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거듭난 삶 2024. 8. 14.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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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받은 이스라엘

 

성 경: [9:1-5]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2) [1절과 같음]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4)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9: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2) [1절과 같음]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 이 표현은 지금부터 진술될 내용의 권위를 보다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란 말은 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 바울의 독특한 어법으로서,

*참조 : (1)

 

이것이 맹세의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구약 시대에 '여호와의 사심으로'라는 표현으로 맹세했던 것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한다.

 

바울은 자기의 말과 계시의 최종적인 권위를 나타낼 필요가 있을 때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세우고 있다.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 - 바울에게 있는 큰 근심과 고통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것이다.

 

비록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사역을 하고 있으나,

 

(2: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자기 동족에 대한 깊은 애정은 여전함을 보여 주고 있다.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 본 구절에서 바울은 자기 동족에 대한 자기의 애정이 거짓이 아님을 더욱 확증하고 있다.

 

초두에서는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란 표현으로 자신의 진술의 권위를 세운 반면, 본 구절에서는 자기와 함께 계시며 자신의 생각을 다 아시는 '성령'의 이름으로 자기 마음의 진실성을 입증시키고 있다.

 

따라서 바울은 '성령 안에서'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자기 동족에 대한 큰 근심과 고통의 비중(比重)과 지속성, 그리고 그 깊이를 보여 주고 있다(Liddon, Murray).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따라 났으며 언약과 약속에 참여한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

 

(4-13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에 있어서

공통된 저주의 의미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멸망 당한다는 것이다(Murray).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저주가 되신 사건도 이러한 의미의 저주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러면 바울은 실제로 자기 동족을 위해 저주를 받기를 원했는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와 유사한 표현을 사용했던 모세의 경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세는 자기 백성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죄를 속()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32:32)라고 탄원했다.

 

이때 모세는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심판에서 건져내고자 하는 열심에서 그런 기도를 했다.

 

이것은 자기를 정말 하나님의 책에서 지워 버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과 열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본절에서 바울은 자기 동족에 대한 연민과 열심을 나타내기 위해 그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즉 바울은 모세와 같이 자기 구원을 포기할 만큼 자기 동족을 사랑하고 있음을 로마 교회의 유대인들에게 보여 주고 있다(Calvin, Murray, Barmby).

 

 

[9:4]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양자 됨 -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은 구약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

 

(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14: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32:6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는 사곡한 종류로다;

 

63:16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64:8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11:1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1: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2:10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궤사를 행하여 우리 열조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

 

그러나 이 부자 관계는 고대 근동 지방의 왕과 신하의 관계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그 당시 왕은 신하와 백성의 어버이와 같은 존재이자 신과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왕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어버이와 같이 경배되었던 것이지 신약 시대와 같이 친밀한 가족 관계에 있어서의 부자(父子) 관계로는 파악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증거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문이나 기타 다른 문헌에 하나님의 성호가 가족적인 의미의 친밀한 용어인 '아바'(압바)로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댈 수 있다.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의 주석을 참조 하시길:

 

영광 - 여기서의 영광은 조직 신학적인 포괄적 의미로 이해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영광'은 머레이(Murray)가 지적한 대로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나타나셔서 임하던 그 영광이며,

 

(24:16-17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육일 동안 산을 가리더니 제칠일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모세를 부르시니라

17)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성막을 덮었던 영광이며,

 

(40:34-38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35)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36)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37)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

38)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

 

지성소의 시은좌에 나타난 영광이며,

 

(16: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장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성전을 가득 채웠던 영광이다.

 

(왕상 8:10-11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

11)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대하 7:1-2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전에 가득하니

2)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므로 제사장이 그 전에 능히 들어가지 못하였고;

 

1:28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

 

그리고 좀 더 비약하자면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고후 3: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언약들 - 구약의 언약(Covenant)은 로버트슨(Robertson)에 따르면,

 

아담 - (시초의 언약, 3:14-19),

 

노아 - (보존의 언약, 6:17-22;8:20-22;9:1-7, 8-17),

 

아브라함 - (약속의 언약, 12:1;15:1-18;17:1, 2),

 

모세 - (율법의 언약, 34:28;4:13;9:9, 11),

 

그리고,

다윗 - (왕국의 언약, 삼하 7:1-29)등과 맺은 다섯 가지 언약이 있다.

 

물론 혹자는 아브라함에게 맺어진 동일한 의미의

두 언약 - (15:18-21;17:1-21)만을 본절의 '언약들'이라고 주장하지만(Murray),

 

그렇다고 그가 다른 언약들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언약이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전체 인류 구속을 목표로 하는 언약들이기 때문이다.

 

언약들에 대한 관련 성경구절 들은 다음 회에 기록합니다.

 

율법을 세우신 것 - 모세를 통해서 시내 산에서 율법이 공포된 것은,

 

(4;13-14 여호와께서 그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로 지키라 명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

1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사 너희에게 규례와 법도를 교훈하게 하셨나니 이는 너희로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하게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 백성으로 보증하시는 선언이었다.

 

예배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신 제사 제도는 우상 숭배와는 구별되는 것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를 포함하는 구속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 제도에 계시된 구속사적 의의를 망각하고, 형식적인 예배의 본질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데 있음을 가르치셨다.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약속들 - 특별히 '언약'이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바,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성립된 것에 강조점을 두는 반면,

 

'약속'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 자체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12:2-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18: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26: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28: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다시 말해서 '언약'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성을 강하게 반영하며, '약속'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개별적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강하게 시사한다.

 

따라서 '언약''약속'에 비해 포괄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내용상 이를 명백히 구분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안 된다.

'언약''약속'은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Dunn).

 

 

[9: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조상들 - 족장들 곧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을 일컫는다.

 

(7-13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런데 혹자는 '조상들'을 세 사람의 족장으로 국한시키는 것을 반대하며, 다윗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1:3에서 예수께서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라고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본장에서 그리스도의 나심을 세 족장들과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으므로 굳이 다윗을 '조상들'의 범주에 넣을 필요가 없다.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 본 구절은 골 1:15-17과 더불어 바울이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묘사한 독특한 표현이다.

 

(1:15-17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사도 요한의 그것과 내용상 차이가 없다.

 

(1:1-5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한편 본 구절은,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께 세세에 찬양이 있으리로다 아멘'과 같은 송영(doxology)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나, 형식상으로 다른 송영과 비교할 때 송영이 아니라 분명히 주장을 내세우는 진술이다(Barmby).

 

아무튼 바울은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신성을 언급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그리스도가 신적 권위를 지니고 있는 구세주이심을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