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평화는 땅에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 중에 있다

거듭난 삶 2024. 11. 23.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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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의 고지(예고)

 

누가복음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올해(1917)의 성탄절(Christmas)에 즈음하여 현저한 한 가지 일이 있다.

 

베들레헴의 마을 위에 자취를 감추어 볼 수 없던 십자가의 깃발(flag)이 펄럭이는 일, 이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생탄이래 일찍이 다만 한 번 있었을 뿐의 일이었다.

 

그의 생탄 당시, 팔레스틴(1299역주 참조)의 땅은, 이미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고,

뒤에 계속하여 회교도(4304역주)의 손에 옮겨져, 이레(since)로 오랜동안 성지는 이교 신자의 유린에 맡겨졌다.

 

1191, 십자군의 결과, 일단 그리스도교도의 수중에 회복되어, 전후 100년 남짓하게 유지되었지만, 다시, 터키인의 탈취하는 바로 되어, 결국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금년 금월 1일 성지는 오랜만에 그리스도교 정부 하에 귀속되어, 예루살렘 또는 베들레헴에 있어서, 그 군대의 보호 하에 성탄절이 지켜지게 되었다.

이는 실로 현저 특별한 사실이다.

 

팔레스틴의 땅이 다시 하나님의 선민에게 복귀될 것은 성서가 명백하게 예언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의 실현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이는, 이른 바(소위) 때의 징조이다.

 

하나님은 굳게 그 약속을 지키시고, 세상의 변천에 관계없이 이를 실행하신다.

 

하나님은 이미 4천년 동안 유대인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 존속케 하시었다.

그리고 이제 또 그 땅을 회복케 하시려는 것이다.

 

세계에 살포(sprinkling)1,200만의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부조의 나라로 돌아올 날도 결코 멀지는 않으리라.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는 모두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후에 주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임하시는 것이다.

 

예수의 탄생(birth), 이것을 지상의 사건으로서 볼 때, 극히 미소(지소 minute)한 것이다.

 

강보(포대기)에 쌓인 한 영아가, 구유(manger)안에 누여 져 있음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을 천상에서 볼 때, 일찍이 우주에 없었던 것 중 최대의 사건이었다.

이때 실로 만민의 구주가 태어나신 것이다.

 

이러므로, 천사는 목양자에게 임하여 큰 기쁨의 소식을 전하고, 허다한 천군은 나타나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미하여 말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영광, 하나님께 일을 찌어다. 땅에는 평안, 사람에게는 은혜가 있을 찌어다.'라고.

 

실로 구주의 생탄에 적당한 찬미의 노래(찬미가)이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안, 사람에게는 은혜, 어떤 시가 이것보다 아름다운 것이 있으랴.

 

옳다. 말은 극히 아름다운 바가 있다.

하지만 사실은 어떤가? 과연 이 시 같은 것일까?

 

천상의 일은 잠시 두고, 땅에는 과연 평안이 있는가?

아니, 이 아름다운 찬미가가 찬가된 이래, 이때까지 그 말의 실현을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예수의 생탄과 함께 헤롯의 박해는 시작되고, 2세 이하의 영아(infant)는 모두 다 살해되어

집집에서 비통한 울부짖음의 소리가 올랐다.

예수는 요셉과 마리아에 동반되어, 표연(wandering) 애굽(Egypt) 땅으로 도피했다.

 

이래, 인자는 베개 할 곳 없었고, 그리고 그 최후는 십자가였다.

이에 따른 것은 사도들의 받은 박해였다.

 

실로 예수는 자신이 '내가 온 것은 땅에 평화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도리어 칼()을 주기 위해서다'(마태 10:34이하 및 눅12:51이하 참조)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선언대로, 예수의 있는 곳, 반드시 분열은 이에 따랐던 것이다.

 

사람의 흉중에 있어서 그러하다. 가정에 있어서 그러하다. 국가에 있어서 그러하다.

그리고 기원의 제 천구백십칠(1917)년인 금년의 성탄절만큼, 땅에 평안이 결여된 때는 없는 것이다.

 

지금 전구, 전미, 전 아시아가 전쟁상태에 있다. 특히 그리스도교국이 그러하다.

우리에게 허다한 선교사를 파견한 미국 같은 데 이르기까지, 거국(국민동원)하여 전쟁열에 심취하고 있는 것이다.

