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거듭난 삶 2024. 7. 17.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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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그리스도 3

 

성 경: [5:19-21]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본절은 앞절 내용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앞절에서 바울은 일반적으로 범죄와 의를 대조시켰으나, 본절에서는 그 범죄와 의의 본질적 성격을 설명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 대한 아담의 범죄는 그 자신의 자발적인 불순종에 그 뿌리가 있으며 그리스도의 의는 하나님께 대한 그분의 자발적이고 절대적인 복종에 근거한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 아담의 범죄, 곧 원죄(原罪)를 말한다. 아담이 범죄한 내용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이다.

 

에덴 동산의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아담이 거스린 것은, 순간적이요 단순하게 보일지 모르나 이는 창조주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고자 마음먹었던 교만한 행위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의 행위였다.

 

(3:1-6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 12절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선포했으나 15절에서는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진술했으며,

18절에서는 다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다'고 선언했다.

 

한편 '죄인된 것같이'에서 '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스타데산'은 단순 과거 수동형으로 '제정되었다', '설립되었다'는 의미이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 '순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바울은 죄인된 것을 불순종에 대한 인간의 책임과 연관 짓고 있다.

 

'순종'이라는 용어에는 인간의 책임 문제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3:18-19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19)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4:2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6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무엇보다 '순종'이라는 단어는 '아담의 불순종''그리스도의 순종',

 

(53: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6:38-39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10:17-18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17:4-5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2:7-8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5:8-9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특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순종'에 대한 대조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Murray).

 

그리고 성도의 순종은 그리스도의 순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데,

 

(5:8-9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자'에게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결과를 아무 대가 없이 은혜로 주시기 때문이다.

 

한편 '의인이 되리라'에서 '되리라'로 번역된 헬라어는 미래 수동형으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제정(制定)될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혹자는 이 단어가 미래 시제임을 생각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성도들이 받을 영광을 언급하고 있다고 말한다(Meyer).

 

그러나 이보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과거와 현재 및 장래를 포함하는 모든 시대에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무난하리라고 본다(Murray, Sanday).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헬라어 성경 본문에는 본절 초두에 ''가 언급되고 있으나 한글 개역 성경은 이 접속사를 번역하지 않았다.

 

KJV는 이를 '더욱이'(Moreover)로 번역하고 있다.

 

아무튼 ''는 본절에서 새로운 개념, '율법'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고 유도된 것이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 본 구절은 인간에게 모세 율법이 부여 되었음을 말하나 이는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이 최초로 사람들에게 주어진 법이 아니라 그 이전에 법이 선재(先在) 함을 나타낸다.

 

이는 '가입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레이셀덴'이 단지 '들어왔다'라기보다는 '곁에 들어오다'(came in beside, Green), '미끄러져 들어오다'(slipped in, Modern Language Bible)를 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모세 이전 아브라함이나 야곱 등과 같은 족장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믿음의 길을 걸었고 모세 시대에는 성문화된 율법이 부여된 것이다.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 이 말은 율법이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죄를 짓도록 동기를 유발시켰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죄를 증가시켰다는 말이 된다.

 

헨드릭슨(Hendriksen)은 본 구절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증가하게 만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사랑의 요구에 비추어 보아 인간으로 하여금 죄의식에 예민해지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었음을 의미한다.

 

(22:37-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12:29-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10: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율법은 모든 죄의 가증함과 그 결과가 드러나도록 한다.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또한 혹자는 "범죄를 더하게 하는 것은 율법의 우선적인 목적이 아니라 부차적인 목적이다"라고 설명한다(Black). 이러한 주장에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동의한다.

 

바울의 의도는 무엇보다 율법이 옴으로써 그 전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던 것을 확실히 죄로 인식하게 되었다(13)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었다.

 

혹자는 딤전 1:9-11을 본절과 연관지어 율법이 죄를 억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Herrison).

 

(딤전 1:9-11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10)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

11)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

 

그러나 분명히 성도들이 인식해야 할 사실은 율법 자체가 죄를 억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딤전 1:9-11에서는 이러한 암시가 전혀 없다.

오히려 딤전 1:9-11은 율법의 정죄 기능, 즉 사람이 자신의 행위가 옳은가 그렇지 않은가를

율법을 통해서 정죄 받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 이 말은 율법이 주어짐으로써 범죄의 사실이 더욱더 드러나 인간이 깊은 정죄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면 될수록 인간을 향해 쏟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더욱 풍성하게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바꾸어 생각하면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곳에서는 죄사함도 없으므로 용서에 대한 은혜를 깨닫는 일도 없다.

 

다만 죄가 죄로서 정죄되는 곳에서는 그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더욱 풍성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사실은 '죄가 더한 곳에''더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플레오나센''넘치다'라는 의미를 지니며, 반면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더욱 넘쳤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레페릿슈센'이 최상급의 최상급, 즉 강조 최상급으로 '넘침보다도 더욱 넘쳤다'는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Murray).

 

다시 말해 은혜의 세력은 죄의 세력을 휠씬 능가할 뿐만 아니라 완전히 말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상처입고 병들어 죽어가는 자를 완전히 소생케 한다.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본절에는 바울이 그동안 논의해 왔던 중요한 개념들이(, 사망, 왕노릇, 은혜, , 예수 그리스도, 영생) 종합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을 '너무도 아름다운 끝맺음'이라고 극찬하였고(Hendriksen), 송영과 같은 가치를 지녔다고 말하기도 했다(Denney).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같이 - '사망 안에서'란 표현은 '생명 안에서'(17절 하반절)란 표현과는 정반대의 개념으로서 죄가 역사하는 한계를 의미한다.

 

죄의 결과로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다.

 

(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따라서 죄는 '사망 선고를 받은 자들', '사망의 세력 아래에 있는 자들'에 한해서 왕 노릇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의(稱義)의 은혜를 받은 자들에게는 결코 죄가 왕 노릇할 수 없다(Lloyd Jones).

 

바울은 6장에서 이것을 '죄의 종''의의 종'의 개념으로 대조시켜 설명하고 있다.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 앞 구절과 완전한 대조를 이루기 위해서 본 구절의 '왕 노릇하여' 앞에 '생명 안에서'라는 말을 삽입시켜 이해하면 된다.

 

이와 같은 대조를 통해서 우리는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

'사망 안에서 종 노릇하는 사람',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사람'(17)이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분명한 구분은 예수의 말씀 중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5:24)라는 선포 가운데 가장 잘 나타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