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귀신의 영을 쫓아내시다
누가복음 4장 31-37절 : '그리하여 그는(예수께서), 갈릴리의 가버나움이라 하는 성에 이르러,
안식일마다 사람을 가르치셨다.
32) 사람들은 그의 가르치심에 놀랐다. 그것은 그의 말씀에 권위 있음으로였다.
33)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다. 큰 소리로 외쳐 말하기를,
34)아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으랴. 당신은 와서 우리들 멸하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압니다. 곧 하나님의 거룩한 분입니다.
35) 예수 이를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소리 내지 말라(잠잠하라). 거기를 떠나라고.
악마(귀신) 드디어 그 사람을 사람들 가운데 넘어뜨리고 그를 해치지 않고서 떠났다.
36) 사람들은 모두 놀라, 서로 말하기를, 권위와 힘을 가지고 더러운 귀신에게 명하시니,
그가 떠나갔도다. 이는 무슨 말씀이라고.
37) 이에 예수의 소문이 두루 그 사방 땅에 퍼졌다'(4:31-37일역)
*참조 : (마가복음 1장 21-28절)
예수, 그 고향 나사렛에서 쫓겨나 이향 가버나움에 와서 사셨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의 서안에 있다.
사통팔달의 땅으로서, 세계 (whole world)에 널리 복음을 전파하기에 적합했다.
그것이 훌륭한 상업지였음은, 여기에 세관이 있었던 것으로서 알 수가 있다.
마태는 본래 세리로서, 여기서 예수께 부르심을 입은 자이다.
(마태복음 9: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은 세계적인 것이다. 이것을 선전(전파)하는데 가급적 번영한 땅을 택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물론 전도자의 성명을 올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한 사람이라도 많이 사람이 구원되기 위해서이다.
(31 그리하여 그는(예수께서), 갈릴리의 가버나움이라 하는 성에 이르러, 안식일마다 사람을 가르치셨다.일역)
국민교육의 기관으로서 안식일제도 같은 좋은 것은 없다.
이 날 있음으로서 중인(衆人) 한가지로 현자의 교훈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는 이 날을 이용하셨다. 우리들도 또한 그를 본받아, 이 날을 거룩한 노동의 날로 해야 할 것이다.
(31 안식일마다 사람을 가르치셨다.(일역).
이에 경복(admiration)한 것 아니다. 이에 대하여 경악(astonishment)했을 뿐. 기이한데 놀랐을 뿐. 저 상인(반인)이 그러한 사람 아닌 것을 기이히 여겼을 뿐.
설교는 흔히 연극 시 된다. 음(音) 고저(高低)와 태도가 주시되어 생명의 복음은 청취되지 않는다.
우리 오늘의 전도자도, 변사(능사가 eloquent speaker)로서 받아들여지는 일 많고, 영혼의 의사로서 받아들여지는 일 드물다. 한탄스럽다.
(32 '사람마다 그의 가르치심에 놀랐다'일역).
예수의 말씀에 권위 있었다. 그는 학자처럼 가르치지 않으셨다고 한다.
(마태복음 7: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학자란 '서적의 사람'의 뜻이다. 자기의 의견을 말하지 않고서 고인의 말을 인용하는 자이다.
'유명한 누구누구는 무엇이라 말했다'고 하며 '나는 그렇게 믿는다'고 하지 못하는 자이다.
즉 언책을 고인에게 전가하고, 자기는 단지 인용자의 지위에서는 자이다.
'학자'는 부유(浮游) 이다. '고용된 전도사'이다. 서적 뒤에 숨어 자기의 인격을 나타내지 않는 자이다.
'학자'는 그리스도 재세(在世) 때에만 한하지 않고, 지금의 세상에도 있다. 지금의 그리스도 교계에도 있다. 학자, 소폐림, 서적의 사람, 그에게 주의하라.
(32 사람들은 그의 가르치심에 놀랐다. 그것은 그의 말씀에 권위 있음으로였다.(일역).
