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순종의 인생
요2:1-11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5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 신학교의 입학을 위해 학생 한 명이 찾아 왔습니다. 학교의 교장은 그 학생에게
“우리 학교에 입학하기를 원한다면 내일 아침 9시부터 저녁까지 학교 현관 앞에 서 있다가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십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학생은 다음날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교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러자 교장은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이
“내일은 오늘과 같은 시간에,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구두를 닦아주십시오.”
그러자 학생은 속으로 끊어 오르는 마음을 억제하고 그 다음날 학교에 나와 현관 앞에서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며 구두를 닦아주었습니다. 그러다 끝까지 참지 못하고 교장을 찾아가서
“저는 구두를 닦으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이 학교에 입학을 하기 위하여 온 것입니다.” 학생의 이 말에 교장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구두를 닦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학교의 입학시험입니다. 신학생의 첫 번째 자격은 모든 사람에게 머리를 숙이고, 모든 사람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시키든지 그대로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중에 맨 처음으로 가나의 결혼 잔치 집에서 이적을 행하신 일에는 많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1. 예수님을 초청하세요.
가나의 혼인집에 예수님께서 초청 받으셨던 것처럼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어떤 반려자가 동행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기쁠 때나 외로울 때나 슬플 때나 언제든지 우리 주님께서는 초청받기를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진정으로 주님과 같이하는 삶이되면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 사람의 근본이 되어 복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보다는 권세 있는 자, 돈 많은 자들을 초청하려고 애를 씁니다.
2. 예수님이 해결사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어려움이 온다고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행복하고 잘되고 기쁜 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어렵고 힘 드는 일, 실패와 좌절과 불만족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도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본문 말씀 3절에 보면 예수님의 일행이 혼인잔치 집에 청함을 받고 도착하고 보니 잔치집의 주식인 포도주가 떨어져 당황하였으나 결국 예수님께서 축복으로 해결하신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순종하면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은 것으로 축복을 주십니다.
주님과 함께 하면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 큰 기쁨과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본문의 가나의 혼인집은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어 처음보다 더 좋은 포도주가 대접된 것은 좋은 교훈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더 사랑이 두터워지고, 헌신이 커지고, 감사가 커지는 가나 혼인집의 기쁨이 여러분의 삶에도 늘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 순종의 모범
눅 5:1-11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 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 아브라함의 순종
창 22:1-18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4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매 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그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만약에 “하나님, 제게 기적을 주시면 순종하겠습니다.”라고 하는 다짐에는 우리의 삶에 결코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적이란 순종할 때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기적을 기대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십시오.
◎ 요셉을 형통케 한 믿음
창세기 39:1-6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4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5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6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
19-22 주인이 그 아내가 자기에게 고하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20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넣으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본문에는 요셉이 형통하였다는 말이 세 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형통”이라는 뜻은 “모든 일이 상상 이상으로 잘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셉은 애굽의 종으로 팔려갔으나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총무가 되었고, 집안일을 하든지 밭에 가서 일하든지 모든 일이 잘 되었습니다.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에도 전옥(典獄)에게 은혜를 입어 옥중 죄수를 관리하는 관리책임자가 되었으며,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창41:41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로 애굽 온 땅을 총리하게 하노라 하고)
종으로 팔려간 몸이 대국(大國)의 총리가 되었으니 얼마나 형통한 것입니까? 이것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성경 본문은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2,3,23절)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신 것은 그의 인간조건이 출중해서가 아니라 그가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있었던 요셉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첫째로, 요셉은 하나님이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살아계셔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사건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확실히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가 애굽에 종으로 팔려 온 것도 형들이 팔아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탄하거나 증오심으로 가득했던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자기를 애굽으로 보낸 것으로 믿었습니다.
(창45: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바로왕이 꿈을 꾼 것도 하나님이 꾸게 하시고
(창41:25 요셉이 바로에게 고하되 바로의 꿈은 하나이라 하나님이 그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바로왕의 그 꿈을 해석하게 하는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믿었습니다.
(창41:16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요셉은 이처럼 하나님이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서도 낙심하거나 원망, 불평하지 않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형들이 자기를 시기하고 미워하여 노예로 팔아버렸어도 원망이나 불평하지 않고,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고 거짓말로 모함하여 옥에 갇혔어도 원망이나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만사(萬事)에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믿고 원망이나 불평하지 않는 사람이 될 때에 요셉 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형통한 자가 되는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요셉은 하나님은 좋지 않은 환경(일)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좋은 복을 주시는 것을 믿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좋은 환경에서만 좋은 복을 누릴 것 같지만 하나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하셔서 좋지 않은 환경에서도 큰 은혜와 복을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에게 은혜와 복을 주십니다.
