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거듭난 삶 2024. 9. 18.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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핍박하는 대적들에 대한 자세 2

 

성 경: [12:18-21]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 이는 모든 사람과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울 때도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은 신자들이 가능한 한 모든 사람과 평화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을 교훈한다.

 

'할 수 있거든'이란 표현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화합(和合)을 향한 욕구가 아무리 강력해도 소용이 없는 경우가 있음을 시사한다(Harrison). 진정한 평화는 인간의 애씀만으로는 이뤄지지 않는다.

 

평화를 위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으며,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하나님과 죄악된 인간을 화목케 하시려고,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평화를 이루셨다.

이는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면서 평화를 이루어야하는 궁극적인 근거가 된다.

 

하나님께서 죄악된 인간과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처럼,

신자들도 평화를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러므로 신자들은 화평케하는 자들이다.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 이에 대해 1절을 보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1: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16:5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

9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12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고전 4: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7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고후 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5:1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이는 1절의 '형제들아'와 비슷한 애정이 담긴 호칭이며, 이런 호칭들이 여러 곳에 나온다.

 

(고전 10:14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고후 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진노하심에 맡기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테 토폰 테 오르게'를 직역하면 '진노의 자리를 주라'이다.

 

신약성경에서 '진노'가 수식어 없이 나올 때는 대개 '하나님의 진노'로 본다.

본문에서도 수식어가 없으므로 하나님의 진노임이 분명하다.

 

(3:5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13:5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살전 5: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하나님의 진노는 절대 공정하게 나타나는 것이므로 지나치게 관대하거나 치나치게 냉혹하지 않다.

 

또한 심판의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유래하고 악인을 심판하는 주권은 하나님께만 속한다.

 

따라서 사람이 원수를 개인적으로 보복하는 것은 공정성(公正性) 면에서도 문제가 되지만

하나님의 주권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된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 바울이 자주 그러했듯이 본 구절에서도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이 정당하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4: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8: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9: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10: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11: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구약성경의 본문 신 32:35에는 "보수는 내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때에 갚으리로다"로 되어 있다.

 

신명기의 문맥에 비추어 보면, 적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능욕하며 기뻐하면,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원수를 갚기 위해 개입하실 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복수는 자신의 적들에게 뿐만 아니라 그들이 섬기는 거짓 신에게까지도 미친다(Harrison).

 

이처럼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이다.

 

(12:18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9: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살후 1: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으리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예수께서는 이 권한과 권위를 확실히 인식함으로써 많은 수욕(受辱)과 고난(苦難)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보복하지 않고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다.

 

(벧전 2: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우리에게 대한 진노를 그리스도로 인해 거둬 가심을 생각하며,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우리의 억울함에 대한 보복은 포기되어야 하는 것이다.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 앞에서 언급한 내용의 절대적 권위와 확실성을 언급한 것이다.

 

 

[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본절은 70인역(LXX) 25:21, 22을 거의 정확하게 인용한 것이다.

 

(25:21-22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22)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

 

이는 17절의 진술에 대해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서술하는 것이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 원수가 궁핍하며 곤경에 처했을 때, 선행과 친절을 베풀라는 것이다.

 

실제로 원수를 먹이고 마시우는 것은 생명과 관계되는 행위이며, 궁극적인 마시움과 먹임은 생수의 근원,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숯불 - 해석이 다양한데, '숯불''회개의 표'(Klassen), '마음의 불'(Liddon),

'회개와 부끄러움의 가책으로 타는 듯한 고통'(Cranfiedl, Hendriksen, Harrison),

'은혜', 즉 궁극적으로 은혜를 가져오는 '후회와 부끄러움에서 오는 고통'(Godet)등으로 해석한다.

 

대체로 숯불을 쌓는 것은 은혜를 베푸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것만이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허락하신 유일한 복수 방법이다.

은혜를 베풀므로써 원수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와 부끄러움을 갖게 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죄악에서 돌이키게 되어 서로에게 평화와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는 17절에서부터 계속 진행되어 온 내용의 요약이며 결론이다.

 

악에게 지지 말고 - '악에게 진다'는 것은 원수의 악한 행위로 번민하거나 원수에 대해 악으로 갚으려고 악한 행위를 계획하는 것이다.

즉 원수의 악한 행위로 인해 선한 상태를 떠난 것을 의미한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 이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삶으로 곧 선행 구절에서 말한 겸손,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16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봉사,

 

(6-8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음으로 할 것이니라),

 

평화를 유지하는 것(18)을 가리킨다.

 

또한 20절의 원수에게도 친절을 베푸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는 현재의 삶에서 승리하는 생활을 말한다.

 

이 승리는 자신의 노력, 열심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믿는 믿음과 우리를 인도하는 성령의 힘으로 이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