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 십자가의 길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거듭난 삶 2024. 4. 11.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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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표와 실생

-언어에 의한 표시와 실행-

 

 

마태복음 721-27: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참조 : (누가복음 646-49)

 

 

(1) 넓은 길로가 아니라, 좁은 길로 가라.

(2) 거짓 교사에 따르지 말고, 참 교사를 따르라.

(3) 자신, 언표자로 되지 말고, 실행자로 되라.

 

예수는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다. (진리)이다. 생명이다’ (요한복음 14:6)라고.

 

예수는 참된 길, 참된 교수, 또는 생명 즉 진리의 실행자이시라고,

그의 이 말씀의 의미를 해석할 수가 있다.

 

단지 참된 교사에 따르는 것만으로는 족하지 못하다.

그의 가르치심의 실행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는 듣기만 해서는 알지 못한다. 실행(실험)하여 보고 비로소 안다.

모든 진리에 있어서, 그러하다.

특히 신앙의 진리에 있어서 그러하다.’

 

’(진리)이란 일이지 말이 아니다.

가장 확실한 진리는 손으로서 접촉(touch)한 진리이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는 종생 진리를 해득하지 못하고 끝마친다.

 

칼라일(983역주)은 말하기를 produce, produce(생산하라, 생산하라).

 

생산하지 않고서, 적어도 성실하게 생산하려 노력하지 않고서, 진리는 알지 못한다.

 

자기의 약함을 표방하여 실행을 피하는 자는 진리를 해득치 못할 뿐이다.

독서 또는 청강으로서 진리 파악의 유일한 길로 하는 자는, 종생 진리를 파악치 못하고 끝마친다.

 

예수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만약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따르면(행한다면),

이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인지, 또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인지 알 것이다’(요한복음 7:17)라고.

 

그리스도교를 스스로 증거 세우는 유일한 길은 이것을 행하는데 있다.

행하다, 반드시 완전하게 실현한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는 여기서 내가 너희에게 전한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체현치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치신 것은 아니다.

 

행하는 자이지, ‘행한 자는 아니다.

행하기를 주안(主眼)으로 하고, 목적으로 하고 노력하며, 또 습관적으로 하는 자이다.

 

즉 신앙을 언어적으로 또는 사상적으로 해석하려는 자에 대하여 실행적으로 해석하려는 자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한 자는 참으로 그의 가르치심을 해득하고 또 이것을 실행할 수 있고, 혹은 실행하는 힘이 주어지며, 그리고 마침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치신 것이다.

 

독서가 또는 변론가 또는 선언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착실한 실행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치신 것이다. 그리고 사실 그대로이다.

 

언표(말로 나타내는 일) 반드시 무효는 아니다. 예수의 이름 그것에 크신 능력이 따른다.

불신자도 사이비 신자도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가르치심을 전하여 많은 선사(善事)를 할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를 속이고 또 남을 속이는 것이다.

새는 자신도 모르게 종자(種子) 전파의 기계로 된다.

사이비 신자도 또 자기는 구원받지 못하면서 타인을 구원하기 위한 기계로 될 수가 있다.

 

예수의 이름은 우아하다. 그 복음은 아름답다.

우리들은 단지 미적관념에 잡혀서도 상당히 좋은 전도자 될 수가 있다.

하지만 사람은 그 미적 관념에 의해 구원되지 못한다. 미의 실행 즉 영성의 미화에 의해 구원된다.

 

골드스미드가 말한 대로 Beautiful is that beautiful does,

(아름다움을 행하는 자가 곧 아름다움이다)이다.

 

사람을 가르치고 자신은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한다’(고린도전서 9:27)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가 사람에게 복음을 말하면서

자기는 구원될 수 없는 입장에 설 위험이 있다.

 

많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그날 내게 말하여 로 읽을 것이다.

 

최후의 심판 날에 있어서, 그러한 사람은 많을 것이라는 것이다.

 

언표적 신자는 많을 것이다.

실행적 신자는 적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오늘이라 해도, 신자라는 신자, 교회라는 교회, 그리스도교국이라는 그리스도교국은, 그 거의는 언표자이고 실행자는 아니다.

 

그리스도 신성론, 성서신언설 등은 그들에 의해 시끄럽게 또 열심히 말해지지 만도,

일조실행이라는 경우에는 그들의 다수는 불신자와 다름없다.

 

옳다, 때로 불신자 이하로 내려지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명백하게 전쟁의 때에 나타난다.

그때에, 산상의 수훈도 있으나 마나이다.

 

미국에 있어서는 평화를 부르짖는 목사는 신자에게 집을 소실 당하고, 혹은 교외로 끌려 나가 나무에 묶이었다.

적을 사랑하는 것이 문제 아니다. 적을 증오하지 않는 자는 크리스천이 아닌 것처럼 생각되었다.

 

실로 많을 것이다이다.

 

그들은 외국에 전도하지만 철새가 무의식으로 종자의 파종(sowing)를 하듯, 이교의 백성을 가르치고 자신은 버려지는 것이다.

