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거듭난 삶 2024. 7. 31.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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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과 인내

 

성 경: [8:18-25]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현재의 고난 - 이는 무엇보다도 성도가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23b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따라서 이 고난은 마음의 법과 죄의 법이 투쟁함으로써 성도에게 찾아오는 비참한 경험과도 연관이 있다.

 

이로 보아 바울은 성도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신분을 가지고 있으나, 현재의 삶 속에서 그 두 법의 투쟁이 죽는 날까지 지속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 여기서 '영광''하나님의 후사'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가 됨으로써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게 된다.

 

이처럼 바울은 성도가 부활의 몸, 곧 영광스러운 몸을 입어,

 

(고전 15:43-44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하나님의 후사가 된다는 사실을,

 

(고전 15: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강조했다.

 

 

[8: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 - 바울은 지금까지 구원의 초점을 인간에게 맞추었으나, 이제는 보다 영역을 넓혀 모든 피조물에게 까지 확장시키고 있다.

 

이것은 장차 있게 될 성도의 영광이 성도들뿐 아니라, 전체 피조물의 회복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다른 피조물조차 악의 지배를 받게 되어 전 우주가 무질서 가운데 빠졌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 본 구절은 성도가 하나님의 후사로서 자기의 위치를 회복하는 것과, 피조물의 회복이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더욱 분명하게 시사해 주고 있다.

 

즉 피조물들조차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기의 영광을 회복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은

 

(1) 인간의 타락과 함께 피조물들도 그 타락의 영향권에 들게 되었고

(2) 하나님 자녀가 그 영광을 회복함으로써 피조물들도 그 영광에 동참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Hendriksen).

 

 

[8: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 인간의 타락은 자기 자신만 허무(虛無)한 데로 이끈 것이 아니라, 그의 지배 하에 있던 다른 모든 피조물까지 허무하게 만들었다.

 

전도서의 저자는 이러한 허무를 매우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1:1-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5)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8)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10)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11)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2:11-23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12) 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 왕의 뒤에 오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할꼬 행한지 오랜 일일 뿐이리라

13) 내가 보건대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두움보다 뛰어남 같도다

14) 지혜자는 눈이 밝고 우매자는 어두움에 다니거니와 이들의 당하는 일이 일반인 줄을 내가 깨닫고

15) 심중에 이르기를 우매자의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16)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17)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한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이로다

18) 내가 해 아래서 나의 수고한 모든 수고를 한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자에게 끼치게 됨이라

19)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서 내 지혜를 나타내어 수고한 모든 결과를 저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

20) 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서 수고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도리어 마음으로 실망케 하였도다

21)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써서 수고하였어도 그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업으로 끼치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라 큰 해로다

22)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23)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피조물은 스스로 허무한 데 굴복하지 않았고 인간의 타락에 동참하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저주하는 가운데 피조물도 인간과 함께 허무한 데 굴복하도록 명하셨다.

 

(3:17-18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이러한 사실은 본절의 '굴복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타게'가 제 2단순 과거 수동태로서 '굴복을 당하였다'는 의미를 지닌 점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was made subject, KJV).

 

한편 이러한 현상은 만물의 지배자인 인간이 타락하여 그 지배권을 사단에게 빼앗기게 됨으로써 발생케 되는 필연적인 것이기도 하다.

 

즉 만물의 대표자인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당하는 허무를 그 인간에 종속된 피조물도 함께 당하게 된 것이다.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 피조물들은 각기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따라 자기에게 부여된 임무에 순종한다.

 

피조물들이 비록 이 세상에서 덧없이 사라지고 부패해 갈지라도 이와같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온전히 회복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궁극적으로 이 땅에 도래하기를 바라는 '희망에서'(에프 헬피디)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때에 그들도 썩지 않는 영광을 함께 얻게 되기 때문이다.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바울은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 15:40-41)라고 진술했다.

 

이와 같이 각 피조물이 각기 다른 영광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인간의 타락과 함께 그 영광들이 허무한 데 굴복하게 되어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게 되었다.

 

혹자는 본 구절의 '피조물'이 전() 우주와 관계된 것이 아니라 인간만을 언급한 것이라고 주장한다(E. Brunner).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22절과 23절에 의해 부정된다.

 

(22-23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그리고 바울의 진술대로 각 피조물은 각기 고유한 영광을 지니고 있으나

 

(고전 15:40-41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인간과 대립된 관계에 놓여지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허무하고 썩어질 것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지위를 다시 회복하게 될 때 전 우주는 본래의 질서를 회복하게 될 것이며 피조물들도 각기 자기의 영광된 위치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 바울은 피조물이 자기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 그들의 힘으로 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과 관계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든 죄와 불의에서 하나님의 절대 자유, 즉 구원과 영생의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 또한 그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 계획에 의해 이루어지게 됨을 시사하고 있다.

