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골

럭셔리한 인생의 즐거움과 축복들을

거듭난 삶 2010. 8. 10.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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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럭셔리한 인생의 즐거움과 축복들을

 

요한복음 10장 22절-42절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23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3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하느냐. 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39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40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침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41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42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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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를 위해서라면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이 차가 이미 최정상의 기준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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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확신에 찬 문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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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인생 삶에서도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사는 인생은 든든합니다.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확신만 있으면 고민이 되지 않습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할찌라도 믿고 있는 그 사람을 누가 흔들 수 있습니까? 뿐만 아니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더 더욱 말할 것도 없을 것 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가진 것과는 다른 확신이 있었습니다. 고급 승용차의 스타일과 성능에 대한 그런 확신이 아니라 죽음을 완벽하게 이기는 생명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영원히 있을 생명의 길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28절에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시면서 유대인들을 쳐다보자 그들의 表情이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생명은 하나님의 獨占物이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생명의 탄생과 죽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28절의 "내 손"은 하나님의 손이 아니라 예수님의 손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더욱 날카롭게 예수님을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덧붙여 말씀하신 것이 오늘 본문 29절-30절의 말씀입니다.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정리해 봅니다.

즉 “하나님께 생명이 달려있고, 하나님은 만유보다 크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다면 그 생명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너희들의 생각이 옳다, 그리고 너희들이 확신하고 있다면 그것처럼 다행인 일은 없다, 그런데 한 가지 너희들이 놓치고 있는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하나님과 동일한 자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엄청난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폭탄선언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오히려 유대인들이 더욱 분개해서 예수님을 미워하게 만드는 폭탄선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렇게 선언하셨어야 했을까요?

간단합니다. 그들에게 생명을 얻게 하는 일이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고 있는 것으로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주님께서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비록 유대인들이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고, 생명을 주실 수도, 그리고 빼앗아 갈 수도 있는 분임을 안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결코 영원한 생명을 얻을 다른 길이 없음을 알아야 하겠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은 그렇게 엄청난 선언을 하여야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가만히 계셔도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이 구원을 얻든지, 못 얻든지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예수님께서 그렇게 답답해 할 필요가 없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알지 못해서 구원의 길을 놓칠 수는 없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사랑의 선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참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죽는데 까지 같이 가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왜 이런 이야기를 터뜨립니까? 지금 주님은 자신의 공생애 막바지에 다다랐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생명을 전해 줄 수가 있을까 노심초사(勞心焦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점점 더 끓어오르는 것입니다. 절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삶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그들에게 알려주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책잡을까를 궁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25절에서 그가 스스로 메시아임을 선언한 것이 유대인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놓았는데, 이제는 자신이 하나님과 동일하다고까지 선언하고 나선 것입니다. 대담한 선언입니다. 용기 있게 자신을 밝힌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왜요? 그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그 예수님을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거든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모르면 구원이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외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사실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임을 선언하신 것이 이번이 첫 번째가 아닙니다. 5장과 8장, 오늘의 10장, 이렇게 벌써 세 번째입니다. 삼 세번까지 오신 것입니다. 너무나 중요한 사랑의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언하셨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선언을 들은 유대인들의 반응이 아주 별납니다. 어떤지를 보실까요?

