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거듭난 삶 2024. 4. 7.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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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에게 진주

 

마태복음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심판하지 말라. 관대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취급하심 같이 남을 취급하라. 하지만 사람에 따라 선을 행하라. 비둘기처럼 온순하라. 동시에 또 뱀같이 슬기로우라(10:6.일본어역).

 

 

개에게 거룩한 것을 주지 않도록, 또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이 이 교훈이다.

 

이 일절은 다음과 같이 배열하여 읽을 것이다.

 

개에게 거룩한 것을 주지 말라. 또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지 말라.

아마도 발로 밟고 되돌아서 너희를 물어뜯을지 모른다.

 

발로 밟아 버리는 것은 돼지이다. 물어뜯는 것은 개다.

팔레스티나 지방의 개의 악성을 잘 말하여 그릇됨이 없는 말씀이다.

 

네꼬니 고방이라는 말처럼, 돼지에게 진주이다.

하지만 들개보다도 악한(사나운) 동방의 개는, 성물이 자기에게 소용없음을 보면,

되돌아서서 이것을 준 자를 물어뜯는 것이다.

 

말하는 뜻은 부당한 자선을 행하지 말라는 말이다.

사람을 보아 법을 말하듯, 사람을 보아 선을 행하라시는 교훈이다.

 

거룩한 것이란 하나님의 말씀이다.

진주란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천국은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 같다. 하나의 값진 진주를 발견하면, 그 가진 것을 다 팔아 이것을 산다’(13:45-46)고 있는 진주의 보옥이다.

 

이에 대하여 돼지는 욕심에 지배되는 육의 사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개는 돼지보다도 더 나쁜 것으로서, 배교자 즉 타락 신자로 해석할 것이리라.

 

돼지는 성물의 가치를 모르는 자, 즉 이 세상의 속인이다.

개는 복음을 염오하는 자, 즉 타락 신자이다. 돼지는 밟아 짓이기고, 개는 노한다.

이자의 사이에 명백한 정도의 차별이 있다.

 

돼지는 야()하고 부정한 동물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피할 것이지만 미워할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서는 돼지로서 악인을 나타내지 않는다.

 

아름다운 여인의 삼가지 않음은 금고리가 돼지 코에 있음 같다’(잠언 11:22)고 하여,

유모어로서 말한다.

 

개에 대해서는 그렇지가 않다. 개는 위선자이다. 배교자이다.

악인 줄 알면서 이것을 행하는 자, 선으로 알면서 이것을 버리는 자이다.

 

너희는, 개를 삼가라, 악을 행하는 자를 삼가라. 할례를 행하는 자를 삼가라’(빌립보서 3:2)고 바울은 외쳤다.

 

개는 (거룩한) 도성 밖에 있게 된다’(계시록 22:15)고 있어,

 

거룩한 도성인 새 예루살렘에 거짓 성자는 들어갈 수 없음이 보여 있다.

 

돼지는 육()의 죄인을, 개는 의지(意志)의 죄인을 대표한다.

죄인에 이 이종 있음은 분명하다.

 

사람을 부르는데 짐승의 이름으로서 하는 것은 악한 습관이다.

예수가 여기서 이 말을 하셨다고 해서, 우리들은 그를 따라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께서 심판을 위탁 맡은 그와, 심판받을 우리와의 사이에 커다란 차별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예수는 또 여기서, 특히 사람을 부르는데 짐승의 이름으로써 하신 것은 아니다.

이것은 아마도 당시 민간에 보통 쓰이던 속담으로서 예수는 그대로를 취하여 하나의 중요한 진리를 가르치셨을 것으로 생각한다.

 

마치 우리나라(일본)에 있어서 고양이에게 금화를 두지 말라고 했대도, 나쁜 느낌을 불러일으키지 않음과 같다.

 

예수가 사람을 부르시는데 짐승의 이름으로서 한 일은 단 1회 있다.

그것은 바리새의 사람들, 일찍이 와서,

 

헤롯왕, 당신을 죽이고자 한다고 하여 위협한 때, 그는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너희는 가서 그 여우에게 말하라 ’ (누가복음 13:31이하).

 

그러나 여기에는 깊은 이유가 있었다. 여기서는 이것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예수에게 있어서 대담하기 그지없는 말씀이었던 것만은 누구에게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용어의 문제는 아니다. 사실의 문제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돼지와 개로 대표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육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도를 말하면 밟아 버리고,

일단 신앙에 들어왔다가 후에 이것을 버린 사람에게 복음을 말하면,

그 기피(abuse) 참방(Slander)하는 바로 되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복음은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인 까닭에 누구에게도 말할 것이라는 것은 잘못이다.

복음을 말하는데 사람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돼지 앞에 진주를 주면, 그 밟아 짓이기는 바로 된다.

돼지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고 진주는 손상된다.

 

그처럼, 진리의 가치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진리를 말하면,

사람은 이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진리는 이 때문에 경멸 된다.

