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 제9장 1-18절의 해석과 이해

거듭난 삶 2024. 8. 22.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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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제91-18절의 해석과 이해

 

1.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내 양심도 또한 성령 안에서 내게 (이를) 증거한다.

2. 즉 내게 큰 근심 있음을. 내 마음에 끊임없는 고통 있음을.

3. 대저 나는, 내 형제로서 육으로 말하여 내 동포 위해서 라면,

자신은 그리스도에게서 떠나 아나테마(하나님께 저주받는 자) 되기를 원함으로 이다.

4. 그들은 실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양자(아들로 삼으심) 또는 영광, 언약 또는 율법, 제의 또는 약속은 모두 그들의 것이다.

5. 열조는 또 그들의 것이다.

그리고 육체에 의하면 그리스도 또 그들에게서 나셨다.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미할 하나님이시다. -.

6. 이렇게 말함은, 하나님의 말씀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서 난 자가 다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이다.

7. 또 아브라함의 자손(후예)이라고 하여 다 그 자식은 아니다.

다만 이삭에게서 난 자, 네 자손이라고 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8. 즉 육의 아들인 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다만 약속의 아들 된 자, 이는 그 후손으로 되는 것이다.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었다. 즉 때 이르면 내가 올 것이다.

그리고 사라에게 남자(아들) 있을 것이다, 라고.

10. 뿐만 아니라, 리브가 역시 우리들의 선조인 이삭 한 사람에 의하여 잉태한 때,

11. 그 아들 아직 나지 않고, 또 선도 악도 행하지 않은 때,

행위로서가 아니라 부르시는 이에 의한다는 예정에 의한 하나님의 성도의 존립위해,

12. 그녀(리브가)에게 말씀하셨다, 장자는 차자에게 쓰일 것이라고.

13. 기록하여,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였다고 있는 대로이다.

14.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말하랴? 하나님께 불의 있는가? 물론 없다.

15. 그가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이다.

즉 내가 은혜(자비)를 베풀려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려는 자를 불쌍히 여긴다고.

16. 즉 원하는 자에 의하지 않고, 주자에 의해서도 아니라, 다만 은혜 베푸시는 이에 의한다. 17. 성경은 또 바로에게 고하여 이르셨다. 내가 이로 인하여 너를 일으켜 세웠다.

즉 너로서 내 권능을 나타내기 위해, 또 너로서 널리 세계에 내 이름을 전하게 하렴에서라고.

18. 이 같이 하여, 그의 원하는 자를 그는 은혜주시고,

또 그의 원하는 자를 그는 완악하게 하신다.

 

 

의해(義解)

 

1) 내가 말하는 바는 참이다.

그것은 나 혼자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말함으로이다.

그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그 안에 있는 자는 참 아닐 수 없다.

나를 의심해도 가하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를 의심하지 말 것이다.

그것은 나는 그 안에서 그의 진실함 같이 진실하기 때문이다.

 

1) 나는 또 내 안에 있는 성실만으로서 말한다.

나는 다만 내 성실로서만 족해하지 않는다. 나를 증명하는 이는 나 이외에 두 분 있다.

그리스도이시다. 성령이시다.

나는 거룩한 양자(兩者)의 증명을 얻어 말하는 것이다.

 

1) 내 양심도 또 내 말의 참임을 증거한다.

하지만 양심의 증거라고 해서 나는 반드시 이것을 받아 들이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양심은 종종 오인(吾人)을 속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양심은 지금 성령 안에서 내게 증거한다.

그 충만하심에 의해 또는 그 비추심에 의해 내게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한 양심의 증거는 믿기에 족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증거를 얻어 말하는 것이다.

 

2) 내가 증언하려는 것은 이것이다.

즉 내 동포 내 골육에 관한 일이다. 그들의 구원에 관한 일이다.

이 일에 관하여 내게 큰 근심 있다. 마음에 끊임없는 고통 있다.

