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고지(告知)의 해석
누가복음 2장 14절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인생에 비통 많다.
여기에 친구의 의찰(doubt)과 배반(treachery)이 있다.
여기에 죽음이 있다. 애별(哀別)이 있다.
저 의인은 악상(험상 roughness)으로서 나타나고,
저 악마는 천사 같은 모습으로서 세상에 임한다.
국민 서로가 물고(찢으며), 동포 서로가 학대한다.
간과(무력 전쟁) 끊일 사이 없다. 사기 함정은 날마다의 사건이다.
누가 말하는가? 인생에 희락 많다고, 귀를 흙(땅)에 대고 들으라.
과부와 고아가 하늘을 향하여 호소하는 소리는 땅 끝에서 땅 끝에 달하지 않는가?
천도(天道)는 옳은가 그른가?
인생은 슬픔인가 환희인가?
철학자의 해명 의뢰할 바 못 된다.
시인의 몽상은 기다려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암흑 사면을 덮어 천상천하 일점의 희망도 남기고 있는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오인은 실망하지 않는다.
광명은 이미 세상에 임했다. 개조는 이미 시작되었다.
탁세(현세)의 소양(소제 cleaning)은 이미 그 단서를 열어 천국은 날마다 이 세상에 가까워 오고 있다.
1900년여의 옛적, 유다의 산지인 베들레헴 부근의 목장에 있어서, 가난한 목자의 일꾼이 양을 치고 있던 때에, 주의 영광은 사면을 채우고, 하늘에서의 소리 있어 이르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 있을 지어다.
땅에는 평안, 사람에게는 은혜 있을 지어다.'(누가복음 2:14일역)
나는 이제 조금 천사의 이 말에 대하여 나의 주해를 시도하고자 한다.
이는 실로 다윗의 후손으로서 요셉의 아들인 예수의 강탄을 고지(득)한 천사의 소리였다.
비난 자는 말하리라, 천사에게 입 없다, 그가 어찌 소리를 발할 수 있으랴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성의(聖意)를 사람에게 전하려 함에 있어서는, 그는 반드시 성음을 발함의 필요 없다.
하나님은 영이시매 그는 곧 사람의 영에 진리를 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거룩한 밤에 있어서 목자가 받은 하늘에서의 고지(전신)는, 객관적(objective)이었는지 주관적(subjective)이었는지는, 오인이 깊이 탐구함의 필요 없는 것이다.
요는 고지(告知) 그것의 성의를 찾음에 있다. 이는 실로 놀라운 고지였다.
이는 실로 무의미한 고지가 아니었다.
이는 실로 사람의 날조(fabrication)에 의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하여 목자가 이 소리(음성)에 접했는가는 과학상의 문제로서 남아 있을 것이지만,
그 측량할 길 없는 심원한 의미에 있어서,
오인 확실히 그것이 하늘에서의 소리(음성)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출생은 실로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의 최대의 사건이다.
그가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인생은 실로 일변하고, 또 일변하고 있다.
모든 좋은 것(선한 일)은 그의 교훈과 생애에 의해 인류 중에 주입되고, 암흑은 그의 앞에서 사라지고, 죄악과 교훈은 그의 감화에 의해 감소되어가고 있다.
사람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을 수 없기도 하리라.
하지만 누구나가 그의 사업을 의심할 수 없다.
천사는 실로 이 거룩한 밤에 그리스도의 성업이 무엇인지를 고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영광 하나님께 있을 지어다.'(14-일역)
'지극히 높은 곳 - 물론 하나님이 계시는 곳을 말함이다.
유대인의 사상에 따르면, 하늘에 3계(삼층천)있고, 하나님의 보좌는 그 최고 소에 있다는 것이고 보면, 혹은 그런 의미에서 그렇게 전해진 것이리라.
하늘은, 지리학상 또는 천문학상 어디(where)에 있는 것인지, 이는 물론 오인이 아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강세에 의해, 천상에서는 영광이 하나님께 돌아감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이를 좋게 보셨다.
'온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궁창은 그 손으로 지은 것을 나타내 보이는 도다'(시편 19:1일역).
하늘의 별과 들(야)의 꽃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곤충, 모두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는 것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가장 큰 역사(창조)는 사람이고, 사람 중에 가장 큰 것은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으로서, 영웅, 위인, 열부, 결사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 없다.
