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내가 생각하건대, 지금(현재)의 고난은,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할 바 아닌 것이다

거듭난 삶 2024. 8. 12.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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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의 부흥

 

로마서 818-25

 

내가 생각하건대, 지금(현재)의 고난은,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할 바 아닌 것이다’(18)

 

 

바울은 여기서 고난이라 하고 영광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현재)의 고난이란, 인세 보통의 간난(艱難)을 말함인가?

 

아니, 바울의 경우에 있어서 고난이란 단지 그것만이 의미는 아니었다.

사도시대의 신자에게는 특별한 고통이 따랐던 것이다.

 

즉 박해이다. 그리고 다만 사도시대 뿐 아니라, 이 세상은 언제나 그리스도에게 대적하는 까닭에, 오늘날이라 해도 세상에 대해서 명백한 그리스도 신자적 태도를 취하는 자에게는, 또 반드시 같은 박해가 이해 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신자는 신앙에 십자가는 따르는 것이라고 듣고서 놀란다.

하지만 이는 세상의 박해가 끊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신자 스스로가 이것을 취하는 때문이다.

 

크리스천이 크리스천 됨의 행위를 하는 때는, 필연 이에 더하여 적당한 고통을 동반한다.

그리스도와 그 영광을 함께 하려는 자가 또 그 고난을 함께 해야 할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신앙이 진보함에 따라 고통도 또한 더해진다.

박해를 맛보지 않은 오늘의 신자의 귀에 바울의 이 말은 특별한 뜻(영향)을 가지지 못한다 해도, 당시의 신자에게 있어서는 비상한 위로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지금(현재)의 고통은 크다, 하지만 이것을 후에 나타날 영광에 비교하는 때는 말한 것은 못 된다고.

 

영광이란 무엇인가?

보통 예사의 영광은 아니다. 천지 만물의 부흥과 이에 따르는 신자의 현영, 즉 이것이다.

천지 만물은 헛것으로 돌아간다 하고, 패괴의 노예라고 한다.

 

(19 ‘대저 수조물의 간절한 희망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20 ‘대저 수조물은 공허에 붙여졌기(종속되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다. 이것을 붙이신 자에 의해서이다.).

 

알기 어려운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 적어도 자연 인생에 대하여 고찰을 한 자는 그 진실함을 의심치 않는 것이다.

 

봄이 와서 꽃은 피고 나비는 춤춘다. 아름다운 천연이다. 하지만 보라,

나비 속에 해충 있어서 잎을 씹고 나뭇가지를 마르게 하지 않는가?

 

맹조는 소금(小禽)을 잡아먹고, 야수는 가축을 습격하며, 독사는 행인을 괴롭히지 않는가?

 

육성재배 기백일에 겨우 꽃봉오리를 터뜨렸는가 할 사이도 없이, 꽃은 어수선하게 이토에 맡겨 버리는 것 아닌가?

 

고테(1107역주)가 탄식한대로, 천연 중의 일미한 부인의 용색도 불과 2년을 간직하지 못하고, 신체(身體) () 극도에 달하자마자 곧 그 패괴가 시작되는 것, 역사의 전성시대가 아주 짧은데 비추어 보아도 분명하다.

 

학자 헉슬리(2125)는 말하기를 천연은 환성하자 마자 곧 파괴한다.

 

실로 천연물은 패괴의 종이다. 아름다운 것 같으면서 그 가운데 말할 수 없는 악을 간직하고, 완전한 듯 하면서 실은 극히 불완전하다. 허무로 돌아감은 이는 수조자의 신상이다.

 

어찌하여 천연은 그렇듯 허무로 돌아가고, 패괴의 종으로서 남아 있는 것인가?

 

바울은 말한다, 거기에는 이유 있다고.

 

이를 허무로 돌아가게 하신 분에 의한다.

 

천연을 허무로 돌아가게 하는 자는 사람인가? 어찌면 그러리라.

어버이(부모)의 죄가 자식에 나타남 같이, 천연의 으뜸인 사람의 죄가 만물에 나타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을 돌아가게 하는 이를 하나님으로 보는 것은 보다 만족한 해석이다.

 

즉 하나님은 인류와 함께 만물을 구하려 하시고, 전자의 구원을 완성하기까지, 잠시 후자를 불완전대로 두어 기다리시는 것이리라.

 

그리고 패괴의 종 됨은 천연 자신이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허무로 돌려져, 천연 내에 대 고통이 있다. 천연도 또 저 성장한 귀인과도 같다. 그것만은 고통을 모르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그렇지 않다.

