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거듭난 삶 2024. 4. 12.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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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기적과 그 모범

 

마태복음 81-4: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2)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참조 : (마태복음 8-9장 마가복음 140-45절 누가복음 512-16)

 

예수는 기적을 행하셨다.

 

예수의 경우에 있어서는, 기적은 단지 기이한 일은 아니었다.

또 정신요법이라든가 암시요법이라고 칭하여 심리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또 당시의 기적이고 학술 진보의 후세에 있어서는 과학이 보여주는 방법에 따라 누구에게도 되풀이 될 수 있는 사적은 아니었다.

 

예수의 경우에 있어서 기적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 (요한복음 9:3)이었다.

 

하나님 아니고서는 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내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서 귀신을 쫓아냈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임했다고 그가 말씀하신 대로 예수의 손가락은 하나님의 손가락이시고, 그의 일하심(역사)은 하나님께서 조화에 있어서 나타내신 역사(일하심)이었다.

 

그처럼 기적을 볼 때, 예수의 기적이 해득되는 것이다.

또 그의 기적이, 그가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의 교훈을 중히 보고 그의 기적을 가볍게 보는 것은 성서의 견해(view)가 아니다.

교훈은 기적을 설명하고, 기적은 교훈을 증명한다.

기적을 행치 않으시는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가 아니시다.

 

우리가, 예수의 기적에 대하여 읽고서,

이것에 거리끼는 동안은, 아직 그를 모르는 것이다.

 

마태복음은 5장에서 7장까지에는, 주로 예수의 교훈을 전한다.

8장과 9장에 있어서 주로 그의 기적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아마도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일시에 연속적으로 9회의 기적을 행하신 것은 아니리라.

이들은 아마도 기자인 마태가, 예수의 대표적 기적으로서 여기에 이것을 편집한 것이리라.

 

예수는 육체를 주관하신다. 천연을 지배하신다.

영계를 다스리신다는 것은 이들 기적이 보여 주는 바이다.

 

그는 이 밖에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하지만 이들(여기 기록된)은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마태복음 제89장의 연구는

예수의 기적을 총괄적으로 알려는데 있어서 가장 유익하다.

 

예수가 나병자를 고쳐주신 일에 대해서는 우리는 이미 마태복음 140-45절에 의해 기술되었다.

 

이제 이것을 마태복음의 기사로서 보는 때에, 그 안에 다른 의미가 있는 까닭에 중복에도 불고 하고, 다시 이에 대하여 말한다.

이것은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처음으로 행하신 기적이다.

 

그는 백성 중의 모든 병, 모든 질병을 고쳐주셨다’(4:23)고 있는데,

 

그 최초의 것이 이 나병이었던 것이다.

최초의 기적이었던 까닭에 가장 대표적이었다.

 

기적이란, 이 목적으로서 이같이 행해졌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나병은 오늘이라 해도 불치의 병이다.

하와이산(Hawai) 대풍자유가 그 특효약이라고 일컬어지나, 아직 그 필치(必治)는 보증되어 있지 않다.

이른바 열대병의 하나로서 가장 완고한, 가장 고질적 질병이다.

아마도 의학이 나병을 정복하는 때, 그 최후의 개가를 올리리라.

 

그런데 예수는 지금부터 1900년 전에 다만 손을 대시는 것뿐으로,

즉시에 이 난병을 고치셨던 것이다.

 

이것은 대갈일성(大喝一聲) 그리하여 정신병자를 고치는 것과는 전혀 유를 달리한다.

이는 확실히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다.

 

기적을 넘어 개조이다.

의학이 그 극에 달하여도 이렇게는 고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는 쉽게 즉좌에서 고치셨다.

 

그는 건강한 자는 의사의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고 하며, 자신을 의사에 비유하셨지만 그는 사람인 의사는 아니었다.

그는 육체의 질병을 고치는데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고치듯 고치셨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나병보다도 더 완고한, 더 고질적인 질병이 있다.

그것은 죄이다. 죄는 사람의 생명의 근본을 범하는 질병이다.

선해지고자 해도 선해질 수 없고, 악을 증오하면서 이것을 행한다.

 

사람의 마음은 만물 중에서 가장 거짓된 것으로서, 심히 악하다. 누가, 이것을 알랴는 예레미야의 말은(예레미야 17:9),

 

깊이 인생과 자기를 궁구한 자 누구나가 하는 거짓 없는 고백이다.

 

아아 나, 괴로운 사람인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구원할 분은 누구시랴?’(7:24참조)란 나병환자의 외침으로서,

 

동시에 또 자신의 죄에 눈뜬 자의 외침이다.

그리고 죄의 사람이

 

와서 절하며, 주여, 만약 뜻에 합하시면 나를 깨끗이 할 수 있나이다고 하는 때에,

 

예수는 손을 펴, 그에게 대시고,

 

내 뜻에 맞다. 너는, 깨끗해져라고 하시어,

 

나병과 같은 죄는 곧 깨끗해지는 것이다. (사실)은 의론 아니다. 실험이다.