하지만 예수는 학자는 아니었다.
그는 노동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는 성서를 인용해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것을 자기의 말로서 사용 하셨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의 마음의 실험의 도가니(crucible)를 경과하여 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권위 있었다. 이에 항거할 수 없는 확신 있었다.
그리고 사람을 감화하는 말은 모두 그런 것이다.
고인의 말은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이것을 내 말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면, 이에 권위 있는 것이 아니다.
말씀 마시라.
밀튼(Milton,1권 120역주)은 이렇게 말했다든가, 웨슬리(5권 71역주)는 이렇게 말했다고.
스스로 소(小)밀튼 또는 소웨슬리가 되기를 힘쓰라. 그리고 밀톤 또는 웨슬리에 유사한 사업을 하라.
(32 사람들은 그의 가르치심에 놀랐다. 그것은 그의 말씀에 권위 있음으로였다.(일역).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잠잠하여 예수의 설교를 듣고 있다가,
그 거룩한 모습과 청음에 못 견디어, 마침내 대성을 발하여 말했다.
'아아 나사렛의 예수여,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압니다.
곧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니이다.'(34)라고.
일견하여 예수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시므온 같은 성자가 아니고서는, 더러운 귀신이다. (누가복음2:25이하 참조).
(누가복음 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악마(귀신)도 또한 믿고 떠나니라. (약2:19 일역참조)고 야고보는 말했다.
예수를 대면하여, 악마(귀신)는 대적이 그 목전에 닥아 옴을 알았다.
그러므로 만약 그를 멸할 수 없으면, 그의 앞을 피하고자 한다.
'악한 자는 심판에 견디지 못한다'(시편1:5)
예수께서 나타나시지 않는 곳에서는 마류(魔類)가 모습을 바꾸어 발호(횡행)한다.
하지만 그의 나타나심에 조우하면, 박쥐(a bat)가 햇빛(일광)을 만난 것 같이 도망쳐 버린다.
(이사야서 2:20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경배하려고 만들었던 은 우상과 금 우상을 그 날에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지고).
이는 그들이 예수를 싫어하는 연고이다.
(33-34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다. 큰 소리로 외쳐 말하기를, 아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으랴. 당신은 와서 우리들 멸하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압니다. 곧 하나님의 거룩한 분입니다.일역).
'아아 나사렛의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고.
가련한 마족(魔族), 그들은 예수와 아무 관계도 없는 자이다.
세상의 부자를 인척(혼척)으로서 가지고, 세상의 권자를 친구 중에 계수 할 수 있지 만도,
그들은 예수를 만나서는, 그와 아무 관계없음을 자백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의 강세, 그의 수난, 그의 승천, 그의 재래(再來), 이는 모두 인생의 최대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부의 증식과 명예의 장악 외에 여념 없는 마족(魔族)은, 이것을 역사로 읽어도 아무 흥미도 느끼지 못하고 이를 미신이라 일컬으며, 불용문자라고 하여, 이에 대하여 조금의 주의조차 기울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 마족도 또한 그 마음속으로 예수의 신성을 아는 것이다.
그들은 그가(예수께서) 그들의 부정해진 사회 또는 가정에 임하는 때에, 그들의 축첩의 죄악은 폭로되고, 그들의 강음의 악습은 공격 될 것을 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전력을 다하여 예수를 배척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만약 그 아들 예수를 믿는 자 있으면, 그를 불효자식이라고 하여 예수에게서 떠나게 하려고 한다.
만약 그의 신하로 그를 믿는 자 있으면 그를 불충의 신하라 칭하여 예수를 국외로 방축하려 한다.
그들 마족은 물론 예수가 전한 교리를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마음에(본능적으로), 예수가 모든 악사(惡師)의 대적(對敵)임을 안다.
세상의 '야소교' 싫어하는 자의 본원은 주로 여기에 있다.
