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거듭난 삶 2024. 9. 21.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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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세에 대한 의무 3

 

성 경: [13:4-7]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5)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6)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13:4]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 '선을 이루는 자'라는 표현보다는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심부름꾼'이 더 적절한 번역이라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권세라고 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선을 추구하는 성향을 가진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다만 악을 제거하고 질서를 유지함으로써 대다수의 선량한 국민들을

유익하게 하는 것을 그 본질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역사적, 현상적 고찰에서부터 얻어진 결론일 뿐

권세를 세우신 하나님의 원칙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들 위에 모든 제도,

특히 통치 권력 제도를 세우신 하나님의 원래 목적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1) 천지 창조에서도 나타나듯 질서와 조직은 하나님의 근본 속성이다.

 

(2) 또한 그 질서와 조직을 통하여서만이 교회와 성도가 이 땅 위에서 보호받으며

원래의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갈 수 있다.

 

(딤전 2:1-2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실로 모든 권위와 통치의 모체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러한 뜻을

이 땅위에서 실제로 구현시키기 위하여 파생적으로 그 권력의 일부를

국가의 통치자들에게 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통치자는 그 통치권이

하나님의 법이라는 범위(category)내에 있을 때

그 권세의 신적인 기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 법을 월권할 때는 이미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아니며

단지 성도를 단련시키는 하나의 악한 도구로 전락될 뿐이다.

 

따라서 성도는 원() 권력이자 모법(母法)인 하나님의 뜻과 법을 따라

마음으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면서 선지자적 경고를 부단히 해야 한다.

 

이러한 통치자와 성도 간의 관계성은

'주 안에서 부모를 순종하라'(6:1)

사도 바울의 또 다른 메시지와 일맥상통한다.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 여기서는 '두려움'의 동기가 강조되고 있다.

본문에서 '공연히''근거없이', '목적없이'의 뜻이다.

 

그리고 ''은 헬라어 '마카이라'를 번역한 것인데

이는 로마의 단검을 가리키는 말로 시민을 사형시킬 때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이 구체적으로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권세의 힘만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사소한 잘못에서부터 극형에 이르기까지 그 형벌을 부과하고 집행할 수 있는

권세의 총체적인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합법적인 권세이며,

목적 없이 임의대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하는 자를 징벌한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진노하심 - 여기서의 '진노'는 헬라어 '오르게'의 번역인데

이 말이 신적 진노 곧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세속적 진노 곧 통치자의 진노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혹자는 '진노'(오르게)라는 말이 본서에서 사용될 때

그 의미는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던 것을 근거로 하여,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전자, 즉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Lenski, Morrison).

 

그러나 다른 학자는 3-5절의 문맥상

후자, 즉 지상적 통치자의 진노를 가리킨다고 본다(Kasemann).

 

원칙적인 면에서 보면 지상의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기능,

즉 선을 도모하고 악을 징벌하는 기능에 충실하다고 할 때

이 권세에 의한 진노는 곧 하나님의 진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어떤 통치자가

선을 금하는 법을 만들고 악을 도모한다고 할 때

그 법에 저항하다가 당하는 진노는

하나님의 진노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본문의 진노는 하나님의 진노이자

그것의 대행자인 지상적 통치자의 진노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통치자는 막중한 책임을 느끼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대행(代行)하는 자로서

선을 추구하고 악을 제거해야 하는 본연의 책임을

충실히 수행하는 한계 안에서 그에게 주어진 ''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13:5]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 국가의 권세에 굴복해야만 하는 이유는

'권세'가 칼을 휘두를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그 처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이유는 권세자가 하나님의 사자. 즉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선을 장려하며 악을 징계한다는 대의명분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 권력이 이를 충실하게 수행한다면 성도는 그 권한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 본문의 '노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하여'(to avoid God's Wrath)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권세를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므로

권세에 굴복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 되어

하나님의 진노가 뒤따른다고 볼 수 있고,

국가 권력은 이를 대행하는 역할을 한다.

 

한편 바울은 '양심'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는데,

 

(23: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24:16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고후 1:12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4: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딤전 1:5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이 양심으로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고

악에 대해서는 죄의식을 느끼며

또한 하나님께 대해서는 일종의 의무감을 가지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이 양심을 따라 정당한 권세에 굴복해야 한다.

 

결국 본문을 통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인이 권세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 자명한 당위성(當爲性)을 갖는 것이라고 할진대

소극적인 의미에서는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도 권세에 굴복해야 하지만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의무감과 충성을 위해서 굴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권력에 복종하는 동기는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양심의 준수에서 나타나야 한다.

