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여기 기록된 말씀은 오늘 너희 앞에 이룩되었다

거듭난 삶 2024. 12. 25.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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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 거촌(居村)을 떠나

 

누가복음 416-30:

 

'예수 그 자라나신 곳인 나사렛에 와서, 언제나 하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성서를 읽으려고 일어서니,

17) 예언자 이사야의 글이 주어져, 예수는 그 글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곳을 찾아 내셨다.

18) 주의 성령, 내게 임하셨다. 대저 그는, 빈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렴에서 내게 기름을 부으셨다. 갇힌 사람에게 사면을 알리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며, 눌린 자를 놓아주고,

19) 주의 기쁨의 해를 선포하게 하시기 위해 그는 나를 보내셨도다(이사야서 61:1-2).

 

20) 예수, (, 두루 마리)을 말아, 이것을 계원에게 돌려주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 모두 주목했다.

21) 예수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여기 기록된 말씀은 오늘 너희 앞에 이룩되었다.

22) 사람들은 그로 인하여 깨닫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은혜의 말씀을 기이히 여겨, 이르기를, 이는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23) 예수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반드시 속담을 끌어다가, 내게 말하리라. '의사여, 자기 자신을 고치시오'라고. 또 말하리라. 우리들이 들은 바,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당신의 고향인 이 땅에서도 행하라고.

24) 또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는 그 고향에 있어서 존경받는 자가 아니다.

25) 나는 사실로서 너희에게 말하리라. 엘리야 때에 36개월,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있던 그때 '이스라엘 가운데 수다한 과부가 있었지 만도,

26) 엘리야는 그 아무에게도 보낸바 되지 않고, 다만 시돈인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만 보내졌다.

27) 또 예언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 중에 수다한 나병환자 있었지만도, 그 한사람도 깨끗함을 받지 못하고, 다만 수리아의 나아만 만이 깨끗함을 받았다.

28) 회당에 있는 자, 이 말을 듣고, 모두 크게 노하여,

29) 일어나 예수를 성 밖으로 쫓아내고, 그 성이 선 산의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서 그를 던져 떨어뜨리려 했다.

30) 그런데 예수는 그들 가운데를 통과해 가셨다'(4:16-30일역)

 

 

예수, 요단강가에서 요한의 침례를 받고, 황야(광야)에서 악마의 시험에 이기고, 성령에 충만 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잠시 갈릴리 호반(lakeside)에 체류하시고, 이제 구세주로서 세상에 나타나시려 하심에 있어서, 옛 벗(old acquaintance)에게 작별을 고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제 대 광명은 이 벽지(벽촌 무 out-of the way place)에서 나와 전 세계를 비추려 한다.

 

30년의 장기(長期), 인류의 구주에게 숙소를 제공한 나사렛의 소촌(小村), 한번은 그 복음에 접함의 기회를 주어지지 않았던가?

 

하지만 불쌍히 여길 찌라, 광명을 기숙하게 한 자는 도리어 광명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암흑하다고 일컬어 이것을 물리쳤다.

 

불행한 것은 영웅을 낳은 집이다. 그 성육 한 고장인 토지이다.

그들은 그 산물의 은혜에 참여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 적이 되어 이것을 배척한다.

 

아아,

(16 예수 그 자라나신 곳인 나사렛에 와서, 언제나 하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성서를 읽으려고 일어서니).

 

안식일마다 회당에 들어가 성서를 읽는 것은 예수의 상례였다.

우리들도 그를 본받아 그렇게 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제 부패한 유대인 회당과 절연해야 할 기회에 조우했다.

새 포도주는 오랜 동안 헌 가죽 부대 속에 있을 수 없다.

()는 마침내 신()에 견딜 수 없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신을 그 가운데서 방출(release)했다.

 

말이 있다. , 사물의 정신을 말하는 자는 마침내 그것을 파괴한다고. 예수는 유대교의 정신을 말하여 이것을 파괴했다.

예언자 이사야의 I절을 심령 적으로 해석하여, 유대인의 배척하는 바로 되었다.

 

(16-17 예수 그 자라나신 곳인 나사렛에 와서, 언제나 하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성서를 읽으려고 일어서니,

17) 예언자 이사야의 글이 주어져, 예수는 그 글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곳을 찾아 내셨다).

 

'()'은 두루마리이다. 그러므로 '펴서'라고 한 것은 두루 마리(주지; 권물 roll of paper)를 펴나감(신전 expansion)의 뜻이다.

'찾아내셨다'는 것은, 우연히 이를 보게 되었다는 말이 아닐 것이다.

특히 이 성어를 끌어다가 말씀했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리 아니다.

 

혹은 아사야서의 이들 수절은 안식일 당일의 과제의 한 부분이었을 찌도 모른다.

어느 쪽이거나, 예수께서 누구인지를 고구(향인)에게 소개함에 있어서는 아주 적당한 성언이었다.

 

(17 예언자 이사야의 글이 주어져, 예수는 그 글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곳을 찾아 내셨다).

 

18, 192절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사야 611, 2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하지만 문자대로 이것을 인용한 것 아니다. 그 의의를 인용했다.

