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목(接木)의 이법
(로마서 11장 13-24절)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함이라 하리니
20)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23)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 참조 : (갈라디아서 2장 20절, 야고보서 1장 21절)
그리스도 신자의 생애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은 접붙인 나무의 이치이다.
접목은 나쁜 나무에 선한 나무를 접붙여 좋은 열매를 보호하는 방법이다.
성서에,
‘무릇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고,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이다’(마태복음 7:17-18)고 있는데,
접목법에 의해, 나쁜 나무로 하여금 선한 열매를 맺게 할 수가 있다.
즉 나쁜 나무를 대목으로 하여 그 위에 좋은 나무의 싹을 접수로 하여 접붙이는 때는,
이에 맺는 열매는 나쁜 대목의 열매가 아니라 좋은 접붙인 접지의 열매이다.
이것은 천연의 법칙인 것으로서, 과수 재배가는 이 법칙을 이용하여 확실하게, 급속하게,
다량의 산과를 수확하는 것이다.
떫은 감을 대목으로 하여 여기에 단감을 접붙이면, 여기서 되는 열매는 떫은 감이 아니고 단감이다. 사과, 배, 복숭아나무, 올리브 등, 모두 이 법에 의해 재배된다.
접목법에 의하지 않고서, 과수재배는 성공의 가망 없는 사업이다.
그리고 복음의 전파를 과수재배의 일종으로서 보는 일이 있다.
이 경우에 있어서 대목으로 되는 것은, 생래의 죄의 사람이다.
그리고 이 접붙여지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여기에 결실하는 것이 죄의 사람의 나쁜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좋은 열매이다.
이상하다면 이상하다. 하지만 원예사에 의해 일반으로 행해지는 접목의 법칙이 인간에 있어서 실현된 것뿐이신 그리스도가 악한 사람인 죄의 아들에 접붙여져, 이것을 대목으로 하여 생장해서 좋은 열매를 맞기에 이르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러한 법칙이 천연계에 행해지고, 우리들도 그 법칙에 지배되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신자의 생애에 있어서 접목의 이치를 분명히 말해 주는 것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있어서의 바울의 말이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미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내 안에서 사는 것이라. 지금 내가 육체에 있어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 위해 자기를 버리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서 사는 것이다’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어, 죽고 또 죽지 않는 것이다.
자기 목적을 달성하려는 그 소욕은 이것을 십자가에 달아 죽인다.
그 의미에 있어서 그는 죽었다고 해도, 그리스도를 자기 심령 안에 거하시게 하고,
그로 하여금 자기를 통하여 그 일을 하게 하시는 의미에 있어서는, 그는 죽지 않고 생존하는 것이다.
하나님이신 원예사에 의해 줄기를 뿌리에서부터 끊기고, 그 위에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에 접붙여진 때에,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다.
이 수술이 행해져, 그는 ‘이미 산 것이 아니라’이다.
이제는 대목이 공급하는 수액은 모두 다 접붙인 가지에 흡수되어 그 실제의 결과에 있어서,
신자는 죽고 그리스도가 그 안에서 사시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대로, 신자는 접목의 수술을 받아 죽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대로 ‘육체에 있어서 사시는 것이다.
그러나 산다고는 하지만, 자기의 생활을 하기 위해 사는 것 아니다. 그를 사랑하여 그 위해 그 생명을 바치기 위해 사는 것이다.
즉, 2개의 생명이 하나로 되고,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를 비어, 종의 모습을 취하여 사람 같이 되사 사람에 접붙여지고, 죄의 아들은 자기 생장의 욕구를 끊고서, 하나님의 아들로 하여금 자기에게 있어서 그 생장 결실을 이루게 한다.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에 대한 죄의 자식의 희생이다.
이 상호적 희생에 의해, 악한 나무가 선한 열매를 맺는다는 대 기적이 실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신자는 접목의 이법에 의해 이룩된 양성수 같은 것이다.
그 뿌리는 죄의 사람인 악한 나무이다. 그 줄기와 가지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선한 나무이다.
그리고 이에 맺는 열매는 하나님의 아들이 맺는 선한 열매이다.
죄의 사람의 육체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 생장하여 영의 열매를 맺는다, 그것이 그리스도 신자이다. 실로 기이한 생물이다.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어서 사시는 하나님의 생명이시다.
비평가가 신자를 평하는 때에, 그 이중인격을 적지하는 것이 보통인데, 신자는 실제로 이중인격자이다.
바울은, 그 육체에 그리스도가 계셔서 산 자로서, 이중인격자였다.
비평가가 표준으로 하는 철저한 단일의 인격자는, 하나님이 아니시면 사람이다.
