 마음과 방법으로서,

또한 사람에게 행하라고 하여, 실천도덕은 그 절정에 달한 것이다.

 

시인 괴테가 말한 대로, 인류의 지식은 아무리 진보한 대도,

그 도덕은 예수 이상에 달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고 한다.

 

즉 천국에 들어감의 도()이다.

이것을 또 생명에 들어감의 문이라고 칭할 수가 있다.

 

13절 이하는 수훈의 추가이다.

복음의 성질, 이것을 발견하는 길, 이것을 행할 필요를 진술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이신 까닭에 예에 따라 간단명료하면서, 그 의미는 심원하다.

즉 다음과 같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르는 문은 넓고, 그 길은 넓다.

그리고 이리로 들어가는 자 많다.

생명으로 이르는 문은 작고, 그 길은 좁다.

그리고 이리로 들어가는 자 적다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예수의 말씀으로서 놀라운 말씀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늘이 넓음같이 넓다.

그러므로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이르는 길도 또한,

광대무변(廣大無邊)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누구도 생각하는 바이다.

 

군자는 가는데 소로(小路)로 행하지 않는다고 한다. 좁은 것은 실로 소인의 길이다.

그런데 예수는 그 제자에게 가르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신다.

 

그는 또 후에 바리새인들에게 고하여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곧 양의 문이다’(요한복음 10:7)라고.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도는 좁다,

나도 또한 좁다고 하심과 같다. 이것을 듣고서 누가 놀라지 않을 수 있으랴이다.

 

그리고 그 반대는 어떤가 하건대,

멸망에 이르는 문은 넓고, 그 길은 넓다고 한다.

 

생명에 들어가는 문과 길은 좁고,

그 반대인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는 문과 길은 넓다고 한다.

 

이에 있어서인가 협애(狹隘)는 예수에 의해 칭양되고, 광활은 도리어 펌척(degradation)된 것을 본다.

광량대도로써 자랑삼는 동양의 군자 호걸은 또 무색할 뿐이다.

 

그리고 사실은 어떤가?

진리는 언제나 좁고 오류는 언제나 다수에게 환영되는 것 아닌가?

 

이 세상에 있어서는, 진리는 불과 소수에게만 환영되고,

오류는 언제나 다소에 환호되는 것 아닌가?

 

미신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지를 본다.

이에 반하여, 명명백백의 진리는 소위 시자에게까지 무시되는 것 아닌가?

 

진리는 최후의 승리라고 한다.

그 최후의 도래란, 얼마나 더딘가?

 

사물의 진위를 다수결에 의해 정하는 것만큼, 틀린 방법은 없다.

도적인 바라바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누구를 석방할 것인가고 빌라도가 회중에게 물은 때,

일동은 소리를 합하여 말했다.

 

바라바를 놓으라 예수는 이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27:15이하 참조).

 

그리고 1960년 후의 오늘날, 개명의 일본에 있어서도,

또 이른바 그리스도교국의 영국 또는 미국에 있어서의 동일한 일이 행해지는 것이다.

 

성서의 명훈에 따라 전쟁의 해와 악을 말하는 자 있으면, 전국 모두가 이를 압박하고,

그 그리스도교회까지가 감독, 목사, 신학박사들의 지도하에 전쟁을 구가하며, 유혈을 의호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것은 불신의 일본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부터 불과 7, 8년 전에 열신의 퓨리탄을 선조를 가졌다고 하여 자랑하며,

우리를 동양인이 어두운데 헤매는 것을 동정한다고 하여

우리에게 허다한 선교사를 보낸 미국인에 의해 행해진 것이다.

 

평화의 길은 좁고 전쟁의 길은 넓었다.

그리고 지금 전쟁은 그 목적과 정반대의 결과를 낳은 것을 깨닫게 되었대도,

평화론 자는 존경되지 않고, 주전론자는 처벌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 제1의 그리스도교국이라 말하는 미국에 있었던 일인 것을 알 때,

다른 것은 미루어 알만한 것이다.

 

죄의 이 세상에 있어서 사회 다수에게 진리로서 환영되는 도는 거짓된 도이고,

그 소수자만이 발견할 수 있는 길이 참된 길이라고 일컬어 틀림없는 것이다.

 

멸망에 이르는 문과 길은 좁다.

생명에 이르는 문과 길은 넓다고 한다.

이것은 지옥은 넓은 곳, 천국은 좁은 곳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는 내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 많다고 하여, 천국의 넓음을 보여주셨다.

 

예수의 이 말씀은 좁은 지옥에 이르는 길은 넓고,

넓은 천국에 이르는 길은 좁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위선자의 문은 넓고, 성대하다.

의원(醫院)의 성대한 현관이라고 한다. 돌팔이 의사의 특징이다.

