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세 계단
로마서 8장 29-30절
‘대저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를,
그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시려고, 미리 이를 정하셨다.
이는 그 아들을 많은 형제 가운데서 맏아들(적자) 되게 하시렴에서 이다.
또 미리 정하신 사람은 이를 부르시고, 부르신 사람은 이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사람은 이에 영광을 주셨도다’(로마서 8:29-30,일본어역)
(롬 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개역한글)
나는 오사까 덴망 기도교회와는 아주 연고 깊은 자이다.
과거 12년간에 걸쳐, 내가 이 교회에서 강연한 것 약 10회, 더구나 나는 이때까지 오사까시 중 다른 장소에서 강연을 한 일이 없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 교회 창립 40년의 기념회에 임함은 기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 나는 특히 축하의 뜻을 표시하기 위해 왔대도 안 될 것 아니리라.
그리고 더욱 기이한 것은, 금년은 나 자신에게 있어서도 또한 신앙생활에 들어가서부터 제40년에 상당하는 일이다.
즉 나의 그리스도교적 생활과 이 교회와는 그 나이를 같이한다 할 수 있고. 40년의 신앙생활을 계속한 자가 40년간 주의 가호 아래 존재해 온 교회에 와서 그 기념을 축하할 수 있음은, 기인한 하나님의 인도이다.
그러면 나는 여기서 어떠한 말로서 축의를 표시해야 할까? 달리 없다, 나 자신의 40년의 신앙생활의 개요를 말할 것 밖에 없다.
일은 나 일 개인에 관계된 것이지만, 나의 크리스천의 실험은 모든 크리스천의 실험이다.
나는 오늘 특히 로마서 제8장에 대해 말을 하려한다.
스위스의 성서학자로서 세계에 유명한 F. 고데(10권 115역주)는 말하기를
‘만약 성서를 바짝 조린다면 이것을 로마서라 할 수 있고, 로마서를 바짝 조린다면 이것을 그 제8장이라 할 수 있다’고.
즉 로마서 8장 중에서 성서 전체의 의의를 찾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제 29, 제 30의 양절 같은 것은 그것을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다.
(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개역개정, 한글)
신자의 신앙적 생활의 개요는 이 가운데 명시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떠한 뜻으로 사람을 불러 신자로 하셨는가, 이것을 가르쳐주는 것은 즉 제29절이다.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개역개정, 한글)
하나님은 인류를 사랑하시는 나머지, 스스로 마음에 정한 자를, 그 아들 그리스도의 형상의 모습과 같게 하시려고, 미리 이것을 선택하셨다고 한다.
즉, 성자 그리스도를 다만 한 자녀(외아들)로 되게 않으시고, 그와 함께 많은 형제를 만드사, 그로 하여금 그 중에서 맏 아들(적자)되게 하시렴에서라고 한다.
하나님은 어찌하여 어떤 사람을 택하시고 어떤 사람을 택하시지 ‘않으셨는가?
이것을 사람 측에서는 살펴 헤아릴 수가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측에 있어서는, 그 신자를 택하심은, 반드시 이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같은 성질의 것이 되게 하시려는 것을 그 최후의 목적으로 하셨음을, 여기에 명시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이 목적은 어떻게 실현되었는가? 그 경로를 보이는 것은 즉 제30절이다.
이르기를, ‘정한 자는 이를 부르고, 부른 자는 이를 의롭다 하고, 의롭다한 자는 이에 영광을 주셨도다’고.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개역개정, 한글)
즉 안다, 여기에 부르심, 또 의롭다 하심, 또 영광을 주심의 삼 계단 있음을.
그리고 이는 신자 각자의 생애에 있어서의 실험에 비추어 해득할 수 있는 사실이다.
먼저 나 자신이 부르심을 입음의 실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메이지(1868-1912) 초년, 제종의 사정에 재촉되어, 당시 아직 외국같이 사유되던 혹까이도(홋까이도) 삿뽀로로 가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 이미 내가 하나님께 인도되는 길이었다.
그 고장(땅)에 이르자, 유명한 미국의 그리스도교적 과학자 W. S 클라크 씨 있어 이미 도(말씀)를 전한 그 권내에 들어간 것, 이것 역시 부르심을 입음의 하나였다.
뿐만아니라 많은 신앙의 친구가 주어져, 함께 도를 연구하게 된 것,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이는 모두 외측의 부르심으로서, 이에 더하는 데 내측의 부르심이 있었다.
하나님은 그 자신에 대하여 많은 것을 내 심중에 가르치신 후, 마침내 어느 때 내가 어떤 자인지를 밝히 보여 주셨다.