그리스도 세상에 임하지 않으셨을 것인가, 조화의 위업은 불과 그 반의 공을 올린 데 그치고, 하나님은 아직 하나님으로서의 본성을 다 자현 했다고 할 수는 없으리라.
들의 백합화의 향기로움도, 공중의 새의 아름다움도, 물질적 조화에 하나의 결여 없대도,
사람에게 죽음의 공포 있고, 비탄이 있고, 친구의 이간(rangement)있고, 형제의 모반 있고,
군부의 압제 있고, 영인(영악인)의 발호(횡행 rampancy)있어, 조화는 아직 완전한 것이랄 수 없다.
옳다. 인생의 완성은 조화 최종의 목적이매, 이 목적이 달성되지 않는 한, 하나님은 무익하게 우주 만물을 지으셨달 수 있으리라.
그리스도 구세의 사업은 조화의 최대 최중의 사업으로 이것 성취됨으로서 하나님은 모든 영광을 그에게 수납하실 수 있을 것이다.
천상에는 이로 인하여 천사의 찬미로써 울려 퍼지기에 이르리라.
'하나님은 옛 날에는 여러 부분으로, 많은 방법으로서,
예언자에 의해 선조들에게 말씀하셨으나,
이 말일에는 그 아들에 의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그를 세워 만물의 상속자로 하시고,
또 그를 가지고서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그 본질의 진상(완전표현)으로서 그 권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며,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광(지고)의 오른편에 앉으셨도다'(히브리서 1:1-3일역)
'영광은 하나님께 있을 지어다' - 사람에게 있지 말지어다.
그리스도께서도 이것을 자기가 취하기를 요구하지 않으셨다.
구세의 대사업, 그는 성공의 영광을 모두 하나님께 바치셨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의 증거는, 그의 완전하신 겸덕에 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 회개의 길을 열고,
하나님과 사람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estrangement)를 고치셨으나,
그는 자신이 그 공을 취하지 않으신다.
그 영광을 모두 아버지 하나님께 들리신다.
'땅에는 평안'(14-)
천상에는 영광이, 하나님께 돌리는 일 있는가 하면, 땅에는 평안의 임함 있다.
위에 대해서는 영광을 바치고 아래에 대해서는 평화를 제공한다.
이를 세상의 지부, 또는 태수 된 자의 직(직임)으로 한다.
땅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은 하늘에 영광을 돌리는(바치는) 자로서,
화평을 구하는 자가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수 없다.
(마태복음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그렇다고 해도 땅의 평안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랴?
이는 반드시 전쟁의 정식에 그치는 것 아님은 물론이다.
그리스도교 전파의 결과가 마침내 전쟁의 폐지에 이르는 것은 누구나가 예기하는 바로서,
그리스도교국이라 일컫는 구미 제방에 있어서, 군비에 급급함은 그리스도의 교훈에 전연 배려(위반 disobedience)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치 아니하리라'(이사야 2:4한글 개역)는 것은
예언자가 예언한 바로서 그것이 마침내 사실로 되어 이 세상에 나타날 것은, 장군 그란트 같은 이, 대포 제조로서 세계에 유명한 암스트롱씨 같은 이 마저, 의심치 않는 바였다고 한다.
하지만 평안은 단지 전쟁의 폐지에 그치는 것 아니다.
땅의 평안은 전지(戰地)의 평안으로서, 다만 인류의 평안에 그치지 않는다.
어찌 알 것인가?
화산은 분화를 그치고, 땅은 진동의 재해를 면하게 될지를 어찌 알랴.
'(그 때에)이리는 어린양과 함께 거하고, 표범은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 어린 사자, 살찐 가축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인도되며,
암소와 곰은 음식물을 함께 먹고, 곰의 새끼와 송아지와 함께 눕고,
사자는 소처럼 풀을 먹으며, 젖 먹는 아이는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고,
젖 뗀 아니는 손을 뱀의 굴(굴혈)에 넣기'(이사야 11:6-8일역)에 이르게 됨을,
평안이란 반드시 구풍의 정지가 아니다. 파도 소리를 거두는 것 아니다.
하지만 땅은 사람의 완전한 발달을 기대려 비로소 완성함을 얻는 것이매, 인류가 그리스도의 구제(구원)에 의해 죄의 유설(bonds)에서 벗어나, 그 완전의 역에 달하기에 이르러, 땅이 그로 말미암아 발달을 다하기에 이르는 것은, 이(이치) 아주 알기 쉬운 일이다.