즉 마족이 예수의 신성을 본능적으로 승인하는데 있다.
(34 아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으랴.
당신은 와서 우리들 멸하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압니다.
곧 하나님의 거룩한 분입니다.(일역).
악마는 하나가 아니다. 만군이다. 그러므로 '나'라고 하지 않고서 '우리'라고 했다.
예수는 일찍이 귀신들린 자에게, 네 이름이 무엇인가고 물은 때에,
'우리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 이름을 레기욘(군단(軍團))이라 합니다.'고 대답했다.
이로서 마족의 대 세력임을 알 수 있다. 그는 하나가 아니다. 만군이다.
그리고 예수는 이 만군을 멸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탐람(다욕)의 마(魔), 창질(매독)의 마, 호색의 마, 취주(吹奏)의 마(魔), 위선의 마, 설독의 마,
기타 모든 온갖 마(魔)를 멸하기 위해 오셨다.
그리고 마의 종류는 많다고, 하지만 본질은 하나이다.
그러므로 탐람마(貪濫魔)는 예수를 만나 마족 전체의 멸망이 가까움을 알았다.
호색의 마, 취주의 마도 역시 그렇다.
하나의 죄악을 공격하는 것은 모든 죄악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조(酒造)가는 창가(娼家)를 도와 폐창(廢娼)운동에 반대하고, 창가 역시 주조가에 동정을 보내어 금주의 '열광'을 압제하려 한다.
피(혈)에 갈한 군인, 권에 굶주린 정치가, 이에 밝은 실업가는, 모두 상합하여 예수와 그 제자에게 반대한다.
그리고 군인, 소리 높여 예수를 국적(國賊)이라 하면, 정치가, 이에 화답하고, 문사, 철학자 이에 뇌동하며, 그리하여 그를 박멸하려고 꾀한다.
대저 그들 총체는 예수가 그들을 멸하는 자임을 알기 때문이다.
즉 이욕과 허명 위에 세워진 그들의 왕국이, 예수의 현출에 직면하여, 크게 위험해진 것을 알기 때문이다.
(34 아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으랴.
당신은 와서 우리들 멸하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압니다.
곧 하나님의 거룩한 분입니다.(일역).
때에 예수는 귀신의 영을 경계하여 이르기를
'소리 내지 말라(잠잠 하라). 그 곳을 나오라'(35일역)고.
'입을 다물라', '진정하여 잠잠 하라'고.
동일한 음성에 의해 호상(互相)에 바람 그치고 크게 잠잠해졌다.
(마가 4: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후년 루터(2권 277역주)는 일찍이 그러한 소리를 내어 이르기를 '일언(一言)으로서 저들(마족)을 죽일지라'고. (저자의 역시 '애음'참조).
신성하신 이가 악마를 침묵케 하는데 의론을 쓸 필요가 없다. 일언으로서 족하다.
권위 있는 힐책(책망 reproach)으로 족하다.
어찌 음주의 경제적 해독을 말할 것 있으랴!
어찌 축첩의 생리적 위해를 말할 것 있으랴!
하나님의 권위로써 꾸짖으면 족하다. 이 권위 없이 악마는 퇴거하지 않는다.
세상에 어리석은 자로서 악마를 설복(persuasion)하려는 같은 것 없다.
(35 예수 이를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소리 내지 말라(잠잠하라). 거기를 떠나라고.
악마(귀신) 드디어 그 사람을 사람들 가운데 넘어뜨리고 그를 해치지 않고서 떠났다.일역).
다만 침묵을 명하셨을 뿐 아니라 퇴거를 명하셨다.
'거기를 나오라(떠나라)',
'하나님이 거하실 사람의 마음을 떠나라'고,
하지만 악마는 좀처럼 그가 사로잡은 사람의 마음을 떠나가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의 질책을 받아 이것을 할 수 없기에 이르자, 그 사람 속에서 대 요란을 일으키지 않고서는 그를 방척(방기 abandonment)하지 않았다.
