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우리들은 성서 전체의 입장에서 예수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거듭난 삶 2024. 10. 24.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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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성서를 읽는 자는 먼저 처음으로 마태복음을 읽는 것을 상례로 한다.

그리고 시작으로 마태복음을 읽었기 때문에, 끝까지 이를 읽어나간다.

 

마태복음은 그가 그리스도교에 들어가는 입교의 문인 동시에, 또 그의 그리스도교이다.

 

그는 종생 마태복음에 의해 얻은 최초의 인상(an impression)을 버리지 않는다.

그의 신앙은 자연히 마태식으로 된다.

그는 제일 많이 마태복음을 읽는다. 그의 그리스도교는 마태복음의 그리스도이다.

그는 마침내 그리스도교란 마태복음인 것처럼 생각하기에 이른다. 이는 결코 나쁜 일은 아니다. 마태복음은 위대한 글이다.

 

유명한 성서학자 르낭(Renan)은 말했다.

 

'마태복음은 그리스도교가 낳은 가장 중요한 글()이다'라고.

 

그리고 이 글()에 의해 그리스도교를 배워, 오류(mistake)에 빠질 염려는 없다.

마태복음은 잘 그리스도의 정신을 전하고, 그의 교지(tenets; doctrine)를 분명히 한다.

 

사람에게 그리스도교를 소개함에 있어서, 아마도 이 보다 더 귀한 글()은 없으리라.

 

마태복음이 신약성서의 처음에 두어진 것은 결코 의미 없는 일 아니다.

하지만, 말할 것도 없이 마태복음은 성서의 전체는 아니다.

그 소중한 부분이지만, 그러나 그 일부분 됨에 지나지 않는다.

 

마태복음은 한 방면에서 본 그리스도관이다. 그러므로 그 방면은 잘 취급하고 있지만, 그러나 다른 방면에서 하는 관찰에 있어서는 결여되고 있다.

 

그리스도를 완전히 보려하면 마태복음만으로는 족하지 못하다.

우리들은 다른 방면에서 한 관찰을 가지고서 마태복음의 관찰을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로 마태복음에 의해 이룩된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편파(편견 partiality) 안 되려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에 있어서 볼 수 있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마태적인 편파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이를 알기에 어렵지 않다.

 

마태복음은 예수를 유대인에게 소개하기 위해 쓴 글()이다.

그리고 그 저자는 사도 마태로, 그는 사도 야고보와 마찬가지로 유대적 경향의 사람이었다.

유대적 경향의 저자에 의해 유대인 위해 저술된 이 글()이 유대적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은 조금도 이상히 여길 바 못된다.

 

마태복음에 의한 예수는 유대인의 기름부음 받은 자(수고 자 messiah)이다.

그는 아브라함의 후예(후손)로서, 또 다윗의 후예(자손)이다.

 

(마태복음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즉 유대인의 이상을 몸에 새겨 지니고서 세상에 태어나온 분이시다.

따라서 예수의 말씀하신 복음은 율법과 예언을 떠난 것은 아니다.

그 연속이다. 그 정점에 달하신 분이다.

 

예수는 달리 새 가르치심을 전하려고 세상에 오신 것은 아니다.

옛 가르치심을 완성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내가 율법과 예언자를 버리기 위해(폐하기 위해)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내가 온 것은 이것을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성취하기 위해서이다' (마태복음 5:17일역)라고 있다.

 

이른 바 산상의 수훈이란 것은, 이는 새로운 교훈은 아니다.

옛 교훈의 새 주해이다.

 

마태복음에 의한 예수는 신종교의 창설자는 아니다. 구 종교의 개혁자이다.

 

그는 어디까지나 유대인이다. 요셉의 아들로서 인정된 예수이다.

교회의 기초를, 순수한 유대인인 시몬 베드로 위에 둔 것이다.

 

(마태복음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복음의 예수는 율법의 완성자이다.

그러므로 그 복음은 율법의 보다 완전한 것이다.

 

사도 야고보의 이른 바 '자유 하게 하는 완전한 율법'(야고보서 1:25)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율법은 아니다.

율법 이상으로서, 은혜요, 신앙이라는 바울의 입장은, 마태와 야곱이 한가지로 수긍(accept; 승낙)하지 못했던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마태의 이해한 바에 따르면, 복음은 율법의 보다 높고, 보다 깊고, 보다 거룩한 것이다.

그래도 또한 율법이다. 육의 율법인데 그치지 않고 또 영의 율법이다.

 

행위를 지배하는데 그치지 않고 또한 의지를 주장하는 율법이다.