 

근간 미국의 친구에게서 내 손에 배달된 서간 같은 것은, 관현에 의해 개봉되고 검열제의 날인(stamping) 투성이었다.

 

저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미국으로서 개인의 신서에 칼질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르렀다는 데는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는 실로 북미 합중국 건국 이래 미증유의 진사(희귀사)이다.

 

또 전번 미국의 어느 교회에서 배포한 한 팸플릿(pamphlet)을 보건대,

이르기를

 

'이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God's war)이다.

옛날은 하나님께서 몸소 기적으로서 악을 징치하셨지 만도, 이제는 이를 않으신다.

하나님은 일찍이 홍해에 바로의 군세를 빠지게 하신 것처럼 오늘 북해에 카이제르의 군대를 장사하지 않으신다. 오늘 정의의 무기는 신앙이 아니라 대표이다'라고.

 

옳다. 지금의 세상에 귀히 여김받는 것은 대 구경(총구 calibre)의 거포이다.

다이너마이트(dynamite)이다. 잠항정이다.

평화란 경건(pious)한 공상(dream)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 없이 무슨 진보랴! 무슨 행복이랴!

 

니체는 이르기를

 

'어느 사람이 말했다, 평화(화평)를 좋아하는(사랑하는)자는 복이다. 그 사람은 신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으로이다. 하지만 나는 말하리라. 전쟁을 좋아하는 자는 복이다. 그 사람은 오딘(군신)의 아들이라 불리 울 것임으로이다'라고.

 

베르하르디도 또한 말했다.

 

'이 세상에 있어서 최대의 선사를 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전쟁이다'라고.

 

이 때에 있어서 땅 평화를 노래 구가(glorification)하는 자는 누군가?

그것은 공상으로서는 좋다. 오락으로서는 가하다. 하지만 실제 사회에 대해서는 평화의 소리는 아무런 권위도 없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은혜 있을 찌어다(또는 사람 중에는 호의가 있을 찌어다라고 하는가?

 

이것 또한 진실이 아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 위해 하나님의 은혜 있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

사람, 상호간의 호의의 결핍은 물론이다. 도리어 그 반대가 사실이다.

 

보라, 영미인이 독일인을 증오하고, 독일인이 영미인을 저주하는 마음 격렬함을.

 

그들은 그리스도교는 사랑이라고 가르치면서, 그 자신 악마의 마음을 품는 것이다.

 

시인 단테, 그 신곡 지옥편중, 악마를 그려 심각을 다하고 있다.

즉 악마는 끊임없이 6개의 턱(아가미)을 움직여, 가룟 유다, 카시우스, 브르투스(8권 역주참조), 반역자를 물고, 또 언제나 여섯 개 잎사귀의 날개를 펄럭여 냉풍을 일으키고, 이것을 세계에 보내고 있다.

 

그리고 이 바람이 불어 닥치면, 사람들은 모두 서로 미워하는 것이라고. 시인이 노래한 것 같이 증오심은 실로 악마의 불어대는 정신이다. 그리고 오늘 전 세계가 이 정신으로서 채워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땅에는 평화, 사람 가운데는 호의 있을 찌어다',

 

전혀 사실에 적합하지 않는다. 아니, 세계의 과거 및 특히 그 현상은, 도리어 이것의 반대를 증명하는 것이다.

 

'땅에는 전쟁, 사람 가운데는 악의 있을 찌어다'이다.

 

그리고 실로 천군의 찬미가를 이상 같이 역하는 것은 정역은 아닌 것이다.

이것을 원어로 읽을 때, 명백한 다른 역을 붙일 수가 있다.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영광, 하나님께 있을 찌어다. 땅에는 평화, 은혜 입은 사람 가운데 있을 찌어다.'라고.

 

즉 안다.

천군이 노래한 제목은 천지인의 셋이 아니라, 천지의 둘 이라는 것을.

또 평화는 만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 입은 사람에게만 있음을.

 

그렇다면 이른바 '은혜 입은 사람'이란 누구인가?

 

여기에 '은혜 있을지어다'로 역 된 원어는, 혹은 마가복음 111절에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라'(일역)로 역 되어 있고,

 

혹은 마태복음 317절에

'이는 내 마음에 맞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일역)고 역 된 것과 같은 말(동어)로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에 맞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만족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천군의 찬가는 이것을 바꾸어,

 

'하늘에는 영광, 하나님께 있을 찌어다. 땅에는 평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가운데 있을지어다'로 노래할 수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는 그 목자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또 모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그리스도의 성을 받은 자이다.