뿐만 아니라, 죄악은 사람을 통하여 만물에 미치고, 산림의 남벌이 홍수를 야기하는 일 같은 것, 남어가개족(개각류 shells)의 감소를 가져오며, 그로 인하여 해중(海中)의 동식물에 이동을 낳는 것 같은 일, 들에서 금조를 다 잡아 논밭(전묘)에 충해를 불러오는 일 같은 것, 모두 인류의 도덕과 천연의 현상과의 사이에 엄밀한 관계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사람이 고쳐지지 않는 이상은(개선되지 않는 한) 땅에 재해를 근절시킬 수 없음을 증거 해 주고도 남음 있는 것이다.
바울이 이르기를,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고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 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을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로마서 8:19-22 한글 개역)
학대 행위 모두 그치고 금수는 사람에게 친근해져 그를 두려워하지 않기에 이르리라.
사치 모두 그치고 계견(a cock and a dog)은 먹고도 남는 것 있게 되리라.
모르는가, 만약 일본인이 모두 금주하기에 이른다면, 전제국에 1인의 빈자도 공복을 호소하기에 이를 자 없으리라는 것을, 미국인이 만약 모두 금주를 실행하게 된다면, 수년 못되어 그 자금으로서 그 시부의 도로에 대리석으로서 포장하고, 또 그 주민으로 하여금 대리석의 가옥에 거주할 수 있게끔 하기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인세에서 죄악을 제거해 보라. 그 병원과 재판소는 무용이 되고, 그 감옥은 빈집 되며, 그 약방, 그 주조 창, 그 연초 배양 위해 사용되는 몇천만 정보의 경지, 그 장식품의 과반 옳다, 그 정부까지도 모두 쓸데없게 되어, 사람은 살집의 결핍(부족)을 느끼는 일없고, 악의로서 하는 경쟁은 그치고, 원한은 근절되고, 만물은 인류의 사회와 함께 평안하게 되어, 가을 저녁, 낙엽 땅에 닿아 오인이 이를 귀에 듣는 듯한 청강을 이 땅에 있어서 느끼기에 이르리라.
말씀 마시라. 이는 시인의 몽상이라고.
그리스도 강림의 목적은 이것보다 이하의 것이 아니다.
이 평안을 기대함으로서,
오인은 주야(일야 day and night ; always) 하나님께 간구하며 일하는 것이다.
그 날은 아직 먼 미래에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는 오인이 생각하듯 먼 것 아니리라.
주의 날(일)은 가깝다. 오인 노력할 바 아니랴!
'사람에는 은혜 있을 지어다'(14)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안, 사람에게는 은혜.
그리스도의 은혜는 삼계에 달하리라는 것이다.
'은혜'로 역 된 원어는 또 호의를 의미한다. 은혜라고 하면 반드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 경우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 뜻을 보이는 것 아니다.
'사람에게 은혜 있을 지어다'라고 있고,
'하나님의' 또는 '그의' 은혜라고 하지 않음을 보아서, 이 1구(句)의 의의를 조금 바꾸어 해석함의 필요를 느낀다.(한글 개역에는 달리 역 되어 있다-역자).
'사람에게는' 즉 사람 중에는 은혜 있을 지어다.
즉 상호의 대해서의 은혜(호의, 인애)를 말함 같다.
그러므로 이것을 전술의 호의로 읽을 때, 뜻(의의)이 보다 한층 명료해진다.
하나님의 은혜는 창조의 처음부터 사람의 위에 있었던 것,
물론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려 가장 영광스럽게(graciousness) 그의 위에 임한 것인데,
특히 이때에 이르러 임한 것으로 해석함은 약간 신은을 감(감소)케 하는 느낌 없지 않다.
특히 원어에 있어서, 사람에게의 '에게'는 땅에의 '에는'과는 아주 다른 전치사를 쓰고 있음에 있어서랴!
'사람 가운데는 호의 있을 지어다.'
이는 그리스도 강림의 최대 목적의 하나 였음에 틀림없다.
이는 전구에 있어서 말한 지상에 평안을 가져오는 기인의 하나로서 인류 간에 호의 없이 땅에 평안 있을 리 없다.
사람은 사람을 적으로 하고, 동포 서로 괴롭히며, 형제 서로 싸우고, 자식을 고계(고초인간세계 bitter world of mortals)에 빠뜨리는 부모 있는가 하면, 백성을 괴롭히고 스스로 즐기는 귀족과 정치가가 있다.