자기가 불치의 질병에 걸리고 사람의 원조의 효과 없음을 알 때, 하나님의 아들의 발아래 엎드려, 겸손하게 치유를 구하는 때, 이 실험이 있는 것이다.

 

만약 성지라면이다.

 

무리하게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죄를 범한 자는 구원을 요구함의 자격 없다.

그러나 만약 뜻이라면 당신은 나를 깨끗이 할 수 있나이다. 당신에게 능력이 있음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이 태도로 서는 때, 하나님은 그에 대하여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 있어서의 능력의 유무의 문제는 아니다. 사람에 있어서의 신앙의 유무의 문제이다.

 

사람에게 신앙 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의 표현은 확실하다.

모든 기적이 이 조건 하에 행해진다. 이 조건 없이 기적을 볼 수는 없다.

이 의미에 있어서 이 기적은 모범적이다.

신앙 없는 곳에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는 육체의 의사가 아니시다. 영혼의 의사이시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려 하심이라’(마태복음 1:21)고 있는 대로이다.

 

그리고 예수의 기적은 모두 이것을 증명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나병은 가장 좋은 실례였다.

나병은 많은 점에서 죄를 예증하는 병이다.

그러므로 나병을 고칠 수 있는 이는 죄를 제거 할 수 있다고 믿어 크게 잘못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몇 번이고, 나병을 고치셨다.

마태복음 108, 115, 266, 특히 누가복음 1712절 이하 등이 이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나병을 깨끗이 고침 받았다고 한다. 죄를 정결하게 씻음 받았다고 한다.

죄 없는 자로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신다고 한다.

사람으로서의 최대 행복 또는 최대 특권이다.

그리고 쉽게 나병을 깨끗이 할 수 있는 분만이 사람에게 이 일을 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본대도 또 예수의 최초의 기적은 모범적이고, 의미심장하다.

 

삼가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는 경경(輕輕)하게 광고할 것 아니다. 이것을 말하는데 사람을 골라야 할 것이다.

돼지 앞에 진주를 던져, 진주는 오손되고, 또 잃을 위험이 있다.

 

구원의 증거를 한다고 하여,

 

널리 은혜를 사람에게 말하고, 이것을 잃은 예는 결코 적지 않다.

 

신앙은 비전(secret)은 아니지만, 단 오의이다.

이것은 누구에게도 해득되는 설은 아니다.

 

삼가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이다.

 

절대로 말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삼가 말하지 말라. 또 말하라 하시는 것이다.

이른바 리바이벌 운동에 예수의 이 훈계가 지켜지지 않는 것은 아주 개탄할 일이다.

 

다만 가서, 자신을 제사장에게 보이라

 

예수도 또한 모세의 율법을 중히 여기셨던 것이다.

그는 때로는 율법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에 초월하셨는데,

그러나 보통의 경우에 있어서는 잘 이에 복종하셨다.

 

이 경우에 있어서도 나병에 손을 대는 것은 율법이 금하는 바인데, 그러나 병자를 고치시기 위해서는 감히 이 금령을 범하셨다. 하지만도 고침 받은 자에 대해서는 규정의 법칙을 지키도록 명하셨다.

 

이것 모순 같이 보이나, 조금도 모순은 아니다. 모든 건전한 개혁자에게 이 양 방면이 있다.

그는 진보가인 동시에 보수가이시다.

필요 부득한 경우에는 고레구관에 초월하는 일 있다 해도, 대개의 경우에는 이것을 중히 여기고, 이에 복종한다.

 

사랑은 율법을 완전히 (완성)한다’(로마사 13:10).

 

사랑이 명하는 때에 율법에 초월하는 일 있대도

(그렇다고 배반하며, 또는 깨뜨리는 것은 아니다.),

 

명하지 않는 때에는 굳이 스스로 이것을 범하려 않으신다. 의식 그것은 결코 나쁜 것은 아니다. 이것을 형식이라 하여 한마디로 이것을 배척할 것은 아니다.

 

모든 의로운 일은, 우리가 이루도록 할 것이다’(3:15참조)라고,

 

예수는 침례 요한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공경할 만한 것은 마음에 새겨두고 이것을 행하라고.

 

바울은 가르쳤다.

 

*참조 : (4:8-9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크리스천은 반항을 사랑하는 율법의 백성은 아니다.

율법은 가능한 한 이에 복종한다.

 

가서, 자신을 제사장에게 보이라. 또 모세가 명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하라고 예수는

그에 의해 고침받은 나환자에게 말씀하셨다.

 

사랑을 행하는 외에는 보통 사람이어라는 뜻이다.

소요(excitement)를 피하라, 기를 좋아하지 말라, 가능한 한 세상과 함께 걸어가라는 것은,

성서 전체가 가르치는 바이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신자에게 가르쳐,

 

너희는 안전(고요)하기를 힘쓰고, 자기의 일을 행하며, 자기 손으로 일하라.

이는 너희가, 밖의 사람에게 향하여 옳게 행하고,

또 스스로 부족(결핍)이 없게 하렴에서이다’(데살로니가전서 4:11-12)고 써 보낸 것은

 

신자 된 자의 이 태도를 보여 준 것이다.

 

*내촌감삼의 갈릴리의 길을 연재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