그리스도는 성서의 진의를 중시하시고 그 문자에 구니(구애)되지 않으셨다.

그는 성어의 문자 그대로가 아니면 성어가 아닌 것으로는 보지 않으셨다.

 

하지만 성어의 진의 이외의 의미에 있어서 이것을 남용하지 않으셨음은 말할 것도 없다(18-19).

 

이사야는 자신에 대하여 이상의 말을 발했다.

하지만 그 말의 진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려 비로소 사실로 되어 나타나왔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만이 성령은 충실되었다.

 

그는 참된 '기름부음 받으신 이' 즉 그리스도(수고자의 뜻)이다.

그로 말미암아 비로소 사죄의 복음은 전해지고, 소경은 눈을 뜨고, 압제의 고삐(멍에 yoke)는 근본적으로 끊기었다.

 

'주의 기쁨의 해'(새 번역에는 은혜의 해)란 노예 방면의 해이다.

채무 말살의 때이다.

 

(레위기 25:8-10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9)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는 뿔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나팔을 크게 불지며

10)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하나님께서 그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인류를 죄의 멍에에서 벗겨 그들에게 심령의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이다. 그리스도는 최대의 해방자이시다.

예언자라든가, 혁명자라든가는, 불과 그리스도의 조그마한 그림자(편영 a shadow)임에 지나지 않는다.

 

(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지금은 서서 말하고, 옛날은 앉아서 말했다.

서면 위엄 있고, 앉으면 온용(온화)있다.

복음 전도는 주로 좌담으로 하는 것이 좋다.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예수는 앉으셨다. 그리고 중목(중인의 시선) 모두 그에게 쏠렸다.

어떠한 모습인가?

 

'세상 죄를 진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용기 있다. 확신 있다. 자비 있다. 결심 있다.

옳다, 사람들 모두 그를 사랑하지 않았어도 그를 위해 증거하고, 그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말씀을 기이히 여기셨다는 것은 변설(speech)은 말만이 아니다.

 

용자(face and figure)에 있다.

복음은 입에서 나오고, 또 눈에서, 또는 얼굴에서 나온다.

예수의 설교에 있어서는, 은혜는 그의 전신에서 방사(방사방출)되었다.

 

(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청중은 놀랐다. 하지만 그가 전해 준 교훈에 감동하는 일 얼마 없이, 그의 말이 그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데(그들의 속 안으로 볼 때) 놀랐다.

 

'이는 목수(공장) 요셉의 아들 아니냐'.

 

만약 동일한 말을 예루살렘에 있는 박사의 입에서 들었을 것인가?

그들은 이것을 칭찬하여 마지않았으리라.

하지만 지금, 이것을 그들의 동향의 한 사람에게서 들을 때, 그들은 깊이 이것을 이상히 여겼다.

 

'아아, 소경이여, 속한이여 그들은 사람을 보고,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광명이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현목(brilliance)되어 광명을 알아 볼 수 없었다.

그들은 말했다. 그도 우리들의 한 사람이다.

어찌 대 진리를 알 수 있으랴!

그가 아는 바는 우리도 안다. 우리가 그에게 들을 필요 없다',

 

(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예수, 이것을(귀로) 듣지 않았으나, 그들의 마음을 투찰(insight)하여 이르기를,

 

'너희들은 내가 타향에서 한 것같이 고향에서 행할 것이라고 내게 향하여 말하리라. 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하고자 한다. 예언자는 그 가향(고향)에서 존중되는 자가 아니라고. 너희들은 내 육에 접했기 까닭에 나를 모른다. 그리고 나는 나를 모르는 자위해 무슨 일도 알 수 없다.

 

골육 무언가? 향족 무언가?

지금은 신앙에 의해 합해야 할 때이다.

혈연에 의해 함께 할 때는 지나갔다.

나를 모르는 자는 내 형제가 아니다.

내 동향의 인사가 아니다.

나는 천국의 건설자로서, 천국의 시민만이,

내 형제요 동포인 것이다.

옳다. 의사는 자신을 고칠 수 없다.

예언자는 자가의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내가 너희들에게 큰일을 하지 못한대서,

내가 구제주임을 의심하지 말라.

대저 내가 내 일을 너희에게 할 수 없음은, 나의 무능이 아니라,

너희의 불신 때문이다'라고.

 

(23-2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예수는 또 말을 계속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구약성서에서 읽지 못하는가?

 

예언자 엘리야 때에 3년과 6개월에 걸쳐 하늘이 닫혀 전국에 대 기근이 있었던 때에, 이스라엘 가운데 수다한 과부가 있었다 해도, 그 한 사람도 예언자의 구제에 참여하는 일없이, 도리어 이방 시돈의 한 시인 사르밧의 한 과부만 그 은혜를 받은 것을(열왕기상 17).

 

너희는 또 예언자 엘리사 때에 있어서의 이방 시리아(수리아)인인 나아만의 일을 안다(열왕기하 5).

 

보라, 옛적에도 이방인은 도리어 하나님이 보내신 예언자의 구제에 참여하고, 약속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은 도리어 이것을 놓치지 않았던가?