행로 난(인생고 difficulties of life), 산에 있지 않고 강에 있지 않고,
다만 인정 반복(인정연덕 switching ; fickleness)의 때(간)에 있다.
나라는 나라를 적으로 하고, 당은 당을 적으로 하며, 진리를 전하고 하나님의 인애를 세상에 전파하는 것을 직분으로 하는 교사 목사마저, 또한 그 동배의 타락과 실패를 기뻐한다.
만약 하나님의 은혜로서 특별히 우리 인류가 간구해야 할 것이 있다면, 이는 실로 인류 간에 있는 악의가 제거되고 호의가 그 장소를 차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강세의 최대 목적의 하나는 실로 인류 간에 있는 이 증오, 수적(구적), 경쟁(rival)의 염(생각)을 제거하려는데 있었다.
예언자 말라기는, 메시아(구세주)의 사업의 하나라고 말하여 이르기를,
'그는 아버지의 마음에 그 자녀를 생각게 하고,
자녀의 마음에 그 아버지를 생각게 하리라'(말라기 4:5-6일역)고.
이것을 일독하고, 구세주의 사업으로 하기에 족하지 못하다고 할 자 있을 것이나, 하지만 인정의 심오한데 파고들 때, 아버지는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은 먼저 자기의 편의(convenience)를 도모하면서 자녀 수 십년의 미래를 도모하지 않고,
자식은 아버지를 생각한다고 하지만 실은 외면의 효를 보이는데 그치고 마음에 아버지의 영구한 선(평안)을 도모하지 않음을 알 때, 예언자의 이 말이 잘 인류의 진정을 깊이 파고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은 가정의 단란(화락)을 입으로 말한다 해도, 부자(父子) 서로 화합하고 부부 서로 화목하여, 천국의 상태를 이 세상에 옮겨 놓았달 수 있는 신뢰화평의 가정은 천하 몇 천이나 있는가?
사람은 동포를 부르짖고, 동조를 말한다.
하지만 투기, 흉살, 쟁투, 궤휼(scheme; trick), 참해(havoc), 훼방(slander)은 동포간 날마다의 사건이 아닌가?
이름은 군자국으로서 실은 소인국, 이름은 대절(대의 a lofty cause)을 중히 하는 백성으로서 실은 소리(a small profit)에 달리는 백성.
오인 일상의 불평이란 것은 동포 골육의 경박 무정에 의함 아닌 것 없다.
그러하나 그리스도는 인류의 이 대환(중병)을 고치시는 대능(권능)을 가지고서 태어나셨다.
그는 대 만족을 사람의 마음에 주어, 쟁투(爭鬪) 원은을 그 근저에서 근절하는 길을 여셨다.
구제(구수)의 미과는 하나로 부족하다 해도, 사람이 그 이웃을 자기 사랑하듯 사랑하기에 이름은 그 가장 큰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성탄의 당야(that night), 하늘에서 소리 있어 이 복음을 목자에게 전했다.
소리는 베들레헴에서 뻗쳐 전 세계에 전해지고, 20세기에 들어서려는 오늘, 오인 절동(동양일단)의 고도에서, 그래도 그 소리를 듣게 되어, 하늘을 우러러 작약(dancing for joy; exult)한다.
하나님께는 영광 땅에는 평안 사람에게는 호의.
그리스도교 선전(전도)의 목적은 이 셋에 있다.
그리고 오인의 사업 같은 것, 애당초 소의 소한 것이라 해도, 그 기대하는 바는 또 이 셋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관련하여 기록한다. 마지막 구절,
'사람에게는 은혜 있을 지어다'의 원문에 대해서는 주석자 중에 이설 많다.
혹은 '땅에는 평안, 은혜를 입은 사람가운데 있을 지어다'로 읽어야 한다든가,
혹은 '땅에는 그(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인류 중에 평안 있을 지어다.'로 읽어야 할 것이라고 한다.
만약 그렇게 해석 할 때면, 천사의 고지(전언)는 다음과 같은 연구로서 읽어야 되리라.
'천상에는 영광, 하나님께 있을 지어다.
땅에는 평안, 하나님께 은혜 입은 사람에게 있을 지어다.'
하지만 그 어느 것을 취한대도, 그 대의에 있어서는 다를 바 없다.
나는 내가 언제나 사용하는 스크리브어(Scrivener)씨의 교정으로 된, 그리스문(헬라어문) 성서에 의해 나의 주석을 했다.
*내촌감삼의 (1900년 12월 '성서지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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