 

함정과 그물의 입구는 넓다. 짐승과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이다.

속 좁은 자는 겉을 꾸며 사람을 끌려 한다.

이에 반하여 속 넓은 자는 겉을 좁히고, 들어오는 자를 도태하려 한다.

이것은 모두 자연의 법칙이다.

 

소크라테스, 단떼, 칸트, 칼라일, 그들은 모두 속을 넓히어 충만해 있었기 때문에 겉은 좁고 또 초라했다.

 

하지만 일단 그 좁은 추한 문을 밀어 열고서 안으로 들어갈 것인가?

 

금옥의 전당, 보석의 산, 나를 영접하여 마지않는 것이다.

사람인 교사에 있어서 그러하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에 있어서랴. 참된 예수는 가까이 하기 어렵고, 그 복음은 찾아내기에 어렵다.

 

그 길은 좁고, 그 문은 작다

 

정부도 사회도 이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지자도 학자도 이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 앞에 십자가가 가로 놓여 있다.

마치 여기서부터 들어가지 말라는 표찰을 보는 것 같다.

 

부형도 친척도 이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입신의 도가 저지된 듯이 생각된다.

 

하지만 아아, 그렇지만이다.

이 좁은 문안에 다시 좁은 길을 지나서 그 깊이 들어간 속에

참된 자유, 참된 생명, 참된 행복이 있는 것이다.

 

이것을 찾는 자 적다고 한다.

 

문이 좁기 때문에, 그 너무 초라하기 때문에 이다.

천국 즉 생명에 들어가는 문은 그렇듯 좁아야 하는 것인데,

이것을 넓혀 다수를 수용하려고 꾀하는 자는 누구인가?

 

천국의 문은 넓어야 한다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는 아니다.

그의 제자라고 자칭하는 이 세상의 지자, 즉 속인이다.

 

그들은 말한다. ‘교회의 문을 넓히라.

그리고 넓혀진 문을 통하여 들어온 자는 누구인가?

 

속인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모른다.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해석하고,

이것을 전하는 것을 전도라고 한다.

 

세계 각국, 특히 미국에 있어서 그리고 주로 미국인에 있어서 그리스도교를 전해 받은 우리 일본에 있어서, 오늘의 신앙 타락은 예수의 이 명백한 교훈에 거스린 데서 온 것이라고 믿는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내게 규문(cross-examination)하리라.

그렇다면 소수자만이 구원되고 다수는 멸망할 것인가.

 

예수 재세(在世) 당시에 같은 질문을 가지고 그에게 다가선 자가 있다.

누가복음 1322절 이하에 이르기를,

 

예수, 가르치시면서 도시와 마을을 지나 예루살렘을 향하여 여행하시는 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구원받을 자 적습니까고. 예수, 그들에게 대답하시기를,

너희는 힘 다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들어가지 못할 자 많다.

 

예수의 뜻(마음)은 아마도 다음과 같았으리라.

 

너희가 어찌하여 이 질문을 내게 향하여 말하는가?

이는 너희에게 있어서 아무 관계없는 문제가 아닌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그러한 문제로 머리를 쓸 것 없다.

다만 가서 네 자신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그것은 노력이 부족한데서 들어가고자 해도 못할 자 많다.

너희가 그런 질문을 말하는 그것이 너희 마음이 해이해진 증거이다.

너희로서 만약 진실로 생명에 들어가고자 열심히라면,

그러한 문제에 심사를 괴롭힐 틈이 없을 것이다.’ 라고.

 

다수가 구원되거나 구원되지 못하거나 그것은 물어서 유익 없는 문제이다.

그러나 나는 구원되어야 한다.

 

너희들 옳다, 너희들 자신은 힘 다하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이다.

 

타인은 아무래도 좋다.

그리고 노력하는 자만이 타인도 또 생명에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키르케고르(5377키르케고르역주)는 말했다.

 

그리스도교는 믿기에 아주 어려운 종교이다.

사람은 쉽게 그 신자 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 신자 될 수 없다는 이유로는 되지 못한다.

만약 이때까지 한 사람의 그리스도 신자 없었다면

나는 최초의 그리스도 신자로 되리라.

 

참된 열심은 언제나 사람으로 하여금 이 태도에 있게 하는 것이다.

좁은 점에 있어선 예수의 가르치심은 바리새인의 그것과 다름없다.

다만 좁은 종류가 다른 것이다.

 

후자(바리새)는 인종적으로 의식적으로 좁은데 대하여,

전자는 도덕적으로 실행적으로 좁은 것이다.

낮은 협애와 높은 협애와의 차별이다.

그리고 그 차별은 무한적이다.

 

생명에 들어가는 길은 십자가의 도이다.

 

*내촌감삼의 갈릴리의 길을 연재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