나는 그때까지 세상의 부패를 탄식하고, 사람의 죄를 분내며, 크게 사회를 개량하고, 나라를 구하고, 죄악에 반대하고, 정의를 부르짖을 것을 기약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의 마음에 임하여 말씀하셨다. 즉, ‘너야말로, 그 죄인이다’라고.
그것은 마치 다윗왕이 나단에 대하여, 어떤 사람의 죄를 노한 때, 나단이 대답하여
‘당신이야 말로, 그 사람입니다’고 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사무엘하 12:7).
이는 내게 있어서 가장 아픈 경험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때야 말로 참으로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때 였던 것이다.
이래 종종 이런 부르심을 입지 않은 소위 그리스도 신자 있음을 볼 때마다, 이 경험을 가진 것이 얼마나 다행한 것인지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그처럼, 하나님은 안으로 밖으로 그 놀라운 섭리와 성령의 인도로서 나를 뭇 사람 가운데서 부르신 것이다. 그 이유는 헤아릴 수 없다 해도, 부르심을 입은 사실은 이것을 의심할 수가 없다.
부르심을 입은 후의 나는 어떠했던가?
이 부르심에 응하여 이에 합당한 생애를 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는 나의 결심이었다.
그래 그때까지 나의 흉중에 있었던 국가, 사회, 인류 등에 관한 문제는 모두 다 소멸되어,
다만 어떻게 하여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할 것인가, 이 괴로운 사람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만이 남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최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찮다고는 해도 일본 정부의 관리였던 당시의 나의 지위를 던져버리고, 부모 형제, 친구의 반대도 돌보지 않고, 나라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그곳에 이르러서도 나는 어느 병원의 간호인이 되어, 최하층의 병인, 특히 백치 소아 등을 구호하고, 가장 낮은 노동에 종사했단 것은,
즉 하나로 ‘어떻게 하여 자기를 하나님 앞에 의로 할 것인가’의 노력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던 것이다.
당시, 나의 혼신의 노력은, 어떠한 방법으로서라도, 성서에 보여주는 바와 같이 거룩하고 의롭고, 자기를 떠난 사람 되고자 하는데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은 드디어 무익으로 끝났다.
나는 자기를 거룩히 하고자 하면 할수록, 도리어 자기의 부정(오예)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외측의 행위를 거룩하게 하려면, 내심의 추악은 더욱 더 분명해졌던 것이다.
선을 행하면 선을 자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나는 도저히 교만한 사람, 죄의 자식 됨을 면할 수 없음을 알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실망의 극에 달한 때, 나의 경우에 있어서는 애머스트대학 전 총장 실리(10권 395역주) 선생이 나의 지도자였다.
즉 사람이 의롭다함을 입는 것은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앙에 의한다는 것을, 나는 비로소 그에게서 배웠던 것이다.
‘네 의롭다함을 입음은 네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며, 네 자신 여하로 자기를 거룩하게 아니라,
네 죄 위해 그 몸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바 된, 저 주 예수 그리스도에 있어서 있는 것,
그러므로 자기의 노력을 방기하고, 다만 그를 우러러 보라, 그리하면 구원받을 것이다’라고.
이것을 알 때 나의 중하(重荷)는 곧 나의 쌍견(양어깨)에서 떨어졌던 것이다.
하나님 앞에 스스로 의인(義人)되고자 안달했던 나는, 여기서 눈을 들어 십자가상에 보혈을 흘리신 그리스도를 우러러보고, 그리하여 의롭다 함을 입었던 것이다.
즉 이미 부르심을 받은 나는 이제야 의롭다 함을 입은 것이다. 나는 여기서 구원의 제2계단을 오른 것이다. 이 복음은 나에게 있어서 실로 귀중한 것이었다.
나는 이것을 듣고 또 다른 것을 들을 필요를 알지 못했다. 이것만 있으면 귀국하여 내 동포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족하다고.
이렇게 생각하여, 나는 다시 친구들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용약하면서 귀국의 길에 올랐다.
그리고 이래 이미 30년 실리- 선생에게서 배운 이 복음이 지금도 역시 내가 전하는 복음으로서 있는 것이다.
이것 이상 또 어떠한 빛이 내게 임한대도, 나는 이 귀한 복음을 비인(非認)할 수는 없다.
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입게 된 것,
이 2계단은 내가 이미 경과한 것으로서, 가령 어떠한 사정이 있대도, 다시 이것을 하강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도 또한 길게 머물 수 없음을 알았던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입었대도, 그러나 아직 완전하게 구원된 자는 아니다. 이는 사실이 증명하는 바이다.