나는 이것을 생각하여 단장(斷腸)의 생각 않을 수 없다.

 

3) 나는 참으로 어떤 때는 생각한다.

내 형제로서 육으로 말하면 내 동포인 자의 구원 위해서는, 나 자신은 구원되지 못한대도 가하다고. , 혹은 내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서 떠나 하나님께 저주받는 자로 되어도 가하다고.

나는 천상천하 무엇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이절(離絶) 할 수 있는 자 없음을 알지만도, 그러나 나는 어떤 때는, 이 무한한 사랑을 희생하여 내 동포 골육을 구원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보라, 하나님 앞에서 나는 거짓말 하지 않는다.

나는 참으로 내 동포 골육에 대하여 이 마음을 가진다.

 

4) 내 동포 골육이란 누군가?

지금은 내 적()이요. 내 전도의 대방해자인 이스라엘 사람 그 사람이다.

나는 그들이 나 같이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들은 실로 그 구원에 참여하기에 족한 충분한 자격을 갖춘 자이다.

후사라 하고, 영광이라고 하고, 언약(계약)이라 하고, 율법이라 하고, 제의라 하고, 약속 등, 이는 모두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며, 그들로서 시작한 것이다.

구약의 은혜는 모두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들 없이, 세상은 하나님의 마음과 선물(은사)에 대하여 아는 바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저장(貯藏)자였다.

세상에 은혜(축복;자비) 받은 백성으로서 그들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5) 열조는 역시 그들의 것이다.

아브라함이라고 하고, 이삭이라 하고, 야곱이라 등등, 모두 그들 이스라엘인의 조선(祖先)이다.

그들은 그 유전성에서 생각해도, 그리스도의 구원에서 빠져야 할 자가 아니다.

 

5) 뿐만 아니라, 여기에 그들에 대하여 저대(著大)한 사실 있다.

즉 만민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로 말하면 그들에게서 나셨다는 이것이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인으로서 유대인이다.

그들은 그를 나무에 달아 죽였지만도,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인 또는 로마인이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는 실로 그 육체로 말하면 이스라엘인이다.

그들이 그에 의해 구원되지 않을 리 있으랴!

하지만 그들은 그에 의해 구원되려 하지 않는 것이다.

 

5) 이스라엘인에서 태어나온 그리스도!

그는 만물위에 계서서 세세에 찬미해야 할 하나님이시다.

아멘, 실로 그러하다. 유대인의 영광 이상 없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낳은 이스라엘이 구원되지 않을 리 있으랴!

하지만 지금은 그들은 하나님께 저주받은 것 같다. 내 심령 내에 견딜 수 없는 의혹이 있음은 이것 때문이다.

 

6) 은혜의 독점자라고도 해야 할 이스라엘인이, 최후의, 그리고 최대의 은혜인 그리스도의 구원에 누락되어 있다고 할진대, 어떤 사람은 말하리라,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땅에 떨어졌다고.

그렇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깊이 성서를 연구하건대, 그것이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6) 나는 먼저 제1로 말하고자 한다.

이스라엘에서 난 자 모두가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즉 육인 이스라엘인 모두가 참된 이스라엘인이 아니라고. 나는 지금 성서에 의해 내 이 제언을 설명하련다.

 

7)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해서 모두 다 아브라함의 자식이 아니다.

우리들의 선조에 아브라함 있다고 하여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자처하는 자는, 아직 깊이 성서를 연구하지 못한 자이다.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 있었다.

그 여종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과, 정처 사라에게서 난 이삭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다만 이삭에게서 난 자 네 후손으로 불릴 것이다’(창세기 21:12)라고.

 

8) 따라서 알 것이다, 육의 아들인 자 반드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만약 그렇다면, 이스마엘과 그 자손도 하나님의 아들일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약속 따라 난 아들만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이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아들로서 불린 것은 아브라함의 피를 이어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그 은혜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9) 이삭에 관한 약속이란 무언가?