그리고 이렇게 읽을 때, 이 노래는 전연 사실에 부합하는 것이다.

 

평화는 땅에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 중에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확실한 사실이다.

 

세계는 모두 전란 중에 시달린다 해도, 다만 그리스도에 의해 맺어진 형제 사이에는 온화(peaceful)한 참된 평화가 있는 것이다.

취미의 친구 또는 이해의 친구 사이의 평화는 깨어지리라.

하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바 신앙의 친구 사이에 있는 평화는 영원히 동요되지 않으리라.

 

인종의 여하를 막론하고, 연령의 여하를 막론하고, 직업이 어떠함을 묻지 않는다.

 

오늘 구주(Europe)의 천지에 나라는 나라와 싸운다고 해도, 양군의 병사 중, 진중 상봉하여 굳게 손을 잡고, '내 형제여'하고서 함께 성탄절을 축하할 수 있는 허다한 크리스천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서, 아무리 노력해도, 영구한 평화를 획득할 길은 없다.

 

이에 반하여 다만 그를 오로지 영접할 것인가? 참된 평화는 따라서 임해오는 것이다.

 

옳다. 평화는 은혜를 입은 사람 가운데 있다. 평화는 크리스천의 심령에 거한다.

 

하지만, 다만 그것만으로 그칠 것일까?

천군의 찬가가 의미하는 바는 다만 현재의 사실로 그칠 것인가?

아니, 평화는 지금 크리스천의 심중에 거하고 그리고 또 후에는 전세계에 있게 되는 것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오도다. 그는 의롭고 구원을 주시며 유화하여 나귀에 타도다.

내가 에브라임에서 군사를 끊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끊으리라.

전쟁의 활도 끊어 버리리라. 저가, 나라 나라의 백성에게 평화를 전하리라.

그 정치는 바다에서 바다에 미치고, 강에서 땅 끝까지 미치리라'(스가랴서 9:9-10일역)

 

그리스도 다시 오시는 때, 평화는 물이 대양을 덮음같이 온 땅을 덮기에 이르는 것이다.

지금은 소수 신자의 심령적 사실에 지나지 않는 평화가, 그때, 전 세계의 역사적 사실로서 실현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천의 최후의 희망은 오로지 이 점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관한 최후의 희망은 오로지 이 점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의 예언은 이미 모두 다 이룩된 것 아니다.

아니, 그 가장 중대한 것이 아직 채워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다.

크리스천은 지금도 이룩되지 않고서 채워지지 않은 대() 희망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희망은 비로소 채워지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회복, 유대인의 귀국 등은 모두 그 징조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평화의 주 몸소 평화를 이 땅에 가져오시는 것이다.

 

평화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 오지 않는다. 주 예수 그리스도, 이것을 가져오신다.

우리들은 다만 믿고 이를 대망할 것이다.

 

이러므로 사람아, 함부로 이 세상의 풍성(소문)에 동요되지 말라.

 

노독강화위원의 회상(회담) 무어랴?

원수 힌덴부르크(2334역주)의 전략 무어랴?

수상 로이드 죠지(1303역주)의 연설 무어랴?

대통령 윌슨(본권 52p 참조)의 교서(message) 무어랴?

 

평화는 그들의 노력에 의해서는 결코 오지않는 것이다.

참된 평화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장중에 있는 것이다.

 

정치가는 마음 내키는 대로 준조절충을 힘쓰라.

신문지는 좋아하는 데로 시국의 관찰을 보도하라.

 

하지만 우리들 크리스천은 이에 관여하지 않는다.

우리는 1900년의 옛날, 베들레헴의 하늘에 나타나는 천군의 노래에 하나님의 성지를 찾는 것이다.

 

그가 오시는 때, 신천신지는 건설되어, 참된 평화는 바다에서 바다에 미치고, 가에서 땅 끝까지 미치는 것이다.

 

평화, 평화, 세계의 평화, 이는 꿈은 아니다. 사실이다.

하지만 군대와 외교에 의해 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재현에 의해 임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인내로 그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마라나타,

주여, 오시옵소서!

 

*내촌감삼의 (1223, 성서강당에 있어서, 등정무필기)

(19182'성서지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