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재림의 욕구
로마서의 제8장은 그리스도교를 수축한 것이다.
만약 성서가 금 반지(斑指) 랄것인가, 로마서는 그 보석으로서,
그 제8장은 보석의 첨두 이다.
그러므로 이 짧은 1장 중에 우주 인생에 관한 가장 중요한 진리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실로 그 14∼23절 같은 것은 확실히 그러하다.
이 수(數)절은, 우주의 희망과 인류의 희망 두 가지 모두, 이것을 간단명료한 말로서 보인 것이다.
14절에 말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는 이는 곧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인도’라고 하면, 본래 외계에서의 인도를 의미한다. 그런데 그 다음 절에 이르러 다시 말한다.
‘너희가 받은 영은, 종된 자 같이 다시 두려움을 가지는 영이 아니다.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아들 된 자의 영이다’라고.
따라서 안다, 외계에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영은 또 우리 신자 심령 내에 계셔서, 우리로 하여금 아들이 되게 하는 영이시라는 것을.
즉 외적인 영의 인도를 받음과 함께 또 내적인 영을 받은 자, 이는 바울이 그리스도 신자에 대하여 내린 정의이다. 그리고 그는 다시 말한다.
‘성령 친히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한다’(16)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임의 증거는 밖에 있고 또 안에 있다.
신자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로 된 사실을, 그 생애에 임한 기이한 섭리와 합쳐서, 자기의 영으로 느끼는 하나님의 영의 실험(체험)에 의해 아는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바울은 다시 나아가 말한다,
‘우리가 만약 아들이라면, 또 후자(상속자)일 것이다’(17)라고.
즉, 이어받을 무엇인가를 가진 자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들로 인정하는 것 만으로서는 부족하고, 우리도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는 것만으로서는 족하지 못하다.
아들로 되는 데는 그 실증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거기에는 상응의 은사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이 그 아들에게 향하여 너는 내 아들이라고 하고, 아들은 부모(어버이)에 향하여 나도 당신의 아들이라 한 대도, 그것이 과연 아들이기 위해서는, 그 증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또 후사일 것이다. 반드시 무엇을 상속받을 것이다’라는 바울의 말은 실로 적당하다.
‘즉 하나님의 후사(상속자)로서, 그리스도가 함께 후사된 자이다’(17)라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후사(상속자)로서 받아야 할 것, 그것이 또 우리가 받아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물려주는데 있어서, 반드시 부모 상응의 것으로서 한다.
부호라면 부호 알맞게, 빈자라면 빈자 알맞게, 그 소유와 위지의 정도에 따라 물려 줄 것을 주는 것이다. 부모(어버이)가 그 아들을 자기 아들로서 인정함의 증거는 여기에 있다.
그같이, 하나님도 하나님 상응의 것으로서, 그 아들에게 주시는 것으로써, 하나님께서 참으로 우리의 아버지인 증거로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는가? 문제는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을 주셨다고 해도, 영만으로는 족하지 못하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됨의 증명을 한다 해도, 영 그것은 아직 그것으로서 사자의 받아야 할 은사(선물)의 전부로 하기에 족하지 못하다.
당초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게 주시는 유산은 무엇인가? 바울은 여기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곧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특히 문제를 바꾸어, 잠시 천지 만물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대저 수조물(피조물)의 간절한(깊은) 소망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19이하)라고.
수조물이란, 오늘의 말로서 이것을 말하면, 우주 또는 천지 만물이다. 그리고 바울은 말한다.
‘천지만물은 현재에 있어서는 패괴의 종이다’라고.
또 말한다, ‘천지만물은 현재에 있어서는 이르기까지 인류와 함께 탄식하며 또 고통한다’고.
즉 천연 그것이 매우 불완전한 것으로서, 그러나 그 완전에 달하기를 깊이 대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천연을 관찰한 자는 모두 이 결론에 달하지 않을 수 없다.
보통, 사물의 이상은 이것을 자연에서 취한다. 인공은 불완전하다, 천연은 완전하다고 한다.
실로 솔로몬의 영화의 지극함도 들의 꽃 한 송이의 장식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천연 그것이 실은 아주 불완전함을 면치 못한다.
보라, 대망 일년에 겨우 꽃봉오리를 터뜨린(피어나) 벗 꽃은 사흘도 못 보는 동안에 곧 흩날려 없어지는 것이다.
사람의 가정 같은 것, 또 이것을 천연의 현상으로서 볼 때, 그 쾌락은 잠시이고 비애 곧 이에 임하기 쉬운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름다운 산야 사이에 독초가 있고, 독사 있고, 독충 있고, 또 사람의 건강과 생명을 빼앗는 세균 있고, 동물계에 있어서의 생존경쟁 있다.
천연 그것이 패괴의 노예로서 극히 불완전한 것임은, 누구나가 인정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바울이 말한 바는 문자대로 진리이다.
천연(天然)은 불완전하다. 하지만 불완전함은 다만 천연뿐인가?