 

한편 본절의 내용은 19절에서 22절까지가 피조물의 회복 자체를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자기의 영광을 회복해야 한다는 사실에 강조점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19-22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피조물의 회복은 성도의 영광의 회복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과정이 완성될 때에 다음과 같은 사 11:6-9의 예언이 완성될 것이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선지자의 이 예언은 태초의 에덴동산의 회복을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실제로 앞으로 회복될 영광은 이러한 에덴동산의 영광보다 더욱 뛰어날 것이다. (P. Robertson).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 - 바울은 인간이 본래의 영광과 자유를 회복해야 할 필연성을 피조물이 그 일을 위해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과 비교하고 있다.

 

다시 말해 피조물조차도 영광의 회복을 위해 탄식하며 신음하고 있는데, 하물며 인간이 자신의 회복을 위해 탄식하며 신음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역설적 표현이 본절에 깊이 암시되어 있다.

 

바울은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인간이 자기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 얼마나 절실한 범우주적인 요구인가를 깨우쳐 주고 있다.

 

한편 본절의 '이제까지'(아크리 투 뉜)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인간이 저주와 고통을 받았으며, 이 저주와 고통이 주의 재림 시까지 현재적으로 계속될 것임을 암시한다고 보아야 한다(Murray, Meyer).

 

 

[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 성도 자신이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라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는 오직 그리스도이시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다만 성도는 처음 익은 열매되신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그러면 '처음 익은 열매'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세가지 견해로 요약될 수 있다.

 

(1) '성령의 보증', 곧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성도의 '출생증명서'라는 견해와, (Kasemann, James Dunn)

 

(2) 성도가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누릴 완전한 후사에 대한 서약이라는 주장(Hodge),

그리고

 

(3) 중생의 체험을 한 성도가 몸의 부활을 하게 될 것뿐만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모든 선물을 가리킨다는 견해(Godet, Philippi) 등이 그것이다.

 

세 가지 견해가 모두 일견 타당하나 마지막 견해가 더욱 구체적이고 지배적이다.

 

한편 '처음 익은 열매'(아파르켄)를 받는 대상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사도 시대처럼 이적과 기사와 각양 은사를 체험한 깊은 신앙을 소유한 일부 성도에게 적용된다(Reiche, Erasmus, de Wette).

 

(2) 오순절 성령의 체험을 맛본 초대 교회 성도들뿐만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중생의 체험을 한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된다(Meuer, Calvin, Bengel, Keil).

 

이중에서 후자의 견해가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 성도는 구원의 은혜로 의롭게 되어 거룩함을 입은 자이나 예수께서 만유(萬有)를 회복하실 때를 기다리는 자다.

 

(3:2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성도의 몸 안에서 투쟁하고 있다.

다만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죄인을 해방시켰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 '몸의 구속'(球贖)을 기다리며 산다.

 

이렇게 될 때 성도는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두 법의 투쟁에 의해 빚어지는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 성도는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소망을 가지고 산다.

 

이 소망은 믿음 없이는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기에 구원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소망을 성도에게서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은 오직 믿음뿐이다.

 

이런 점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표현이나,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표현은 결국 같은 의미이다.

 

한편 본절에 '구원을 얻었으매'로 번역된 헬라어 '에소데멘'은 과거 시제로서 성도가 구원을 얻은 것이 이미 종결되었음을 의미한다.

 

중생의 체험으로 죄의 종에서 해방된 성도는 이 땅에서 장차 도래할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지만, 이미 성령의 인()치심으로 하나님의 권속(眷屬)의 반열에 들게 된 것이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 본 구절은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씀과 잘 조화된다.

 

성도는 믿음으로 자기가 이미 구원받은 자임을 확신한다.

비록 완전한 구원이 아직 실체로 나타나 있지 않으나 믿음으로 그 실체(實體)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며 그 실체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이처럼 현실 세계에서 장차 이루어질 소망을 믿고 바라게 하는 기독교의 진리는 '보이는 물질만이 실상이요 믿을 것'이라고 하는 유물론(唯物論)과 명백히 구별되는 것이다.

 

 

[8: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만일 - 바울이 이 접속사를 사용한 것은 성도가 마땅히 받았어야만 하는 것을 받지 못한 사실을 지적하기 위함이 아니라, 성도가 이미 받았으나 그 실체가 손에 잡힌 바 되듯이 완성될 때까지 소망 가운데 있어야 함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 성도는 성령에 의해 양자의 보증(保證)과 구원의 보증을 동시에 얻었다. 그러나 아직 탄식하면서 양자될 것 곧 몸의 구속을 기다려야 한다.

 

옛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이미 죽었으나 아직 완전한 구원은 완성되지 못했기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이는 성도가 성령의 법과 죄의 법의 투쟁에서 비롯된 갈등을 겪지만 이를 극복하고 그리스도께서 이미 성취하신 자유에 대한 기쁨과 감격 가운데서 살아야 할 것에 대한 권면이다.

 

더불어 바울은 성도가 소망 가운데서 기다리는 것이 '참음으로'(디 휘포모네스) 이루어짐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진리를 위해 사는 성도의 삶에는 갖은 환난과 역경이 수반되므로 여기에는 오래 참는 인내가 요구된다.

 

인내하는 목적은 성도의 소망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궁극적으로 성취된다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