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골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거듭난 삶 2010. 7. 15.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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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빌립보서 1:20-2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한 미식 축구팀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미식 축구를 잘하는 팀이 아니고 매우 약한 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팀에게는 시즌 막바지에 매우 중요한 게임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팀의 상대팀은 아주 잘하는 팀이었고, 여기다가 원정경기였습니다.

그런데 시합이 벌어지기 며칠 전 약한 팀의 코치가 선수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그것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하라는 것입니다. 전화를 하면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이번 시합은

내가 사랑하는 당신에게 바칩니다.라고 고백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선수들은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들의 부모님께, 친구들께, 애인에게도 전화를 했습니다.

이번 시합은 내가 사랑하는 당신을 위해 바칩니다. 그리고 경기 날이 왔습니다.

아주 강한 팀과 아주 약한 팀이 맞붙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약한 팀이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최고 수준의 경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약한 팀이 강한 팀을 이긴 것입니다. 약한 팀 선수들이 강한 팀을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다. 나는 그들을 위해서 뛴다. 이러한 마음으로 뛰니까 자기들의 원래 실력의 150%, 200%가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뛰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훨씬 힘들고, 지친 경기였지만 그들은 행복했습니다.

 

人文學者들에 의하면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가, 자기들 나름 인식한 대로 행동한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누구로 인식하는가, 우리는 이것을 자기 정체성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자기 정체성은 내가 하는 행동과 내 삶의 태도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칩니다.

한동안 우리 사회는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이 유행하였습니다. 심지어 전임 대통령의 자살이라는 엄청난 충격도 경험했습니다. 자살의 원인이야 여러 가지겠지만, 뭇 사람의 人氣를 한 몸에 받던 사람들이 그 인기가 식어지고, 갑자기 자신의 존재감이 사라질 때,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인기가 頂上에 이르렀을 때, 쉽게 교만해 지고, 자만에 빠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인기의 정상에서나, 자신의 存在感이 사라질 때나 자신의 정체성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본문은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입니다.

지금 현재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였던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짐작해 볼 때 그의 나이가 거의 65세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언제 죽을 지 알 수 없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두 발을 채운 착고 뿐입니다. 外的으로 보면 바울은 참으로 불쌍한 老人입니다.

이럴 경우 우리 같았으면 어떠했을까요? 흔히 하는 말로 죽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인생을 헛살았다고 자책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은 자기의 정체성이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人生의 目的과 意味가 무엇인가가 분명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의 목적은 오직 하나, 사나 죽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존귀히 여기는 자라는 정체성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 안에서도 찬송하고 기뻐하였습니다.

 

 당신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어떤 것이든, 바울처럼 가장 큰 기대와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히 여기는 것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있습니다. 기대와 소망이 있어야 사는 맛이 납니다. 기대와 소망이 없다는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요즈음 우리나라의 청년 실업이 100만 명을 넘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취직을 하는 것입니다.

 

시골 마을을 다니다 보면 큰 길 어귀나 잘 보이는 전봇대 사이에

우리 마을의 누구, 누구의 아들이 00에 합격되었습니다.

우리 마을 출신 00가 00이(장군, 대령, 대학 합격, 회사 취업, 등 등)되었음을 축하합니다.”는 등등의...

고향 마을에 플랜카드가 내 걸려있는 것들을 가끔 보게 됩니다. 요즈음은 이렇게 장관, 교육장, 장교, 취업시험에 합격을 해도 플랜카드를 거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이제는 어느 곳이든 취직만 해도 플랜 카드를 내걸 정도로 인생의 간절한 소망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누구든지 기대와 소망은 삶의 원동력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살펴 보겠습니다.

여러분, 얼른 생각하면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감옥에서 나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이 감옥에서 나오는 것보다 더 간절하고 절실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감옥에서 나오는 것이 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아닙니다.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소망은 예수님이 드러나고, 예수님이 빛이 나고,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에서 중요한 단어는 ‘이제도’ 라는 말입니다. 즉, 감옥에 갇혀있어서도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다 지금 바울의 나이가 60세를 넘었습니다.

현재의 바울은 뜨거운 피를 가진 靑年이 아닙니다. 그는 육신적으로도 지쳤고, 쇠약해 있습니다. 자기 한 몸 돌보는 것도 어렵습니다. 이럴 때 쯤이면 이런 고백이 흘러나와야 할 것입니다.

아, 쉬고 싶다. 이제 부터는 남은 여생을 좀 쉬면서 편하게 살고 싶다.” 고...

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고백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젊은 날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나, 온갖 시련을 겪을 때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복음을 전할 때나, 늙은 나이에 감옥에 갇힌 지금이나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높이는 바울의 열정은 전에나 지금이나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한결같았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존귀히 여기는 바울의 열정이 오늘날 현대를 믿음으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도전이 되는 얘기입니까?

심지어 바울은 내가 죽어서라도 그리스도가 존귀케 될 수만 있다면 죽는 것도 유익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주님만을 높이고자 했습니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그리스도가 높아주기를 원했습니다.

성공하든지 실패하든지, 건강하든지 병들었든지, 자유로울 때든지 감옥에 갇혔을 때든지, 행복할 때든지 불행할 때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죽음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무슨 일을 당하든지 바울의 유일한 관심과 소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었습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이 말은 바울이 사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인생의 목적도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였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이 바로 바울 사도의 삶의 보람이요, 기쁨이요, 노래요, 비전이요, 열정이요,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만 존귀케 된다면 바울 자신의 삶은 어찌되든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한 때는 세상적인 출세와 명예를 취하고자 하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는 로마 시민권을 얻었습니다. 탁월한 율법학자가 되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 되었습니다. 열심당원이 되어서 크리스천들을 핍박하고 마구 잡아들이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거기서 그는 그의 인생관에 변화되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바울의 삶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바뀌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붙잡고자 했던 것들을 모두 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대신에 오직 하나, 오직 한 분만이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자랑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존귀히 될 수만 있다면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았습니다. 그것이 그의 삶의 原動力이요, 意味요, 目的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 되십니까?