 

아름다운 가죽 한 겹을 벗기면, 그 아래에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천연도 역시 구원을 대망한다. 그리고 천연의 구원은 우리들의 구원과 함께 성취한다.

 

그러므로 천지 만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출연, 즉 크리스천의 구원이 그 영에서 몸에 미쳐 외측에 나타나는 때를 대망하는 것이다.

 

그 때, 천지 만물은 우리들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인 자유에 들어감이 허락되는 것이다.

 

(21-23 ‘그것은 수조물도 패괴의 기반을 피하여(벗어나)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2 ‘대저 우리는 모든 수조물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생함을 아는 것이다

23 ‘뿐만 아니라, 성령의 처음 열매를 가진 우리들 자신도, 자기 속으로(안에) 탄식(신음)하며 아들로 되는 일, 즉 우리 몸이 구원되기를 대망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얻음은 소망(희망)에 의하는 것이다.

이미 구원된 것은 아니다. 소망 중에 구원된 것이다.

 

소망이 이미 실현되면, 이미 소망은 아니다.

소망은, 목적물이 미래에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의 구원의 완성은 미래에 있다.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하여 가는 하나님의 아들 될 수 있게 된 것은, 즉 구원된 것이지만도, 구원은 이것으로서 완성한 것이 아니다,

 

그 완성되는 때는 언제랴!

우리들의 몸의 구원됨과 함께 또 천지 만물이 구원되는 때이다.

 

(25-26 ‘하지만, 만약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바라면, 인내로써 대망하는 것이다

26 ‘그처럼, 성령도 또한 우리의 약함을 돕는다. 그것은, 우리는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해도, 성령께서 스스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구하는 것이다’).

 

일은 극히 중대하고 또 심원하다. 하지만, 구원이 만약 이것뿐이라면, 그것은 구원은 아니다.

 

시험 삼아 현재의 상태로서 구원은 끝났다고 하자, 그 불완전함이란, 얼마냐!

 

사람은 자기 일인의 구원으로서 만족하지 않는다, 자기와 함께 처자 이웃 아니 전 인류의 구원을 요구하는 것이다.

 

또 인류만의 구원으로서 만족하지 않는다, 인류와 함께 금수충어 아니 천지 만물의 구원을 요구하는 것이다.

 

다만 우리의 심중에서 악이 소멸되는 것 뿐 아니라, 전 인류 전 우주에서 그것이 소멸되기에 이르러 할렐루야, 아멘은 우리들의 입에 오르는 것이다.

 

그리고 성서는 구원을 우리에게 약속하는 것이다.

 

어느 때까지 기다리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리스도로서 완전한 구원을 행하시고, 우리의 사랑하는 자는 다시 우리에게 주어지고, 우리들의 거룩한 영에 알맞은 패괴없는 몸은 주어진다,

 

또 천지 만물은 개조되어, 이 새로운 몸으로서 생활하기에 맞는 신천신지가 실현되는 것이다.

 

이로써 성서가 가르치는 바의 구원이 얼마나 광대무변한 것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에 비교하여 오늘의 이른바 구제 사업(구원사업)같은 것은 도대체 무언가?

 

혹은 한 사람의 심중에서 비애가 없어진다든가, 혹은 한 공장의 자본가가 노동자에 대하여 친절을 더 했다든가 하고, 혹은 한 농촌이 개선되었다고 하고, 혹은 가령 한 국민에게 평화가 임했다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완전하신 구원에 비해서는 거의 말할 것도 못되는 소()사건이다.

 

우리의 구원은 전() 우주의 그것과 함께 완성된다.

이 사상을 가질 때, 사람은 전 세계에 복음의 입증을 하려는 대() 야심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의 인격은 그 이상에 의해 달라진다.

 

에머슨(5376역주)은 말했다. ‘네 차를 별에 연결시키라.

 

하지만 바울 같은 이는 자기의 이상 가운데 전 우주를 포옹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마음에 이 희망이 넘쳐 천지는 그의 전도의 구역으로 된 것이다.

 

또 이 이상을 가짐으로서 사람은 만물에 대하여 무한한 동정을 보일 수 있다.

자기 한 사람 구원될 뿐 아니라, 전 인류, 전 우주와 운명을 함께 하는 것이다.

 

여기서 작은 자기중심의 신앙은 소멸되어, 내 종교는 동시에 또 만물의 종교로 되는 것이다.

 

*내촌감삼의 로마서 제8장 주석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