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의 원리 2
성 경: [롬 6:6-11]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 우리가 알거니와 - 여기서 '우리'는 바울과 유대인이 아니라 바울 자신과 그의 복음을 들은 자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그의 복음을 들은 자들을 단순히 로마에 있는 성도들만으로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즉 바울은 진술하고자 하는 대상으로 복음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가진 자들 모두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 우리 옛 사람 - 바울은 '사람'을 두 종류로 구분하여 '옛 사람'과 '새 사람'이라고 칭한다.
'옛 사람'은 영적인 죽음 아래서 신음하며
(엡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골 2:13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본질적으로 마음이 악하여 죄에게 종 노릇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에게서 떠난 사람이다.
(6절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 즉 '새 사람'에 대해서 바울은 이미 1:18-3:18에서 자세하게 언급하였다.
'옛 사람'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죄를 지어도 그 죄로 인해 아무런 갈등을 느끼지 않으며, 바람에 밀려다니는 돛단배와 같이 죄의 세력에 따라 이리저리 끌려다닌다.
▶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 이 표현은 3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우리가 침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합하였다는 뜻이다.
동시에 이 말은 우리가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낡은 질서에서 떠나 의와 평안이 있는 새로운 삶의 영역으로 들어갔다는 의미도 된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결국 이 말씀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더 이상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생활하는 삶의 변화를 가리킨다.
(고후 4: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골 2:20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 옛 사람이 죽은 것과 죄의 몸이 멸하는 것은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을 한 사람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한다. 비록 성도가 현재의 삶 속에서 죄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나 신분상으로 이미 죄의 몸은 죽은 상태에 놓여 있다.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건은 반복적인 사건이 아니라 성도에게 단 일회적인(once for all)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고 권면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
(엡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생명을 소유하게 되는 연합의 체험으로 '거룩한 백성'으로 불릴 수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성도의 현재적 삶은 항상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 속에 머무르고 있다.
이에 바울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고 권면했던 것이다.
이 권면은 한 마디로 신분에 걸맞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라는 의미가 된다.
[롬 6: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 여기서 하나의 난제(難題)가 있다.
'죽은 자'가 그리스도를 지칭하는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믿고 그와 함께 십자가의 죽음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비록 본절이 단수로 언급되었으나 그리스도가 죄에서 벗어날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는 본 구절이 일종의 일반 명제로서 할라카(Halakah)에 언급된 랍비적 가르침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이 유명한 유대인 교법사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받았고,(행 22:3) 랍비의 지식과 유대인 전통에 정통(正統)했던 점을 미루어 보아 본절이 어떤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기보다는 일반적인 명제로 언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베드로도 일반 명제 형식을 빌어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벧전 4;1)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실제적인 예로 스코틀랜드에서는 사형 집행을 받은 사람은 '의롭게 되었다'고 선언한다고 한다.
한편 '죽은 자'와 연관해서 혹자는 '성도'는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이미 죽으신 그리스도와 같이 성도는 모든 죄와의 관계에 있어서 죽었으므로 죄에 대해 무감각한 상태에 있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Vaughan, Liddon).
그러나 그리스도나 성도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의 세력, 죄의 영역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 본절은 칭의의 순서적 과정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죄 씻음이 이루어짐을 믿고 회개하는 자에게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이 이루어지고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다.
칼빈(John Calvin)은 본절이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고 지적하면서, 재판관의 판결로 사면(赦免)을 받은 죄수가 그 순간 기소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듯이 성도가 죄의 노예 상태에서 자유의 몸이 되는 것도 매우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하였다.
[롬 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본절은 내용상으로는 3절과 5절의 내용을 반복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이 인격적이고 생명적인 연합일 뿐 아니라 영원한 연합임을 보여주고 있다(Murray).
▶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3절에 언급된 바,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써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이 여기서 다시 이 말씀을 반복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성화(聖化)의 생활이 부과됨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 여기서 '살 줄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제소멘'은 1인칭 복수 미래형으로서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우리가 살 것이다'(we shall live; KJV)이다.
이는 5절 주석에서 언급한 것처럼 단순히 장래적인 소망, 곧 부활의 소망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한 성도는 또한 그리스도의 살으심과 연합하여 반드시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예하게 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곧 성도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 생명을 얻게 되었으니, 이 땅에서 소유케 된 생명(조에)은 장래에 일어날 구속 사건의 모든 결과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쉰제소멘'은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시 일어날 성도의 부활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은 성도가 이 땅에서 영원한 나라의 생명을 소유하며 산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의 재림시 부활 생명과 긴밀한 연관을 맺는다.