31절.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님의 사랑의 표현이 전혀 엉뚱한 결과를 몰고 왔습니다. 돌을 들어 죽이려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사건에서 두 가지를 명심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말 한마디만 잘못하면 엄청난 시련이 몰려올 순간임을 알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임을 밝히고 생명을 확인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단의 선언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려는 예수님의 애타는 사랑의 표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사랑이 없었다면 예수님은 그런 위험한 선언을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올바른 대접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도리어 생명의 위협을 받을 정도까지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첫 번째로 기억해야할 것은,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해서 언제나 좋은 반응만 되돌려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대가를 기다리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생명을 위해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엉뚱한 반응만 만납니다. 상상하지도 못하는 행동을 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대체로 우리는 사랑하면서 언제나 되돌아올 사랑을 기대합니다. 상대방에게 베풀었던 동일한 사랑이 내개 되돌아올 것을 기대하면서 사랑하는 경향이 있읍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하면서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아니 사랑했다고 언제나 사랑을 되돌려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을 베풀었다고 사랑스런 반응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사랑의 선언을 해 주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의 진실한 사랑조차도 상대방이 알아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반응이 전혀 생각지 않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상대방을 사랑해서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서 해 주었지만,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도 정말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너무 답답합니다. 참기 어려울 때도 많이 생깁니다. 오해하는 사람에게 한마디 해 주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이 어쩌면 예수님의 사랑의 방법에서 배우는 것인지 모릅니다. 되돌아오지 않는 사랑, 그것을 배우는 것은 참으로 엄청난 성숙입니다.

 

진짜 사랑은 위험을 고려하면서도 주저하는 법이 없습니다. 오해가 생길 것 같아서 아예 말아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곧바로 닥쳐올 위험도 문제 삼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모든 행동이 그들 유대인들을 향한, 아니 우리를 향한 진정한 사랑 때문이라는 사실을 학습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향한 사랑이 아니었다면 구태여 예수님께서 눈앞에 닥친 위험을 보면서 그 사실을 선언하실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사도 요한은 13장 1절에서 "끝까지 사랑하신” 것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런 것은 그렇다’고 말하는 것조차도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것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것은 당신이 잘못 알고 있는 것, 당신이 믿고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사랑하기 때문에 당연히 말해 주어야 하는데 마주 서 있는 사람 앞에서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경험들을 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담긴, 확신에 가득찬 사랑의 선언은 용기 있는 사람의 몫입니다. 용기가 없으면 믿을 수 없고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자신의 사랑을 펼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 때문에 사랑하는 일이 여러분들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로 치려는 유대인들을 보면서 묻습니다.

"내가 선한 것을 너희에게 보여 주었는데 왜 나를 돌로 치려고 하느냐?" 그러자 유대인들이 대답합니다. 33절입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다."

 

유대인들이 흥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자칭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그 사실 하나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善한 일을 행했느냐 아니냐의 문제에서 그들은 벗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의 말은 정확한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만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었습니다. 감히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철저한 유대교 신봉자들다운 말입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예수님을 만나기전의 사울(바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열심을 말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모욕 받는 것을 보면서 돌을 쳐 들만큼 흥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정도의 열정도 없이 어찌 무엇을 믿는 신앙인이라 말하는 우리는 참으로 부끄러운 신앙인입니다.

 

유대교도들만 그렇습니까? 이슬람교도들의 열정은 또한 얼마나 무시무시할 정도입니까? 이슬람교도들은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를 드립니다.

 