요셉은 이 믿음으로 어디를 가든지 부지런히 자기의 책임을 다하려고 힘을 썼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환경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환경이 어렵고 나쁘더라도 더욱 부지런히 자기 책임을 다하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은혜와 복을 쏟아 부어 주십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할 때나 감옥에서 죄수 노릇을 할 때나 부지런히 윗사람이 시키는 일을 잘 순종하여 자기 책임을 다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 앞에서도 인정을 받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형통한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가정에서나 학교에서, 교회에서나 직장에서 부지런히 자기의 책임을 다할 때 하나님이 형통한 길을 열어주십니다.
셋째로, 요셉은 하나님은 죄를 범하면 반드시 징벌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사람의 모든 행위를 다 보시고 아십니다. 그리하여 사람이 죄를 범하면 반드시 징계하시고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이러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힘을 썼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동침(同寢)하자고 집요하게 유혹할 때에도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得罪)하리이까”(9)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공의의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지 않고 바로 살기를 힘쓸 때에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형통한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믿는다는 소리는 잘하나 믿음의 열매가 없는 죽은 믿음을 소유한 자가 많습니다. 요셉은 믿는다는 말은 본문에 한 군데도 없으나 믿음의 열매가 있었습니다.
즉 어떤 어려운 처지에서도 원망이나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기 위해 부지런히 자기의 책임을 다하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지 않고 바로 살기를 힘썼습니다. 이러한 열매를 통해서 요셉의 믿음이 나타났고, 하나님은 요셉의 믿음을 보시고 요셉과 함께 하여 주시고 형통한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도 요셉과 같이 믿음의 열매를 맺어 형통한 복을 받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윗의 믿음
삼상 17:45-49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겠고 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48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로 마주 그 항오를 향하여 빨리 달리며 49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그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33:12).
평화는 하나님이 주시고 통일도 하나님이 주십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병기(兵器)가 무엇입니까. 골리앗의 칼과 단창이 아니고 다윗의 물맷돌입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사랑, 봉사, 전도, 말씀, 기도의 물맷돌입니다.
성도에게 주어진 이 귀한 물멧돌들을 다윗처럼 지혜롭게 활용하시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 산을 옮길만한 믿음
마 17: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 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어떤 농부가 전쟁 때 어느 병사가 중상을 입고 들에 쓰러져 거의 의식불명인것을 집에 데려다가 며칠 동안 간호를 해 주었는데 그 병사는 너무 고마운 나머지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장에 자기가 싸인한 것을 주었읍니다. 그러나 병사는 돈의 액수도 말하지 않고 단순히
"이것을 기념으로 드립니다" 하고 죽었읍니다. 이 농부는 그 유언장을 자손들에게 자랑을 하기 위해서 벽에다 딱 붙여 놓았읍니다. 이 농부는 빚에 쪼들려 가난에 빠져 죽을 지경이면서도 그 큰 유산을 받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서야 겨우 알게되어 병사의 유산을 상속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점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금통장만 가지고 있으면 무엇을 합니까? 현금으로 바꿔 써야지요. 이 농부처럼 그 많은 재산의 유언서만 가지고 있으면 무엇을 합니까? 그것을 알고 현금으로 바꾸어야지요.
지금 우리가 믿음이 있으면 무엇합니까? 그것을 활성화시키고, 살아 움직이게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항상 태산과 같은 많은 역경이 다가오는데 하나님의 보증수표인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이것을 옮기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란 제목을 함께 살펴보면서 아브라함이나 요셉, 다윗 처럼, 이런 산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서 축복도 받고 세상도 변화 시킬 수 있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신자는 누구나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는 것을 먼저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것을 현실화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사장(死藏)해둡니다. 사용치 않고 그냥 묻어둡니다. 바로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나 같은 게", "내가 뭘" 하고 말합니다.
이것은 결코 겸손이 아닙니다. 이것은 불신앙입니다.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4:13)고 하였습니다.
주님도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고 하셨습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산이 무엇입니까?
이 말씀은 당시의 유대인들의 격언(格言)적 배경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아주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산을 옮긴다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란 말은 인간적으로 보면 아주 불가능하게 보이는 난제들을 해결하는 그런 믿음을 말합니다.
사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기독교 신앙은 이런 산과 같은 수많은 난제(難題)들을 해결하여 왔습니다. 예를 들면 바울은 당시 로마는 물론 동족 유대인들의 핍박의 산이 그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마게도냐 사람이 부르는 환상을 보고 세계선교를 이룩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산을 옮기는 믿음입니다.