한편 본절에 '믿노니'로 번역된 헬라어 '피스튜오멘'은 1인칭 복수 현재 직설법으로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확실성 있는 견고한 믿음을 가리킨다. 이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정(情)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성도는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함을 나타낸다.
[롬 6: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케티'는 '절대로∼아니다'는 의미로서 부정을 나타내는 헬라어 단어로서는 가장 강력한 의미를 내포한다.
이러한 의미를 살려 KJV는 '우케티'를 '더 이상∼않다'(no more)로 번역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은 자의적(自意的)이며 절대적인 일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아무런 흠과 티가 없으셨으나 인류 구원을 위한 성업(聖業)을 이루시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고 또다시 살아나셨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타의에 의해 죽으시고 살아나셨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도, 능력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죽지 아니하시는', 즉 '결코 죽지 아니하시는'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의 보장이 되신다.
▶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신 후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망이 그를 주장한다면 성도의 신앙은 진실로 헛된 것을 좇는 꼴이 될 것이다.
(고전 15:12-17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으나 부활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이기신 사건에 있다.
이 사건이 참이어야만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의 연합을 하여 살게 된다는 확신이 참이 될 수 있다.
사망이 그리스도를 주장하지 못한다면 그와 연합한 자들에게도 역시 주장하지 못한다.
이러한 주장이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일반 명제에 대한 근거가 된다.
한편 본절이 자칫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었다는 어감을 줄 수 있다.
본래 그리스도의 신성 자체는 결코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 사망의 세력권 안에서 활동하게 되셨다.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그리고 죄인이 되시어 사망의 원리를 따라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셨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본절에서 이미 그리스도께서 한번 사망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처럼 '다시'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롬 6: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 본절의 '죄에 대하여'(테 하마르티아)란 표현은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자신의 죄로 인한 필연적인 죽음이 아니다.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는 성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짐 지우신 자기 백성의 죄와 허물을 위해 죽으셨다.
(사 53:4-6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또한 본절의 '단번에' (에파팥스)란 표현은 구약의 속죄 제사 규례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구약 시대에는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일 년에 한 번씩 제사를 드렸으며, 백성들은 죄를 범할 때마다 희생 제물을 가져왔으니 그 제사는 반복적이었다.
그러나 대제사장되신 그리스도는 구약 시대에 대제사장들이 반복적(反復的)으로 드려왔던 그 제사 대신 자기 몸을 제물로 바쳐 '오직 한번만'(once for all, RSV) 드림으로써 구약의 제사를 완성하셨다.
(히 7:27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 십자가에 피 흘리신 제사는 구약의 모든 피 제사의 최종적 제사요,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이기에 제사를 또 드리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다시 죽으실 필요가 없다.
▶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 '하나님께 대하여'란 '하나님을 위하여',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해석하는 것이 합당한 듯하다.(Murray, Meyer, Hendriksen).
우선 본절의 '하나님께 대하여'란 표현은 '죄에 대하여'와 대조되어 있다. 따라서 이 문구의 해석은 '죄에 대하여'란 표현에 대한 해석과 문맥적 일치를 요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하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권고한 12-14절 내용과도 조화된다. 뿐만 아니라 바울 사도는 그의 서신에서 여러 차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함을 강조한 바있다.
(3: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본절에 대해 스토트(John Stott)는 다음과 같이 매우 논리적이면서 간략하게 설명했다.
"만약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죄에 대한 죽으심이었으면, 그의 살으심이 하나님에 대해 살으심이고, 그리고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살으심 안에서 그와 연합되었다면, 우리 자신은 죄에 대하여는 죽었으며(have deied)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았다(have risen). 그리고 우리는 그와 같이 여겨야 한다."
▶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 2절 주석에서 언급했듯이 죄의 세력으로부터 놓임을 받아 자유를 누림을 말한다.
칼빈(Calvin)은 이에 대해 말하기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성도는 영적 자유를 얻은 만큼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않기 위해 날마다 육체의 소욕(所欲)을 제어하는 성화의 삶을 살도록 분투해야 한다. 이것은 죄에서 완전히 끊어져 거룩함과 의 가운데 온전히 거할 때까지 해야 한다"고 하였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본절에서 이 문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와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라는 전 후의 문구에 동일하게 연결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떠나서는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생각할 수 없고 생명의 부활도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커다란 건축물의 초석(礎石)과도 같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바울은 이 표현을 그의 서신에서 자주 사용하였던 바, 성도와 그리스도간의 관계성을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 여길지어다 - 즉 성도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어진 사건은 성도들을 그러한 신분으로 만든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다'는 말은 실재가 아닌 사건을 실재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실재적인 사건을 파악하여 그것을 굳게 붙잡는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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