저는 필리핀 마닐라항에서 남쪽 민다나오섬 최남단의 잠보앙가까지 여객선으로 이틀이나 걸려가는 배의 갑판위에서 열대지방의 그 뜨거운 햇볕도 상관하지 않고 엎드려 기도하는 이슬람교도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대단한 헌신과 열정입니다. 여러분들도 간간이 신문에 이슬람교도들이 줄을 맞추어 엎드려 기도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상상이 안될 만큼 철저한 신앙 훈련입니다. 이슬람교도들은 기도하기 전에 그들은 손과 얼굴, 발을 씻는 소정이라는 의식을 먼저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엎드릴 때마다 "알라신은 위대하시다"고 고백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유대인들이 가진 신앙의 열정에 충격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사람을 향해 돌을 던지려는 열정에 기가 질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이런 사람들을 어찌 쉽게 바꾸어 놓을 수 있단 말입니까? 정말 어렵지 않겠습니까? 기적적인 사건을 아무리 보여 주어도, 5천명을 먹이고, 4천명을 또 먹여 주어도, 소경이 눈을 뜨고, 귀신이 물러가는 기적을 보여 준다고 해도 그들의 신앙을 바꾸어 놓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보면서 두 번째 想起해야 하는 것은 신앙은 처음 발자국이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처음 신앙을 제대로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기초를 잘 쌓아야 합니다. 처음에 잘못된 길로 접어들어 믿으면 바꾸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기초가 제대로 되고 나면 집을 세우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에게 신앙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젊은 부부들은 자녀들에게 신앙을 심어주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다른 공부를 시키는 일도 중요하지만 신앙의 기초를 잘 다지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이고 소중한 일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가정이나 교회에 혹시 무엇이 있어야 할까요? 돈이 있어야 합니까? 있으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없다고 가정다운 가정이나, 교회다운 교회가 안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힘 좀 쓸 권력 있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까?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없다고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크리스챤의 가정과 교회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임을 믿는 靈的告白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다 헛것입니다. 이것 없으면 나머지 것들이 다 세상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믿는 것, 영적인 고백 이것이 있어야 교회이고, 성도들입니다. 이것이 기초입니다. 이것을 처음부터 확실하게 심어 놓아야 합니다. 적당하게 심어 놓으면 다른 世上 哲學과 思想과 宗敎에 의해 금방 빼앗기고 말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면 우리 자녀가 알겠지... 벌써 몇 년째 다니는데 모르랴’ 하고 안심한다면 불안한 것입니다. 정확하게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의 牧會經驗에서

 

제가 달라스에 있을 때 유년부의 한 선생님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분은 유년부 예배와 성경공부가 다 마친 다음에 매주 마다 오후에 한 학생과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는 그 자녀에게 구원의 진리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어리지만 그 자녀에게 생명의 길을 안내하는 것입니다. 매주 빠짐없이 그 작업을 해요.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알려주지 않으면 모릅니다. 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알려 주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하도 깨닫지 못하자 예수님께서 자신을 포기하면서까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8절.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너희가 만일 내 말을 믿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능력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너희들에게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해 줄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히 담긴 장면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 특별히 여기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인데 이들과는 또 다른 한 무리의 이야기가 오늘 10장 말씀을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안타까운 설명을 듣고서 그들은 더 분기가 치솟아 잡으려고 하자 예수님께서 피하셔서 요단강 저편으로 가셨습니다.

 

침례 요한이 침례를 주던 곳으로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고백을 듣게 됩니다. 41절입니다.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예수님)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이 땅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일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전혀 다릅니다. 요단강에 예수님 때문에 모여든 사람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신앙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성전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거부한 사람들이라면, 요단강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렇게 외친 것입니다.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예수님에 대한 것들이 진짜인줄 안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방음장치가 잘된 錄音室, 音樂 感想室, 또는 敎會 등에는 소리를 퉁겨내지 않고 그대로 흡수해 주는 방음장치가 잘 되어 있습니다. 딱딱한 벽 같은 것에는 소리가 반사되어 피곤하고 신경을 거스릅니다. 그러나 천 이나 방음 처리가 잘 된 벽들은 소리를 흡수하는 흡수 물체가 있습니다. 소리가 반사되지 않고 흡수해서 우리의 신경을 거스리지 않고 음악이나 노래나 강연 등의 소리를 가장 정확하고 잘 표현하게 해 줍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대로 흡수하는 사람이 있고, 자꾸만 퉁겨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복 있는 성도는 어떤 사람입니까? 성전 안에서 가르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입니까 아니면 요단강가의 많은 사람들일까요?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흡수체 성도가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42절.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받아들이면 믿게 되지요. 그리고 믿으면 영원한 생명이 있거든요. 그래서 복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무조건 흡수체로 바뀌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받으십시오. 그것이 축복입니다. 퉁겨내지 마십시오. 흡수 체질이 좋습니다.

성경 말씀이 말하는 "이것이 다 참 진리"인 줄 告白하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흡수하십시오. 반사해버리지 마십시오.

 

그래서 참으로 최고급 자동차의 럭셔리한 승차감, 그보다 더 큰 럭셔리한 인생의 즐거움과 축복들을 항상 누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 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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