아니, 인류전체도 역시 불완전 하다. 뿐만 아니라, 신자 그것도 또한 불완전하다.
불완전한 인류 있고, 그리고 불완전한 천연 있어, 그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듯, 이것도 또한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
인류와 천연, 신자와 만물, 그 불완전한 상태를 함께 하고, 그 비탄과 노고를 함께 하며, 그 종국의 희망을 함께 한다.
이것은 그의 현현을 기다리고, 저것은 이것의 완성을 바란다.
그것은 과연 무엇을 나타내 보이는가?
이르기를, 인류의 완성됨과 동시에 천연도 완성되고, 그리하여 그 완성된 천지만물이 완성된 인류에게 부여되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한다.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우리 모두를 위해 이를 내어 주신 이는, 어찌 그에게 덧붙여 만물도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랴!’(32)고.
옳다, 만물이다. 완성된 우주, 완성된 천지만물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 후사(상속자)가 받아야 할 상속물은 즉 이것이라고 저 바울은 말하는 것이다. 실로 장대한 사상이라고 일컫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처음 맺은 열매를 가진 우리들도, 자기 마음속으로 탄식(신음)하며 아들로 되는 일, 즉 우리 몸이 구원되기를 기다린다’(23)고.
이에 의해 보면, 우리가 영에 있어서 성결케 된 것은 성령의 첫 이삭인데 지나지 않는다.
진실한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이르는 것은, 구원의 결과가 몸에까지 미치는 때이다. 몸 그것이 썩지 않는 것으로 되어 비로소 수확의 때는 오는 것이다. 이는 곧 신자의 완성이다.
그리고 신자가 그처럼 그 구원을 이룸과 동시에, 만물도 그 구원이 성취되어, 여기서 영광의 천연, 완성된 우주가 출현하고,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유산으로서 아들인 신자에게 부여된다고 한다. 그 사상의 웅대하고도 심원함이란, 실로 놀랄 만하다.
바울이 이 글을 쓸 때, 그는 어디에 있었던가? 에베소서인가, 고린도인가 혹은 가이사랴의 뇌옥이었던가.
어쨌거나, 그는 이때는 아주 빈곤한 몸(신세)이었다. 전지는 로마 황제에 속하지 않고, 자기의 소유로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지당하다, 빈한(가난뱅이) 바울이 향하는 바의 세계에 적 없었던 것.
이 세상은 소위 현세이다. 부정해진 세계이다. 패괴와 환난의 노예이다.
하지만 이 세상은 우리가 버려야 할 것 아니다,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때, 이 세상의 구원도 역시 완성되고, 이에 완전한 우주가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 신자의 희망은 이것보다 이해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지으신 놀라운 우주 만물이, 영구히 악인의 수중에 있고, 하나님을 조소하는 자의 소유로 돌아갈 리가 없는 것이다.
세계가 그들의 유린 꺼리로 되는 일은 잠시의 일이다. 때가 이를 것인가, 천지 만물 모든 수조물은 곧 그들의 손에서 탈취되어, 진실한 하나님의 아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완성된 전 우주, 이것이 하나님의 후사(상속자)가 물려받을 유산이다.
지금 오사까시에 와서 은부(殷富)(opulence)를 볼 때, 이 세상의 세력이 상당한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부는 불신자의 손에 맡겨져 있는 것이다. 우주 만물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의 지배에 속하여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의 아들도 아끼지 않고서 이것을 우리들 신자 위해 내어주신 분은, 어찌 이에 더하여 만물도 주시지 않으랴이다.
이 은부, 이 아름다운 물과 바다, 이 우주 만물이, 이것보다도 훨씬 미화된 형태에 있어서 우리에게 주어지리라는 것은, 성서가 가르치는 바의 중심적 진리이다.
사람의 사상으로서 이것보다도 장대한 것이 있는가?
우리들이 받을 선물(은사)로서 이것보다도 위대한 것이 있는가?
그리스도에 있어서의 구원이 마침내 여기에까지 이를 것을 알 때, 우리들은 다만 경탄하며 찬미하는 외에 없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 제13장 끝에 말하고 있다.
‘이 짐승의 수를 아는 자는 지혜가 있다. 재지(才智) 있는 자는 이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
짐승의 수는 사람의 수이다. 그 수는 육백육십육이다’라고.
육 육 또 육, 이는 사람의 상태라고 한다.
히브리인에게 있어서는 7은 완전을 나타내는 수이다.
그러므로 6은, 완전에 가까우면서 이에 달하지 못한 것이다.
사람의 수는 실로 666이다. 개인이 그렇다, 사회 그렇다, 천연 역시 그렇다.
하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때 이를 것인가, 666은 일변하여 777로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다시 오시는 때, 신자는 부활하고 만물은 부흥하고, 그리고 부흥한 만물이 부활한 신자의 손에 주어져, 그리하여 하나님의 후사는 그 받을 바 상당한 유산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인생과 전 우주에 관한 최대문제이다.
*내촌감삼의 로마서 주석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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