신자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합체물로서, 이중인격은 그의 특성이다.
하나님 같지 않은 자는 신자가 아니고, 사람 같지 않은 자도 역시 신자가 아니다.
그리스도 신자는 사람의 육체에 하나님의 영이 접붙여진 자이다.
실로 그렇다면, 그리스도 신자이고 아니고는, 그 사람의 생래의 성의 선악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 것이다.
대목에게 구하는 바는 다만 그 강건함뿐이다. 그 질의 양부는 물을 바 아니다.
열매를 맺는 것은 이에 접붙여 진 접수이다.
그처럼, 사람이 사람인 이상은 그리스도를 받아 접붙이기에 족하다.
그가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 그의 육체에 거하시는 그리스도께서, 그를 통하여 그를 사용하여 선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때는 가장 악한 사람이 가장 선한 그리스도 신자로 되어 가장 선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여기서 유전 또는 천성이 여하에 의해 신자의 양부를 판정함의 불합리가 해득되는 것이다.
야생의 돌배나무에 외국산 최상의 배나무를 접붙인 때, 여기서 나는 열매는 돌배가 아니라, 최량의 배이다.
다소의 바울에게 그리스도를 접붙인 것이 사도 바울이다.
방탕아 아우구스티누스(4권 248역주)에 하나님의 아들을 접붙인 것이 성 아우구스티누스이다.
신자의 가치를 정하는데 있어서, 그리스도 접수 이전의 그의 성격으로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원예사는 대목의 여하에 의해 접목의 가치를 정하지 않는다.
그처럼, 우리들도 또한 사람의 성격 여하에 의해 신자로서 그의 가치를 정해서는 안 된다.
접목의 이법은 신자에게 대주의를 촉구한다. 즉 그의 생명 전부가 그에 이식된 그리스도의 영에 섭취되는 일이다.
접목의 경우에 있어서, 만약 대목의 근원에서 싹이 나는 일 있어서, 꽃을 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인가?
그 꽃과 열매는 나쁜 나무의 그것으로서, 악화이고 또 악과이다. 같은 하나의 나무라 해도, 뿌리는 나쁘고 줄기는 좋다.
그러므로 뿌리의 열매는 나쁘고 줄기의 열매는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노력해야 할 것은 뿌리가 싹을 내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이른 바(소위) 뿌리 싹이 번무할 것인가?
수액은 전연 이에 흡수되어, 줄기와 가지는 쇠약해지고, 마침내는 전연 좋은 열매를 맺지 않기에 이른다.
그리스도 신자에게 있어서도 역시 그러하다. 이른 바 ‘육의 가지’가 번무할 것인가?
그는 전연 영의 열매를 맺지 않기에 이른다.
신자의 육은 대목의 뿌리와 한가지로, 전연 죽은 것은 아니다. 아직 살아 있어서,
그에게 내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에 생명의 액즙을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가 힘써야 할 것은, 육으로 하여금 그 가지를 낳게 하지 않고, 영으로 하여금 그 생명의 전부를 사용케 할 것이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에
‘육의 하는 일은 분명하다. 불품행, 더러움, 적의, 다툼∼’이라고 있는 대로이다.
또 동 22절에
‘영이 맺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관용∼’이라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신자는 자칫 잘못 하면 영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육의 일을 하는 것이다.
삼가고 또 조심해야 할 것이다.
로마서 11장에 기록된,
들감람나무를 선한 감람나무로 접붙인 예는, 보통 접목과는 그 목적을 달리 한다.
이 경우에 있어서는, 나쁜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얻고자 하는 접목이 아니라,
약한 노목에 강한 어린 나무를 접붙여 그 세력을 더하기 위한 접목이다.
이 접목법은 지중해안의 감람나무 동산에서 선행된다고 한다.
나쁜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얻고자 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또 늙은 나무를 어린 나무로 되게 하는데 있어서도, 접목법은 유리유익하다.
그리고 인간의 경우에 있어서도, 악인이 선인되고자 하고 노인이 청년으로 돌아가려 하면,
접목의 법칙에 의하는 것이 좋다.
생래의 성을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으로서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여 자기 안(심령 내)에 거하시게끔 할 수가 있다.
이것이 신앙의 도인 것으로서, 죄에서 난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함에 있어서는, 이것을 제외하고 달리 길은 없다.
요한복음 6장 28절에 이르기를
‘그들이 물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데는 무엇을 할 것입니까”고.
예수 대답하셨다, “하나님의 일은 그 보내신 이를 믿는 것, 이것이다”라고’.
접목의 이치에 비추어 보아, 이 말의 뜻을 잘 해득할 수가 있다.
*내촌감삼의 로마서 주석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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