 

한편 '양심을 인하여' '양심을 따르기 위해서'라는 표현은

기독교인이 지상의 권력에 대하여 지녀야 할 태도의 기준이

융통성 있다는 것을 제시해주는 것으로 해석하게 한다.

 

여기서의 양심은 분명히 하나님 말씀의 법에 근거한 양심이다.

따라서 어떤 지상의 권력이 '권선징악'에 합당하게 그 권위를 행사한다면

마땅히 모든 기독교인들은 그 권력에 복종해야 하겠지만

혹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따르고자 하는 양심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칼을 휘두른다면,

 

(4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지상의 권력에 의한 핍박을 받더라도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도록 행동해야 한다.

 

(4:19-20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또한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감이므로

모든 제도에 대해 순종함에 있어서 주를 위한다는 조건이 있어야 한다.

 

(벧전 2: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3:6]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공세를 바치는 것 - 바울은 국가에 대한 의무 이행 즉 복종의 구체적인 예로

납세(納稅)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본문은 로마의 기독교인들이 이미 로마 국가가 부과한

세금을 내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로마의 기독교인들이 납세를 거부하거나 납세에 대한

저항을 하고 있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혹 로마의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이교도의 국가인 로마 정부에

세금을 내는 것을 못 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징벌이 두려워서 억지로 세금을 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은, 비록 이교 국가라 하더라도

로마 정부가 가진 권위를 부여하신 분이 하나님이므로

세금을 바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적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자는 세속적인 권력에 대한 납세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는

바울의 납세관이 복음서에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22:21)

예수의 가르침에 의해 영향 받았다고 본다(Lenski).

 

한편 일부 영지주의자들은 이 구절을 해석하기를,

여기에 나온 권세에의 복종은 지상의 권세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천사나 보이지 않는 권세자들에 대한 복종이라고 했는데,

이레니우스(Irenaeus)는 그의 저서 '이단 논박'(Against Heresies, V. 24)에서

본 구절에 대하여 이 문맥에서 말하는 권세에의 복종을

보이지 않는 영적 세력이 아니라 지상의 통치 세력에 대한 복종임을 증거 했다.

 

 

하나님의 일군 - 본문의 '일군'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이투르고이'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이 말은 본래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의 왕적 제사장직에서 온 말로

70인역에서는 '제사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코이네(Koine) 헬라어 개념에서는 일반적인 국가의 관리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또한 신약성경과 초대교회의 문헌들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고귀한 봉사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다.

 

(15: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1:23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고후 9:12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

 

대개의 학자들은 이 말이 4절의 '사자'(디아코노스)보다

높은 권위를 가진 말이라고 본다(Murray, Bruce).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 여기서 '이 일'이 세금을 징수하는 일을

가리킨다고 볼 경우 이는 관원들의 직무를 부분적으로만 표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관원들이 오직 세금을 징수하는 일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 일'이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직무를 가리킨다고 보는데(Lenski)

이렇게 보는 것이 본문의 의미를 좀 더 명확히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관원들이 세금 징수의 일을 하는데 그 일은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통치자들에게도 깊은 의미를 제공한다.

 

즉 통치자들은 그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

바로 하나님께서 위임해준 일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하며

그들의 직무가 갖는 이러한 성격을 잘 인식하고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섭리 안에 머물러야 한다.

 

한편 '항상 힘쓰느니라'는 말은 적어도 통치자들이

공공의 일을 충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13: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 '공세'(포론)

피정복민이 지배 국가에 바치는 '조공'(朝貢)을 의미하며

'국세'(텔로스)는 국가에 내는 세금을 가리킨다.

 

6절에서는 독자들이 세금을 바쳐야 하는 근거와

세금을 부과하는 정당성을 묘사한 것이고

본절에서는 마땅히 납세를 해야 할 것임을 언급한다.

 

만약 당시의 모든 성도들이 다 세금 내는 일을 잘 준수하였다면

바울이 본절을 말해야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이로 보아 당시에 세금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혹자는 이들이 세상의 일상적인 질서, 현세의 정치 질서를 부정하는

열광주의자들이었을 것이라고 본다(Kasemann).

 

따라서 바울은 본절을 통해 그들에게 현세의 질서는 하나님에 의한 것이며

따라서 모든 사람은 이 질서 안에 머물러 있어야함을 말하는 것이다.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 여기서 두려움과 존경은

실제적으로 권력 또는 권력을 가진 자에 대한 내면적인 태도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성도들은 권력에 대해서 절대적인 두려움을 가져서는 안 되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秩序)에 순종하는 의미에서

정당한 두려움과 존경을 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