 

최후에 심판이 온다. 그리고 심판하시는 이는 예수 자신이시다.

 

대저 아버지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고, 심판은 모두 아들에게 맡기셨다’(요한복음 5:22)

그는 말씀하셨다.

 

예수는 자신이 인류 최후의 심판 주이심을 조금도 의심치 않으셨다.

 

인자가 모든 천사(사자)를 거느리고 오는 때는, 그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 ’ (마태복음 25:31이하)라고.

 

그는 후에 말씀하셨다. 이는 사람인 교사가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들은 물론 예수를 인류의 심판자로서만 보지 않는다.

그는 구주요, 위로주요, 또 보혜사(도움의 주)이시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가 심판주이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에게 이 두려워할 방면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은혜의 말씀이 깊이 청중의 마음에 스미어 들었던 것이다.

 

예수는 자비 일변의 아미타(2209역주)가 아니다.

그에게 어린양의 진노가 있었다.

 

산상의 수훈은 예수의 이 방면을 보여주지 않고서는 마치지 않았다.

축복의 말씀으로서 시작한 이 대설교는 대심판의 예고로써 끝났다.

 

우리가, 주를 두려워 할 줄 알기 때문에, 사람에게 권한다’(고린도후서 5:11)고 바울은 말했다.

 

예수도 또한 자신을 두려워할 분이심을 알기 때문에 이 교훈을 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심판은 혹은 물로서 혹은 불로서 임한다.

물은 부수고 불은 사른다. 처음에 도괴(collapse)의 심판 있고, 나중에 신멸의 심판이 임하는 것이다.

 

하지만 물이라 하고 불이라 하여, 특히 물질적인 물 또는 불을 가리켜 말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래의 일에 관하여서 예수는 표호(Symbol)로서 가르치셨다.

또 표호로서 하는 길 외에 길이 없는 것이다.

 

별세계의 일을 말하는데 있어서,

누구나 이 세계의 일로서 말하는 외에 달리 길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표호는 상상은 아니다. 확실한 사실이다. 다만 말로 나타내는데, 말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의 사실로서 나타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표호이다.

 

예수의 최초의 설에 있어서 이미 이 종류의 말을 보는 것이다.

 

비가 내리고 큰물이 나서

 

적절하게 소아시아, 시리아 지방의 기상을 이야기한 말씀이다. 사실 그대로라는 것이다.

건축도 농업도 모두 이 사실을 기초하여 행해진다고 한다.

예수는 표호를 쓰시고 있는 동안에도 사실을 말씀함에 있어서도 정밀하셨다.

 

심판은 반드시 온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 받을 이가 아니시다’(6:7)라고 있다.

 

그때, 언표 또는 사색에 의해 얻은 신념은 소용이 못 된다.

다만 사랑에 의해 역사()하는 바의 신앙만 유익 있을 뿐이다.

 

물론 외면에 나타난 행위가 구한다는 것은 아니다.

선한 행위를 낳는 것 같은 신앙이 구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신앙은, 독서하여, 묵상하여, 사색하여, 얻어지는 것 아니다.

행하여 보고 얻어지는 것이다.

 

사람은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앙에 의해 의롭다 함을 얻는 신앙은,

전심전력으로 행하고자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로 부터 받는 신앙이다.

 

신앙은 행위의 정수(essence)이다. 사색이 아니고 행위로 출발하여 도달한 영혼의 상태이다.

 

예수는 전도의 처음에 있어서 심판을 선언하셨다.

하지만 선언으로서 그치지 않으셨다. 그는 사람이 심판에 응함의 길을 마련하셨다.

 

그의 생애와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은 모두 사람이 그의 심판을 만나 멸망치 않기 위한 길이었다.

 

예수는 진리인 동시에 길이요, 또 생명이시다.

 

영생에 들어가는 필요조건으로서 완전한 행위를 요구하신 그는, 또 이 조건을 채워 요구에 응하심의 길을 마련하셨다.

 

산상의 수훈을 성서의 다른 부분에서 홀로 떼어 읽는 때면 모세의 율법의 보다 엄격한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율법을 세우심은 죄를 증가시키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죄가 더하는 (많은)곳에는 은혜가 더 넘친다’(로마서 5:20)고 있는 대로,

 

보다 엄격한 율법에 응하기 위해 보다 큰 은혜의 길이 예비 된 것이다.

 

하나님의 노하신 음성을 듣고, 우리들은 다만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보다 높은 바위에로 달려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산상의 수훈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읽고, 그럴 때 그 공포는 화하여 장려로 되고, 그 위협의 말씀은 희망의 음성으로 되어 들리게 되는 것이다.

 

훈계는 십자가를 가리키고, 십자가는 훈계를 설명한다.

 

그리고 훈계와 십자가의 사이에 서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친압(familiarity)치 않고,

또 그 노하심에 눌리는 일 없이, 겸비하여 그 은혜를 받고, 감사하면서 그 성지에 따를 수가 있다.

 

*내촌감삼의 갈릴리의 길을 연재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