하나님,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명년 이때 쯤,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올 것이다,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세기 18:10).

따라서 알 것이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서 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로서 된 것임을.

그의 육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그가 자위로 얻은 것이 아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아들된 것은 하나님의 성의(聖意)에 의해서이다.

 

10) 사람은 혹은 말할 것이다.

이스마엘은 여종이 나은 아들이다, 그러므로 사자 될 수 없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사자된 것은 그가 정처(正妻)의 아들이었음으로라고.

하지만 정처의 아들인 자 반드시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다.

그것은, 한가지로 우리들의 선조인 이삭이 그 정처 리브가에 의해 난 두 아들의 경우에 비추어 보아 분명하다. 아버지 한 사람, 어머니 한 사람으로서 낳은 두 아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12) 그들 두 아들이 아직 나지 않고, 또 선도 악도 행해지 않은 때에, 하나님은 그 어머니 리브가에게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장자는 차자에게 쓰일 것이다’(맏아들은 둘째 아들을 섬길 것이다. 창세기 25:23)라고.

이는 도대체 무슨 까닭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땅에 떨어져,

 

11-12) 예정에 의한 그 성지의 존립을 위해, 즉 사람의 선택 및 구원됨은 그의 행함에 의하지 않고, 그를 부르신 자의 의지에 의한다는 진리를 존립케 하기 위함이 아닌가!

리브가의 두 아들 야곱과 에서의 경우에 있어서, 혈육의 관계는 그것으로서 약속의 아들 됨의 자격을 삼기에 족하지 못한다는 진리가 증명된 것 아닌가.

 

13) 성서는 또 기록하여 말씀하신다.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했다’(말라기서 1:2-3).

즉 하나님은 사실상, 야곱의 자손인 이스라엘인을 사랑하고,

에서의 자손인 에돔인을 미워하셨다고.

동일한 태에서 동시에 태어나온 두 형제라고 해도,

약속의 아들의 자손은 축복되고, 이것 없는 자의 자손은 저주 되었다.

 

14) 그러면 약속의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엇을 말하랴?

하나님께 불의 있는가? 하나님께 불공평 있는가?

이는 어떤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바일 것이다. 물론 결코 그러지 않은 것이다.

 

15-16) 하나님은 모세에게 무엇이라고 하셨던가?

내가 은혜 주고자 하는 자를 은혜 주고, 불쌍히 여기려는 자를 불쌍히 여긴다’(출애굽기 33:19).

즉 은혜도 자비도 하나님의 성의에 있는 것 아닌가!

, 은혜받음은, 은혜 입고자 하는 자의 의지에도 행위에도 말미암지 않고,

다만 은혜 베푸시려는 자의 성지(聖旨)에 있는 것이 아닌가.

 

17) 은혜 입은 모세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앞에서와 같이 말씀하셨다.

또 저주받은 애굽왕 바로에 대해서도 그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 ‘나는 이러므로’(출애굽기 9:16)라고.

바로, 역사의 무대에 나타난 것은 자기가 좋아하여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일으키셨기 때문이다.

바로는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고 그 이름을 널리 세계에 전하기 위한 기관으로서 세상에 보였다.

모세 그러하다, 바로 그러하다. 선인 그러하다, 악인 그러하다.

하나님의 성지(聖旨)에 의하지 않고서, 선인은 선을 행할 수 없고, 악인은 악을 행할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18)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자기의 원하는 자를 은혜주시고, 또 자기의 원하는 자를 완악하게 하신다.

역사는 하나님의 성지의 수행이다.

사람 있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계셔서 일 이룩되는 것이다.

이른바(소위) 성사(聖事)라는 것도 또 속사(俗事)라는 것도, 그 근원을 찾아보면 모두 신사(神事)이다.

하나님의 성의(聖意)를 떠나서 인류의 역사는 생각할 것 아니다.

 

*내촌감삼의 로마서 주석에서 발췌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