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거듭난 삶 2024. 7. 18.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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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聖化)의 원리

 

성 경: [6:1-5]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 본절은 본장이 은혜와 죄의 관계를 설명하는 5:20,21 내용을 이어 받고 있음을 나타낸다.

 

(5:20-21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 5장에서 바울이 주장한 내용은 '죄에 거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를 깨닫는 문제'였다.

 

율법을 통하여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죄가 드러나게 됨에 따라, 인간의 회개는 더욱 깊어지며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느끼게 된다.

 

그 당시 이러한 바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죄에 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으며,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자들은 기독교 진리의 깊은 내면을 깨닫지 못하고 다만 '수박 겉핥기'식의 표면적 지식을 가지고 애매하고 오해하기 쉬운 문제에 관심을 쏟는다.

 

여기서 '죄에 거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에피메노멘 테 하마르티아'는 두 가지로 분석된다.

 

첫째, 이 문구가 현재 능동태 가정법을 띤 것은 그 내용이 실현 가능성이 없음을 나타낸다.

 

둘째, 이 문구는 '죄와 더불어 산다'는 의미로 죄와 더불어 전혀 투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러한 상태에 빠진 자들은 자기 욕구 충족을 위해 그리스도를 섬기는 체하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色慾)거리로 바꾸는 자들이다.

 

(1: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사실상 칭의의 교리 자체를 조금이라도 오해한다면 그것은 죄에 대한 저항(抵抗)을 약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전과정이 인간의 행위를 배제시키고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강조하게 됨으로 구원 교리도 역시 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약화시킨다.

 

이러한 이유로 성도는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어 부도덕이 판을 쳐도 교리적으로 그것을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 참조 : (고전 5, 6).

 

 

[6: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는 1절의 가상적인 질문에 대한 단호한 부정의 대답이다.

 

바울은 악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가장하고자 하는 사악한 생각이 매우 모순됨을 경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죄를 허용하는 면허장이 아니라 성도의 의를 회복시키는 특허장이다.

 

한편 바울은 이와 다소 다른 문맥에서 본문과 비슷한 어투로 대적들의 주장을 공박한 바 있다.

 

(3:8-9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9)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바울이 칭의론(稱義論)을 가르치던 당시, 그의 가르침이 율법의 윤리적 요구에 대한 무관심을 조장함으로써 자유방임 사상을 만연시키지나 않을까 하고 우려했던 사람들이 때때로 그러한 종류의 반론을 제기했던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바울의 답변은 짧은 기간에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수년간의 깊은 명상 끝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본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 바울은 이제 성도의 편에서 논증을 전개한다.

죄에 대하여 죽은 성도는 더 이상 죄의 세력에 지배받지 않는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고, 이 속죄로 말미암아 성도는 하나님과 화목(和睦)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만일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에 죄가 더욱 왕성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전도(顚倒)시키는 행위이다(Calvin).

 

혹자는 본절의 '죄에 대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 하마르티아'

'죄로 인하여'(on account of sin)로 해석한다(Michaelis, Cramer, Storr, Flatt, Nitzsch).

그러나 이는 타당하지 않다. 그러한 해석은 본절의 문맥상 바울이 의도하는 주장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죄로 인하여 죽었다'함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고 죄와 더불어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요,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악된 삶을 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交通)하는 삶을 산다는 의미인 것이다.

 

한편 바울은 본절에서 처럼 성도가 '죽었다'는 선포를 종종한다.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2: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2:20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이러한 성도의 죽음은 죄에 대한 죽음이요, 율법에 대한 죽음인데 실제적으로 죄의 종이었던 우리 옛 사람의 죽음이다.

이에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2;20)라고 고백했다.

 

이와 같은 체험적 고백이야 말로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와 동시성을 갖는 것이다.

 

성도가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의 신분을 갖고 있으면서, 또 죄에게 종노릇 한다는 것은 분명히 모순이다.

그러나 여기서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해서 죄의 세력을 전혀 의식하지 않게 되거나 죄를 결코 범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7장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죄와 투쟁하게 된다는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의 세력권을 벗어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가 초래하는 엄청난 불행들에 대하여 죽었으며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이다.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16-17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바울은 여기서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을 침례받음과 결부시키고 있다.

 

여기에 언급된 침례는 단순한 의식(儀式)이나 성례전(聖禮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는 은유적 의미를 갖는다.

 

례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은 다른 구절에서도 본절과 비슷한 연관성을 지닌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예컨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것을 계기로 모세에게 속하여 례를 받게 된 경우가 그러하다.

 

(고전 10: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

 

그들은 처음으로 모세와 연합하였고, 모세의 지도권을 인정하였으며, 또한 그들이 모세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스도께 속하여 례를 받는다는 것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함께 죽었다는 의미이며, 함께 죽었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죽었음을 의미한다.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와, 죄에 종 노릇하던 옛사람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성도들이 그의 죽으심에 례 받아 연합되었다는 것은 성도들 역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의미이다.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더불어 함께 죽은 자된 성도들은 죄에 종노릇하던 옛사람이 죽었으므로 계속 죄에서 종노릇하는 신분에 머물려고 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 이 접속사는 1-3절까지의 진술에 대한 결론을 유도해 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1-3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특히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례를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도 연합한 자들이라는 3절의 진술을 본절에서 더욱 진전시키고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함께 장사되었나니 - 바울은 례를 받을 때 물속에 몸을 잠그는 일을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葬事)되는 일로 묘사하였다.

 

여기서 '장사된다'(쉬네타페멘)함은 자연적인 출생으로 맺어지는 아담과의 관계에 의해 지배되던 옛사람의 종말을 상징한다.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3: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즉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활을 하기 이전의 거듭나지 못한 본성과 행동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의미한다.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2 너희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 어떤 사람들은 '영광''장엄한 권능'으로 해석한다.

(Hendriksen, Harrison, Barmby, Calvin, Black, Phillips, Erdman, Stott).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속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심'(Omnipotence)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란 용어를 '하나님의 장엄한 권능' 정도로 해석하는 것은 '영광'이란 단어가 지닌 의미를 만족스럽게 드러내었다고 볼 수 없다.

 

본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가 새 생명 가운데 사는 것에 대한 수단으로 언급하고 있다.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이 '죄와 옛 사람에 대하여 죽는 것'만이 아니라 나아가 '새 생명 가운데 사는 것'까지 포함됨을 가르치고 있다.

 

이 말은 성도가 단순히 죄의 영역에서 벗어난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의()의 영역에서 살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과(10:10) 잘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는 말은 '새 생명의 원리에 의해 지배를 받으며 그 가운데서 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 이는 이미 바울이 앞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성도가 침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었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Hendriksen, Barmby).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 '되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소메다'가 미래 시제인 것은(shall be, KJV) 본절에서 바울이 장래에 일어날 성도들의 신체상의 부활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은 생각한다(Tertullian, Chrysostom, Ambrosiaster).

 

그러나 심사숙고해야 할 사항은 바로 앞절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의 부활이 몸의 부활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가 부활했던 것과 똑같이 우리도 그렇게 부활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에게 속한 자들에게 허락되는 새 사람(죄와 옛 사람을 장사지낸)과 연관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