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과 누가복음 2
그리고 마태복음의 결여를 채우는데 가장 유력한 것은 누가복음이라고 생각한다.
누가복음은 마태복음과는 전혀 다른 방면에서 예수를 관찰한 글(책)이다.
마태복음이 예수를 유대인에게 소개하려 한데 대하여,
누가복음은 그것을 그리스(헬라 Greece) 사람에게 하려 했다.
따라서 마태복음은 회고적인데 대하여 누가복음은 전진적이다.
마태복음은 율법적인데 대하여 누가복음은 예언적이다.
마태복음은 국가적인데 대하여 누가복음은 세계적, 인류적이다.
누가 자신이 이방 사람이었던 까닭에, 그는 마태와 전혀 다른 눈(안; 시계 mental vision)을 가지고서, 예수와 그 사업을 본 것이다.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는, 마태복음에 나타난 그와는 별인(別人)의 감이 있다.
따라서 누가복음에 의해 양성될 때, 우리들은, 마태복음에 의해 양성된 것과는 전혀 별종의 신자로 되는 것이다.
I. 누가복음은 시적이다.
그 제1장에 마리아의 찬미가가 있다.
이에 이어서 노래로서 성자의 탄생을 목양자에게 알리고, 시므온은 노래로써 그를 성전에 영접했다.
그 문제에 있어서, 누가복음은 훨씬 마태복음 이상이다. 옳다.
르낭(Renan)은 말했다.
'누가복음은 사람에 의해 기록된 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이다.'라고.
Ⅱ. 누가복음은 여성적이다.
마태복음이 요셉에 치중하고 있는데 대하여, 누가복음은 마리아에 치중하고 있다.
마태복음에 있어서는, 성자 강탄의 소식을 받은 것은 요셉이다(1:20이하).
누가복음에 있어서는, 천사는 곧 마리아에게 임하여 그녀에게 이 경사를 전했다.
남계를 중히 여긴 유대인 위해 집필된 마태복음은 요셉의 계통을 싣고,
여성을 중히 여긴 그리스인(헬라인) 위해 집필된 누가복음은 마리아의 계통을 분명히 하려 했던 듯하다.
여기서 이것에 대해 상세를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누가복음이, 마태복음에 비하여 전체로, 여성적인 것은, 성서 연구자가 동일하게 인정하는 바이다.
Ⅲ. 누가복음은 복음적이다.
이 점에 있어서 누가복음은 현저하게 마태복음과 다르다.
누가복음에는 마태복음의 율법적인 데가 아주 적다.
누가복음이 보여주는 예수는, 모세 율의 역신을 목적으로 하여 세상에 나타난 분은 아니다.
그는 모세가 가져다주지 못한 것을 가지고서 세상에 임한 것이다.
'내가 만민에게 관계되는 커다란 기쁨의 소식을 너희에게 고하련다. 그것은 오늘 다윗촌에 너희 위해 구주가 나신 것이다. 이는 주님이신 그리스도이다'(누가복음 2:10일역) 라는 것은,
천사가 목양자에게 고한 말이다. 여기 하나님의 섭리에 있어서 신사업이 시작한 것이다.
인류는 여기서 새로이 시조(始祖)를 얻은 것이다. 제2의 아담이 태어난 것이다.
바울의 말로서 한다면 여기서
'옛 것은 지나가고 만물 모두 새롭게'(고린도후서 5:17)된 것이다.
누가복음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뒤를 받아 이것을 완성하기 위해 출현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에 대신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출현되어 유대교는 불용의 것으로 된 것이다.
누가복음의 정신을 가장 잘 전하는 것은 그 제15장이다.
유명한 방탕 자식의 비유는 누가복음의 진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잘 보여 있다.
동시에 또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 지가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또 사람은 어떻게 하여 하나님께 구원되는지, 그것도 또한 밝히 교시되어 있다.
방탕 자식은 그 행위에 의해 구원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버지의 사랑을 믿음으로서 구원되는 것이다.