진정 우리 삶의 核心的 가치가 되고 있습니까? 더 나아가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되십니까?

 

어떤 분이 이런 경험담을 얘기 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시계를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하루 종일 시계를 찾았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밤에도 잠이 오지 않더랍니다. 몇 날 며칠 기분이 우울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통해 중요한 영적인 교훈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시계 하나를 잃고는 그렇게 애통해 하고, 아까워하면서도 하루에도 여러 번씩 예수님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아까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새롭게 점검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예수님의 가치는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잃어버린 시계 하나 만도 못하단 말인가?

사실 곰곰이 돌아보면 우리 자신도 그러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내 기분 앞에, 내 有益 앞에, 내 自尊心 앞에 예수님은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을 높여드려야 할 때 주님은 온데 간데 없지는 않았는지요?

 

James Dobson이라는 가정 사역자의 간증이 있습니다.

James Dobson, 그의 학창시절 목표는 테니스 챔피온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노력했고 자신의 우승 트로피가 학교 트로피 진열장에 놓여져 있음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학교를 졸업한 몇 년 후 어떤 사람이 그 트로피를 택배우편으로 그에게 보내왔습니다. 학교 재건축을 하였는데 온갖것이 버려진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했다는 간단한 메모지도 함께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James Dobson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간이 흐르면 당신의 트로피는 잊혀지고 버려지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번쩍이는 트로피도 녹이 쓸고 빛이 바랠 것입니다. 이렇게 잊혀지고 버려지는 트로피를 위해 사시겠습니까? 일시적이고 순간적이고 썩어 없어질 목적에 우리의 인생을 걸고 사시겠습니까?”

 

오늘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화려한 트로피를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 트로피는 성공이 될 수도 있고,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부와 명예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은 우리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삶에서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 삶의 핵심적 가치는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언젠가는 사라지고 빛이 바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영광과 존귀를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우리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히 여길 수 있을까요?

 

어느 목사님의 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히 여기는 것은 바로 Lordship의 회복이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Lordship이란 그리스도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시라면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는 主人이 맡기신 것을 지키며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청지기는 내 것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기에 주님만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높이고자 할 때 가장 대표적인 것은 물질과 시간 사용입니다. 물질의 청지기 정신이 없을 때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 물질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물질은 내가 고생해서 번 것이요, 내 수고의 대가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물질의 주인이시라면 우리는 주님을 위해 드리고 나누는 삶을 살게 됩니다.

시간사용도 보십시오. 우리는 바쁘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주님을 가까이 하기가 어렵습니다. 늘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시간의 청지기라면 우리는 다른 모든 것을 제쳐놓고라도 먼저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말씀 묵상과 기도가 최우선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명뿐만 아니라 시간의 주인도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서에는 두 명의 대조적인 인물이 나옵니다.

바로 다윗과 사울입니다. 두 사람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왕입니다. 하지만 삶의 과정과 결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먼저 사울을 생각해 보십시다.

사울의 가장 큰 관심은 자기의 왕권이었습니다. 그는 왕권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왕권에 도전하는 자들은 가차없이 죽였습니다. 자기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사울은 언제나 백성들의 눈치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여기는가,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대우하는가, 이것이 그의 가장 큰 관심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두 번에 걸쳐 블레셋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합니다. 심지어 그는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자기가 차지해 버립니다. 자기를 위해 기념비를 세운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이로 인해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비참하게 버림을 받게 됩니다. 그가 하나님을 존귀케 여기지 않을 때 하나님도 그를 버리십니다.

 

반면에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다윗은 사울과 달리 자신의 자존심이 짓밟히고 공격당할 때는 한없이 온유했습니다. 원수들이 공격할 때도 매우 관대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조금이라도 손상되는 것 같으면 사자 같은 전사로 돌변했습니다.

그가 골리앗이라는 엄청난 적과 싸움을 마다하지 않은 것은 출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모욕한 데 대한 분노였습니다. 여기다가 다윗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항상 먼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면 가고, 하나님이 멈추라고 하시면 멈추었습니다.

다윗은 항상 하나님의 영광이 우선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이런 다윗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했을까요? 마침내 하나님은 다윗을 높이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높일 때 하나님도 다윗을 높이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 하나님도 다윗의 영광을 챙기셨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을 존귀케 여길 때 하나님도 우리를 존귀케 여기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존귀케 되는 비결은 바로 오직 하나님을 존귀케 여기는 것입니다.

 

 내게 하나님은 3등입니다” 라는 글이 있습니다.

내게 하나님은 3등입니다.

1등은 하고 싶은 일, 2등은 해야 하는 일, 3등은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저는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해야 하는 일도 다 마치고, 그 후에 여유가 있으면 하나님을 만납니다.

제게 있어서 하나님은 언제나 3등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내 자신, 그 다음은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그 다음에야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 대해서는 1등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부르기만 하면 도와주십니다. 내가 괴로워 할 때는 만사를 제쳐 놓고 달려오십니다. 아무도 내 곁에 없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언제나 내 곁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에게 1등입니다. 하나님, 내게 1등이신 하나님을 나도 1등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1등이십니까?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였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삶의 보람이요, 의미요, 기쁨이요, 노래요 열정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거룩한 열정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정을 가질 때, 하나님도 우리를 높이시고 영화롭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존귀케 하려는 기대와 소망에 불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직 우리의 영광과 존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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