 

개에 이르러서는 보다 더 심한 데가 있다.

개는 거룩한 것을 밟아버리는데 그치지 않는다.

이것을 걷어찬다. 저주한다.

 

복음을 싫어하는 자로서 배교자 같은 것은 없다.

그들은 이것을 듣게 되면 자기를 판단 받는 것으로 느낀다.

 

사도 베드로는 그 상태에 대하여 기록하여 말했다.

 

그들, 만약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어 세상의 더러운 것을 피했다가,

다시 거기 말려들어가 정복당하는 때는, 그 후의 상태는 전보다 더 나빠질 것이다.

그들이 의의 길을 알고도 그 전해진 계명을 버리는 것 보다는, 차라리 의의 길을 알지 못했던 편이 좋았을 것이다. , 돌아와서 그 토한 것을 도로 먹고, 돼지, 씻김 받고서 다시 진탕 속에 뒹군다고 한 속담은 참으로 그들에게 들어맞는다’ (베드로후서 2:20-22).

 

세찬 말이기는 하나, 그것이 사실임을 어찌하랴 이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서 행한 이것이 오늘의 교세 쇠퇴를 가져온 주요한 원인의 하나이다.

 

니체(13300참조 역주)

그리스도교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악한 것이다라고 단언한 것은 이 류()에 의한 것이다.

 

그리스도교를 무능케 하는 것으로서 이른바 promiscuous preaching

무분별한, 함부로의 전도 같은 것은 없다.

 

복음은 하나님의 것인 까닭에 소중히 취급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싼 헐값으로 팔아서는 안 된다.

속인, 악인, 배교자, 모멸 조롱 같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옛 이스라엘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취급한 것 같이,

경건과 두려워 떨림으로서 취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말한대서 우리들은 불신자와 배교자를 증오하여 그들을 죄로 정하는 것 아니다.

그들은 그들로서 사랑하고, 때와 기회를 보아 그들을 가르쳐 인도할 것이다.

 

우리들은 특히 개라 불러 그들을 물리치지 않고, 돼지라 불러 그들을 멸시 않는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하신대로 그들에게 하고자 한다.

 

, 우리들 자신이 개였을 때, 또 돼지였을 때,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 시기에 맞게 우리들을 인도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또 그들 상당의 길 따라, 진리에서 진리에도, 은혜에서 은혜에로,

그들의 인도자가 되고자 한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주어야 할 경우에 개에게 거룩한 것을 주어 아끼지 않으셨다.

그가 두로와 시돈의 땅으로 가셨을 때, 이방 가나안이 여인 한 사람이 와서, 그녀의 딸의 귀신들린 것을 고쳐 주시기를 원했다.

그런데 그는 그녀의 원()을 물리치시며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의 집의 잃은 양 외에 나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

어린아이의 빵을 취하여 개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이에 대하여, 여인은 대답하여 말했다.

 

주여, 그렇지만 개도 그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습니다.

 

예수는 이 신앙과 겸손에 대하여 은혜의 창고의 문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여인), 네 신앙은 크다. 네가 원하는 대로 네게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그리고 그때부터 그녀의 딸은 나았다고 있다(마태복음 15:21-28).

 

개로 불리고 돼지로 불린대도, 사람은 사람이다.

그의 심령()에는 영혼의 거함 있어서,

그에게도 또한 은혜를 받을 자격이 주어지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에 처하여, 우리들은 오연하게 일어나 그들에 대하여 영구의 저주를 선고해서는 안 된다.

 

다만 예수 따라서 개에게는 개인 것을 자각시켜, 그런 후에 성물을 수여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취급하기 어려운 것은, 여기에 개로 불린 배교자이다.

 

그들은 배교를 자랑으로 삼고, 지금은 진주 이상의 보석을 손에 갖고 있다고 자신한다.

 

그들은 도리어 신자를 불쌍히 여겨, 우리들을 가르치려 하고, 우리들에게 배우려 하지 않는다.

 

어느 종교에 있어서나, 그 종교의 최대의 적은 그 배교자이다.

 

사람이 있어, 일찍이 모하메트(796마호메트 역주)에게 물어 말했다.

 

회개한 죄인이다라고. 다시 또 물었다.

 

신이 가장 싫어하는 자는 무엇인가?’.

 

대답하여 말했다. ‘배교자이다라고.

 

그리고 구미에 있어서 많은 배교자가 나왔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일본)에 있어서도 또 이미 많은 배교자를 냈다.

 

많은 학사, 박사, 고등관, 이른바 민간의 민완가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배교자이다.

우리들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때로 그들 위해 기도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다시 복음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택한 불신에 그들을 맡긴다.

그리고 불신의 필연의 결과인 견디기 어려운 적요가, 그들을, 다시 아버지의 품에로 좇아내어 돌아오게 되는 그 때를 기다린다.

 

*내촌감삼의 갈릴리의 길을 연재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