 

오늘에 있어서도 또한 그렇지 않은가?

 

너희는 나사렛의 촌민의 그 한 사람이었던 내가 누군지를 알지 못하여, 내가 만민에게 주려는 큰 하늘의 은혜를 놓치려 한다.

이제 후, 너희가 모멸하여 마지않는 사마리아 사람은 내 복음을 듣고서 하나님의 휴식(안식)에 들어가리라. 너희들의 근방 시리아인도 내 구원을 듣고서 곧 내게로 올 것이다.

 

옳다, 서에서, 동에서, 북에서, 남에서, 아직 일찍이 내 이름을 귀로 듣지 못한 자는 많이 와서 그 영혼의 구원을 이룩하리라.

 

하지만 너희들은 마침내 너희 죄로 죽으리라.

너희는 내 동족임의 행운을 버리고, 도리어 나를 멀리하는 까닭에,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서 세상을 마치리라.

 

아아, 가련한 너희들, 만약 내가 너희 중에서 성장치 않고, 너희들이 멀리서 나를 대망 하면서, 가까이 내게 접하지 아니했더라면, 너희도 내 구원에 참여했으리라.

대저 영은 이를 감싸고 있는 육을 멀리하지 않으면 이것을 아는 일은 아주 어렵기 때문이다, 라고,

 

(23-28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이것을 들은 나사렛의 촌민은 노했다. 비상히 노했다.

그들은 이제는 예수를 마을 밖으로 축방 하는 길 외에 여념이 없었다.

아니, 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그를 죽이려 했다.

 

그들은 생각했다.

타향 타인을 위해 선사를 할 수 있고 골육동족을 위해 이것을 할 수 없는 것 같은 자는

이는 인륜을 깨뜨리는 자로서, 세상에 생존함의 권리 없는 자라고.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를 나사렛의 촌이 서있는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서, 그를 던져 떨어져 그를 죽이려 했다.

 

아아 무정한 동향의 인사, 그들은 진리의 주를 죽이고자 했다.

 

하지만 그에게 죄 있었던 것 아니다.

그는 다만 천국의 복음을 설파했을 뿐. 그는 그들을 미워한 것 아니다.

 

아니, 열정으로서 그들을 사랑했다.

그들은 30년이란 장기간, 그의 무언의 설교를 들었다.

그들은 그에게서 천사 같은 생애를 보았다.

 

하지만 그의 목적이 지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복음이 가족적이 아니었기 까닭에,

그들은 그의 재능을 보고 도리어 그를 배척했다.

 

사람의 죄악은 그 이욕에 있다.

그들은 자국 또는 자가의 이익을 죄(도모)하는 자를 사랑한다.

세계 또는 인류의 이익을 꾀(도모)하는 자의 귀중한 까닭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계적인 인물을 그들 가운데 주셨지만, 그들은 이로 인하여 감사하지 않고, 도리어 이것을 죽이려 했다.

하지만 이는 인정이다. 이것 때문에 나사렛 촌민만을 비난()할 것 아니다.

 

예수의 생장한 나사렛의 촌은 예수를 방축한 것으로 인하여 그 고명을 잃지 않았다.

세상에 촌은 많다고 해도, 갈릴리의 나사렛 촌처럼 세계 역사에 유명한 것은 없다.

 

로마 무언가?

아덴(아테나이) 무언가? 런던 무언가? 파리 무언가?

 

나사렛의 벽촌은 요셉의 아들 예수의 성육의 땅이었으므로, 그 이름은 세계와 함께 없어지지 않는다.

 

나사렛인은 예수를 추방했다.

 

하지만 예수는 나사렛의 이름을 세계만방에 퍼지게 했다.

예수는 다른 영웅과 마찬가지로, 덕으로서 원망스러운 일에 갚았다.

나사렛 사람은 예수를 죽이려 하고, 예수는 나사렛의 이름으로 하여금 신성한 것으로 되게 했다.

 

촌민은 예수의 직언에 자극되어 그를 죽이려 했다.

하지만 예수는 그들의 손에서 도둔(flight)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 가운데를 통과해 가셨다.'

 

악한 자는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고, 의로운 자는 사자처럼 용감하다.

 

(잠언 28: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

 

예수는 공공연하게 나사렛 촌을 떠나셨다.

그것은 그가 살해될 때가 아직 이르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30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예수는가셨다',

 

영구히 가셨다. 다시 돌아오지 않기 위해 떠나 가셨다.

 

예수는 나사렛의 촌민에게 그의 복음을 들을 최후의 기회를 주셨다.

하지만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보고, 영구히 그의 고향의 땅인 나사렛을 떠나셨다.

 

아아, 불행한 나사렛이여!

그대가 세계에 공여한 세계 최대의 예언자는 지금은 영구히 그대에게 작별을 고하고 떠나가셨다.

 

그는 지금부터 만국민에게 그의 복음을 전하려 한다.

 

하지만 그는 다시 그대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최종의 호기를 놓쳤다.

아아, 나사렛아, 나사렛아.

 

(30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내촌감삼의 (19042'성서지연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