또 기독교 역사(歷史)에 있어서 로마제국은 태산보다도 더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로마제국은 결국 기독교화 되었습니다.
이교도(異敎徒)인 콘스탄틴이 313년에 기독교를 승인했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산을 옮기는 것과 같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불가능한 것이 믿음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때에 믿음으로 산을 옮길 수 있습니까?
첫째로 산을 옮기는 꿈, [비젼]을 가져야 합니다.
심리학자들은 비젼을 가질 때 ‘세 가지 이적’이 우리 몸속에서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먼저 기회를 구하는 뇌활동이 머리속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뇌세포가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단을 촉구하는 화학성분이 혈관속에 주입된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꿈을 가지게 되면 뇌세포와 혈관이 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비젼을 가진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비젼을 가지게 되면 몸도 변하고, 생각도 변하고 그래서 마침내는 환경도 변화시키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비젼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로 비젼만 가지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모험적인 실천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셉은 세계를 다스리는 꿈을 꾸었읍니다. 그러나 이 꿈 때문에 형제들이 그를 노예로 팔아 버렸습니다. 이방인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꿈은 마침내 현실로 이루어졌습니다.
○ 미국의 아이오아주의 ‘수 카운티’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프랑크 반다마틴’이라는 소년 바이올리니스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18세 때 불행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아버지의 대장간에서 시뻘겋게 단 쇠가 손위에 떨어져 오른손가락이 잘려나가고 엄지손가락 하나만 남았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꿈이 완전히 깨어진 것입니다. 오른손가락이 없으니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그에게는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손을 바꾸어 바이올린을 켜리라는 결심을 하고 모험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남의 몇 배를 연습하였습니다. 매우 어려웠으나 마침내 성공하여 ‘수 카운티 교향악단’의 탁월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습니다.
결국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는 믿음과 신념이 이루어 낸 것입니다.
결국 산을 옮긴다는 말은 인간적으로 보면 불가능하고 절망적인 것을 믿음으로 극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비젼과 함께 모험을 감행하는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실천없는 믿음은 역사하지 못하고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젼을 이루려면 창조적인 선언과 함께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았다고 믿는 절대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냥 되는 것이 아니고
‘바다야 잠잠하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산아 물러가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부정적으로 유인하는 것들아 물러가라!’고 선언해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적을 만들어낸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 창조적인 선언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는 자에게 함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역시 미국 오하이오주의 ‘노만 필’ 목사는 적극적 사고방식으로 유명한 분입니다. 그는 항상 불가능은 없다고 하는 적극적 믿음에 대한 책을 많이 쓴 목사님입니다.
특별히 그는 기도의 능력을 많이 활용한 사람입니다. 기도란 하나님에게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내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회를 드리는 것입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는 절대가능(絶對可能)의 신조를 가지고 일생을 산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산이 앞에 가로막힌다해도 나는 단념하지 않으리라. 나는 계속 도전하리라. 나는 산에 오르리라. 아니면 산 밑에 터널을 파고라도 통과하리라. 아니면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그대로 산을 변화시켜 금광으로 만들리라."
여러분 안에 있는 믿음을 과소평가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비록 겨자씨처럼 작아도 활용만 하면 큰 힘을 나타낼 수 있다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금도 격려해 주시고 계십니다.
문제는 그것을 묻어두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묻어두면 없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눈이 귀하다는 것을 알고 두 눈 중에 한쪽 눈을 잘 간직했다가 한쪽 눈이 나빠지면 나중에 쓰리라고 생각하고 한쪽 눈을 늘 싸매 두었답니다. 여러 해를 지나 한쪽 눈이 병이 나서 나머지 눈을 쓰려고 싸매 두었던 눈을 풀어보니 불행하게도 실명하고 난 뒤였습니다. 결국 사용치 않으니 퇴화되고 말았답니다.
끝으로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는 절대신앙이 있어야 산을 옮길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공식(公式)과 사고방식은 기도하고 그것이 응답을 받아야
“아하, 하나님이 주셨구나!”하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식과 하나님의 사고방식은 전혀 다릅니다. 기도하고 아직 받지 않았지만 나는 받았다고 그냥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미래의 약속은 현재에 이미 성취된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것이 내 손에 없을 뿐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누리는 축복, 그리고 믿음을 묻어두지 말고 그 비결을 활용하여서 하나님의 주시는 만사(萬事)를 형통케 해 주시는 축복과 山을 옮기는 축복들을 넘치게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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