모세의 율법의 영화 한 것, 그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것은, 산상수훈의 요지이다.

 

'옛 사람에게 말하여 간음하지 말라고 한 것은 너희가 들은 바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무릇 색정을 일으키기 위해 여인을 보는 것은,

심중 이미 간음한 것이라'(마태복음 5:27-28일역)

 

이렇게 하여, 예수에 의해, 율법은 일층 정세 하게, 일층 엄밀하게, 일층 예민해 진 것이다.

 

사도 야고보의 말로서 한다면,

 

'사람이, 율법을 다 지킨대도, 만약 그 하나에 잘못하면, 이는 그 전부를 범한 것이다.'(야고보서 2:10일역)는 것으로 된다.

 

만약 율법은 죽이는 것이라는 바울의 말이 진리라고 하면, 마태복음에 의해 전해진 예수의 교훈은, 옛 모세의 율법보다 지나게,

 

'양쪽에 날선 검보다도 날카롭고, 영과 혼 또는 관절과 골수까지 찔러 나누고,

마음의 생각과 뜻(; 의향)을 구별하는 것'(히브리서 2:12일역)이다.

 

이에 있어서, 주로 마태복음으로서 양성된 신앙이 어떤 한 것인지, 그것을 알기에 어렵지 않은 것이다.

마태복음은 보다 높은 모세의 율법을 전해 주는 것이므로, 이에 의해 양성된 신자는 율법의 엄수자임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너희 의가 학자(서기관)와 바리새인의 의에 지나지 못하면, 너희는 결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마태복음 5:20)고 있으므로,

 

신자는 바리새인(8369 역주 참조) 이상의 의인이 되고자 하여, 거룩하고 완전한 율법의 실행을 힘쓰는 것이다.

 

이는, 실로 치하할 일, 장려해야 할 일임은 말할 것도 없다.

신자는 정의의 실행에 있어서 바리새인의 배후에 뒤떨어져서는 안 된다.

 

하지만, 율법은 아무리 높다 해도 율법이다.

그리고 율법은 바울이 말한 대로 '육 때문에 약한 것'(로마서 8:3)이다.

 

율법은 약한 인간이 지키려 해서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옳다, 율법은 거룩하면 할수록, 이것을 지키기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조차 지키기 어려운 자가, 이 보다 더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우리들은 구원 얻기 위해서는 율법 이외의 어떤 것을 요하는 것이다.

만약 예수께서 보다 높은 율법을 선포하는데 그치셨을 뿐이라면, 우리의 구원은 전보다도 일층 곤란해진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복음을 마태복음뿐으로 알 때, 우리들은 곤란에 빠지는 것이다.

, 우리는 바리새인 이상의 바리새인으로 되기 쉬운 것이다.

 

자기를 책하는데 보다 엄격하게, 따라서 타인을 비판하는데 보다 준혹하게, 몸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고자 할 뿐 아니라, 마음에 있어서 일점의 오예를 남겨두지 않으려 우리들은 자타를 깨끗이 하기 위해 골몰해도 해가 모자라는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이에 있어서 자유의 복음은 속박의 율법으로 되어, 우리들은 예수의 제자가 되어도, 몸에 쾌활을 느끼는 일 적고, 마음에 관용의 염() 부족하여, 복음의 은혜를 겨우 소극적으로만 느끼고, 이것을 적극적으로 맛보지 못하는 것이다.

 

주로 마태복음으로서 양성될 때, 우리들의 신앙은 외축(shrinking)하기 쉽다.

 

그리스도 신자라고 불리 우는 사람 중에 전전긍긍(timidness), 살얼음(박빙 thin ice)을 밟는 듯한 느낌을 가지고서 겨우 그 희미한 신앙을 유지하는 자 많음은, 그 원인을 마태복음 다독의 해()에 돌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마태복음만이 유일한 복음은 아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보충하기 위해, 달리 복음을 마련하셨다.

마가복음이 있다. 누가복음이 있다. 요한복음이 있다. 로마서가 있다. 고린도전후서가 있다.

 

이것은 모두, 마태복음 또는 그것과 동 종류의 글()인 야고보서와는 전혀 별다른 방면에서,

예수와 그 교훈을 본 글()이다.

 

우리들은 성서 전체의 입장에서 예수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를 오해함의 위험이 있다.

 

그리고 예수를 오해할 때, 우리는 자기를 오해하고, 오랜 동안 오류의 미로(a maze)에서 방황하며 무익한 고민을 계속하는 어리석음을 자행하는 것이다.

 

 

*내촌감삼의 (19127'성서지연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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