시험 삼아 나의 전도의 결과를 보라, 내가 정신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행한 전도라 해도 실패는 많고 성공은 적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천인에게 했으나, 믿는 자는 소수이다. 믿고 이것을 유지하는 자에 이르러서는 더욱 극히 소수이다.
기타, 나의 전도의 결과로서 보아야 할 것은 아주 적다. 이것도 나의 복음 전파의 결과라고 생각하면 나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 이것을 자기에 대하여 생각할 것인가, 처음부터 복음에 접하여 나는 크게 거룩(성결)해진 것이다.
그것은 자기 혼자 돌볼 때 이것을 알기 어렵지만 종종 40년 전의 구우(舊友)로서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조우하는 때, 피아(彼我)의 사이, 현저한 상위가 있음을 감지하지 않을 수 없다.
복음을 믿음의 결과가 위대함은 실로 명백하다. 그렇다고 하지만 비교의 표준을 사람에게 취하지 않고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취할 것인가?
즉 도저히 나를 가지고 그에게 비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목적은 그 형상의 모습과 같이 되게 하시려 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형상과 나의 현상과의 차는 천양도 이만저만이 아닌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나는 다시 실망치 않을 수 없다.
복음이 타인에게 미친 결과와는 서로 어울려 나로 하여금 커다란 불안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에게는 영광을 주신다고 있다.
나는 부르심 입고, 또 의롭다하심을 입었다고 하나, 아직 영광이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즉 나의 구원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신앙의 제3계단을 오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영광은 언제 이것을 주시는 것일까, 그것은 현세에 있어서는 아니다.
다음 세상에 있어서, 그리스도 다시 나타나, 우리들에게 영광의 몸을 주시고, 그의 나라를 이 세상에 건설하시는 그때, 우리들은 영광에 들어가는 것이다.
일은 아직 미래에 속한다. 하지만 현재에 있어서 이것을 알고 이것을 믿을 수가 있다.
신자는 아직 영광을 받지 못했어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것을 주실 것을 오늘 여기서 확신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세에 있어서의 신앙적 생활의 계단으로서는, 희망으로서 그 제3단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희망을 확실히 하여, 신앙은 다시 대 발전을 하는 것이다.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가 다시 그 몸의 부활 및 영화를 입고, 그 영의 완전한 성결을 입어, 특히 부흥된 만물 가운데 두어져 하나님의 영광을 우러러 볼 수 있다는 대(大)희망이 주어짐으로서, 인생은 다시 일단의 대 발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신앙생활을 시작하여서 부터 40년 후의 오늘에 이르러, 이 은혜에 접할 수 있어, 감사해 마지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류를 사랑하시는 마음에서, 이들을 그 아들 그리스도의 형상의 모습 같게 하시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동생 되게끔 정하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의 신자 선택의 목적으로서, 이른 바 하나님의 예정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목적이 인류의 실험으로 나타나는 때에, 여기에 신앙에 3계단을 낳는 것이다.
즉 처음에 부르심 있고, 다음에 의롭다 하심 있고, 나중에 영광을 주시는 일 있다.
하나님은 먼저 외측의 경우와 내심에 있어서의 죄의 자각으로서 우리를 부르신다.
다음에 우리들이 많은 무익한 노력을 거듭한 후, 십자가상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속죄를 알기에 이르러, 우리를 의롭다 하신다.
그리고 최후에, 말일(末日)에 있어서 우리에게 영광을 주실 것을 확실한 희망으로서 알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은 영원한 과거이다.
그 발현인 부르심과 의롭다하심의 실험은 곧 현재의 사실이다.
그리고 그 결과인 영광의 사여(賜與)는 이는 영원한 미래이다.
로마서 제8장의 이 짧은 양절 가운데, 영원한 과거에서 영원한 미래에 걸치는 신자의 운명이 명시되어 있는 것이다.
최후의 일단은 현세에 있어서 실현되진 않고, 희망으로서 남는다. 하지만 이 희망이야말로 극히 확실한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영광을 주셨다’는 것은, 필경 그것이 필연의 미래인 까닭에 기정의 사실로서 이것을 말한 것이리라.
그리고 실로 희망 있음으로서 우리들은 구원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한다.
‘우리가 구원을 얻음은 소망에 의해서이다’(24)라고.
그러면 나는 간절히 바란다,
이 교회에 있어서도 또 교회 전체로서도, 이 신앙의 단계를 거쳐 가시기를,
특히 아직 오려는 세상에 있어서의 영광을 알아차리지 못한 이는, 오늘 이 큰 영광을 알아 감사와 환희와의 생애에 들어가게 되심을.
*내촌감삼의 로마서 제8장 주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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