'악마는 마침내 그 사람을 뭇 사람 가운데 넘어뜨리고 나가니라'(35일역)고.
사람과 함께 있는 동안은 그 사람을 해치고, 그를 떠나감에 있어서도 그를 넘어뜨리고 갔다.
이는 악마의 소업(소행)이다.
예수의 때에 그러했다. 지금의 때에 그러하다. 레기욘(레기온)이라 불리운 악귀 그러했다. '그리스도 신도'로 칭하는 악귀 역시 그러하다.
예수의 권위 있는 일언에 악귀는 가련한 이 사람을 떠났다.
그리고 뭇 사람 가운데 그를 넘어뜨리고 그에게 대 위해(危害)를 가하고자 했지만도, 예수께서 그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악귀는 이것을 해칠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을 죽이고자 한 것은 악귀퇴거의 때의 원망이었을 것은 조금도 의심할 것 없다.
그는 뭇 사람 앞에, 사람이, 저 악귀와 떠남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보이려 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 사람과 함께 계심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가 그들의 목전에서 넘어짐을 보고, 마음속 은근히 말했으리라.
아아, 위험할 진저 악귀와 곧 절연하는 일이란. 악귀는 달래어 좋게 할 것이다.
이를 노하게 하지 말 것이라고.
하지만 예수에 의해 악귀를 쫓는데 무슨 두려운 일이 있으랴?
자신이 그 때문에 일시는 뭇 사람 앞에 넘어뜨려져 다소의 치욕을 입는 일 있대도, 저 악성은 오인을 해칠 수 없다. 오인은 자신의 실험(경험)에 의해 이것을 알았다.
(35 예수 이를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소리 내지 말라(잠잠하라). 거기를 떠나라고.
악마(귀신) 드디어 그 사람을 사람들 가운데 넘어뜨리고 그를 해치지 않고서 떠났다.(일역).
중인(the people) 모두 놀랐다. 다만 그의 설교를 들을 때처럼 그 기이함에 촉감 되었을 뿐 아니라, 그가 행한 기적을 보도 진해(경악 terror)했다.
그는 완력을 쓴 것 아니고, 세상의 권력을 빌린 것 아니며, 다만 일언으로서 악마를 구축하고, 사람을 본심으로 돌아서게 하셨다.
이는 어떠한 말씀이랴! 이는 다만(보통의) '말'은 아니다. 여기에 우주의 힘(능력)이 함께 하는 것 같이 보였다. 이에 하나님의 권위가 어려 있는 듯이 들렸다.
하나님의 말씀은 실력이다. 그 한번 발해지면 무슨 일이나 하지 않고서는 마지않으신다.
악마는 이것을 듣고서 이는 단지 '목소리'(음성)라고 하며 이를 업신여기리라.
하지만 이것을 귀로 듣는 때, 악마는 종생 이것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악마의 귀에 남아 있어서, 언젠가 그에게 대 타격을 더하기에 이르리라. 악마는 물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증오한다.
하지만도 하나님의 말씀은 악마에 부수(부착 sticking)하여 그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말씀 마시라. 하나님의 말씀은 약하고 악마는 강하다고.
마침내 악마를 죽여 없이 하는 것은 약한 것 같이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전하기를 게을리하지 말라.
(36 사람들은 모두 놀라, 서로 말하기를, 권위와 힘을 가지고 더러운 귀신에게 명하시니,
그가 떠나갔도다.(일역).
'이에 예수의 성명(소문), 두루 사방의 땅에 퍼지니라'(37)
예수는 물론 성명(소문)을 구하시는 이가 아니다. 아니, 그는 아주 이것을 싫어하셨다.
하지만 이 대 기적 있어서 그의 이름은 오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한 사람의 악인이 예수의 일언에 의해 그 본심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가 영년 벗으로 한 더러운 귀신은, 이 성자의 명령에 의해 그의 속에서 쫓아낸바 되었다.