방탕 자식은 죄의 몸 그대로 아버지께로 가지고 와서, 그 신뢰심에 의해 구원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아버지 편에 있어서는 그 아들이 그렇게 하기를 바라 마지않는 것이다.
아버지가 그 아들이 구원되기를 바라 마지않는 그 정은, 아들이 스스로 구원되기를 바라는 정보다는 훨씬 간절한 것이다.
'그 아버지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달려가, 그 목을 껴안아 입 맞추고∼'(누가복음 15:20)라고 있다.
이것이 아버지가 (길 잃고)헤매는 자식에 대한 정이다.
그리고 이것이 또 하나님께서 (길 잃고)헤매는 인류에 대한 정이라고 누가복음의 예수는 가르치신 것이다.
누가복음은 하나님의 무조건의, 전연 은혜적인 사면(사죄)을 전한다.
누가복음이 전하는 하나님은 엄격한 입법자는 아니다.
또 각박(hard heartedness)한 재판인은 아니다.
자애의 아버지이다. 관대한 임금이시다. 친밀히, 가까이하기 쉬운, 인류의 벗 (친구)이시다.
말할 것도 없이, 누가복음이 전하는 그리스도는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이시다.
그 서한에 있어서, 세 번 '내 복음'이라고 한 것은, 누가복음을 가리켜 한 것임은, 고대부터 주해자가 주창해 온 바이다.
(로마서 2:16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16: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디모데후서 2:8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바울의 누가복음에 있어서는(영향은), 야고보의 마태복음에 있어서와 (영향과) 같다.
만약 누가복음을 바울의 복음서라고 할 수가 있다면, 마태복음을 야고보의 복음서라고 할 수가 있다.
신앙의 칭찬 자와 행위의 칭양 자, 복음의 창도자와 율법의 선전자, 이자는 전연 그 자질을 달리하면서, 각자 잘 예수의 반면을 대표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가 마태복음을 읽듯, 누가복음을 읽을 것이면, 그 정성, 그 신앙이 아주 일변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누가복음으로써 양성 될 때, 우리들은 단엄(firmly) 일방의 신자로 될 위험은 없다.
누가복음은 우리들을 부드럽게 한다. 자유롭게 한다. 관대하게 한다.
자기를 반성하고 그 오예를 탄식케 하는 것으로 그치게 않고서, 하나님을 우러러 그 사랑을 기뻐하게 된다.
누가복음은 우리를 외축케 하지 않는다. 우리를 신장(발전 extension)케 한다.
우리로 하여금 자족케 하고, 남을 판단하는데 관대케 한다.
누가복음으로서 양성 될 때, 오늘의 그리스도교회 같은 냉담 각박, 거의 소(小) 지옥과도 같은 제도가 생겨 날리는 없다.
물론 마태복음 다독의 해가 있듯 누가복음 다독의 해도 있으리라.
성애는 애정으로 변하기 쉽고, 관용은 방종으로 화하기 쉽다.
우리들에게 누가복음과 함께 마태복음을 읽음의 필요가 있다.
하지만 가장 큰 것은 사랑인 까닭에, 사랑을 기초로 하는 누가복음은, 의를 근본으로 하는 마태복음보다도 커다란 글(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수는 보다 명백하게 누가복음에 있어서 명시되어 있다.
그리스도교라고 하면, 마태복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누가복음이다.
만약 어떤 비상한 경우에 처하여 성서 중 유일한 글(책)을 택하도록 어쩔 수 없이 된다면, 오인은 물로 마태복음을 두고서 누가복음을 택하는 자이다.
특히 우리들 일본인에게 있어서 누가복음은 아주 해득하기 쉬운 글(책)이다.
그 사담적(사설적)인 것과, 시가 적인 것, 인정적인 것 등은, 강하게 우리들의 특성에 호소하여, 우리로 하여금 이것을 감상(admiration)하기에 아주 쉽게 한다.
나는 일본인의 복음서로서 누가복음을 나의 방인(국인)에게 추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내촌감삼의 (1912년 7월 '성서지연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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