누가 이것을 듣고서 놀라지 않으랴!
물로 포도주가 되게 한 것을 보고 놀란 자는, 이것을 목격한 예수의 제자뿐이었다.
예수에게 안수되어 그 나병을 치료받은 자 있음을 듣고, 나병환자는 모두 예수의 이름을 말했으리라.
하지만 악귀의 영들린것은 마음의 질병이다.
사람으로서 (누구나) 다소 이에 침노되지 않은 자 없다.
그리고 그것이 난병임은 누구나가 잘 아는 일이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 인류 통유의 질병을 일언으로써 고치는 자 나타난 것을 듣고서, 누가 마음에 대 감동을 받지 않으랴!
예수의 소문이 널리 사방으로 퍼진 것은, 그가 이제 전 인류의 구주로서 나타나셨기 때문이 아닐 수 없다.
누가복음 기자가 이 기적을 예수께서 행한 최시의 기적으로서 기재한 것은, 이에 심의가 없지 않는 것이다.
(37이에 예수의 소문이 두루 그 사방 땅에 퍼졌다.(일역).
귀신(사귀의 영)이란 무언가? 이에 들린다(잡힌다)는 것은 무언가?
이는 누구에게도 일어나는 문제이리라.
이것은 보통의 신경병으로서, 그렇게 인격적으로 서술(description)된 것은 예수 재세 당시의 유대인의 미신에 기초한 것이 아닐지?
혹은 악귀인 실재물 있어서, 성령이 신자의 마음에 깃들이시듯 악인의 마음을 점령하는 것은 아닐지?
오인 물론 오늘에 있어서, 이설 어느 것이 참일지 알 수 없다. 다만 안다. 신약성서의 기자의 총체는, 인격적 악귀의 실재를 인정하고, 그를 멸하는 것을 인류 구제(구원)의 일대 요점으로 보았던 것임을.
악의 원리는 심원하다. 쉽게 이것을 규명(a searching examination)할 수 있는 것 아니다.
하지만 다만 한 가지 명료한 것 있다. 즉 인격(원어 persona)을 떠나서 악(EVIL)이라는 것이 존재치 않는다는 것이다.
악은 도덕적이다. 그리고 인격 없는 곳에, 도덕과 그 반대인 죄악 없다.
악을 단지 원리(principle)로 간주(regard) 할 때, 악은 악안 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성서 기자는 악에 대하여 언제나 이 견해를 가졌다. 즉 악의 영(악영)있어 악한 마음 생긴다고.
악귀의 실재를 증명하는 것은 물론 천사의 실재를 증명하는 것 같이 어렵다.
하지만 일생의 사실에 악귀의 실재를 증명하기에 족한 것 많지 않은가?
악은 이로 볼 때 이를 다스리는 일 어렵고, 영으로 볼 때 이것을 정복하기가 쉽지 않은가?
우리는 또 악을 목석 또는 동물에 있어서 보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있어서만이 이것을 보는 것 아닌가? 즉 악인에 있어서만 악은 표현(현출)되는 것 아닌가?
'악마란 타락한 천사이다'라는 것은 진부(commonplaceness)한 말 같이 들려도, 하지만 아직 이것에 대신하여 인생의 참사를 설명할 수 있는 말 이외에 달리 나오는 바 없음을 어찌하랴!
세상에 악귀 학자(귀신학자 demonologist)라는 것이 있어서, 마귀에 관한 종교적인 사실을
모두 신경병리학적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하는 자 있지만도, 그 해석이 아직 학자를 만족케 하기에 족한 것 없음은 심리학자가 한가지로 인정하는 바이다.
심리학(psychology)은 아직 유치한 과학이다. 오인은 쉽게 그 성언을 채용할 수 없다.
악마를 영적 실재물로 해석한데서 아직 미신가로 부를 것이다.
*내촌감삼의 (1904년 2월 '성서지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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