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창 13:10-18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땅과 같았더라. 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13 소돔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17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주리라. 18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창세기 13장은 인생을 사는 동안에 選擇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쳐주는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조카인 롯은 그들의 가축 등 소유물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함께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兩家의 종들과 서로 티격태격 싸우는 것이 잦아지게 되자 큰아버지인 아브라함이 롯에게 주거지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13:9을 보면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롯은 소돔과 고모라 지역을 선택했고 아브라함은 살고 있던 곳에 그냥 머물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롯의 선택과 아브라함의 처신에 대해서 주께서 보여주는 가르침을 배워보겠습니다.
1. 롯의 선택
그것은 한 마디로 잘못된 선택이었고 성급한 결단이 되었습니다. 그는 큰아버지인 아브라함이 네가 먼저 선택하라고 했을 때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소돔과 고모라 지역을 선택했습니다. 그곳은 훗날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선택이 왜 잘못 되었는가를 찾아보겠습니다.
1) 눈으로 선택했습니다.
10절을 보면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눈의 기능은 다양하고 경이적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제한적입니다. 전체를 다 보지는 못합니다.
예를 들어 배우자를 선택할 때 눈으로만 결정한다면 그 선택은 위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눈은 색깔, 생김, 크기 등은 볼 수 있지만 인격이나 사상이나 신앙은 볼 수 없습니다.
창세기 6:2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고 했습니다.
신앙도 인격도 제쳐놓고 내 눈에 드는 여자, 눈으로 보아서 예쁜 여자들을 아내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타락과 범죄의 원인이 되었고 노아시대에 이르러서는 홍수심판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창세기 3:6을 보면 하와가 뱀의 꼬임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도 눈이 문제가 됩니다. 눈으로 보고 결단했습니다.
그렇다면 눈이라고 해서 다 눈이 아닙니다. 진리를 볼 줄 알고 주님을 바라보고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좋은 눈입니다.
Mrs.CLARA SCOTT 여사가 만든 찬송의 1절 가사가 생각납니다.
"어두운 내 눈 밝히사 진리를 보게 하소서
진리의 열쇠 내게 주사 참 빛을 찾게 하소서
깊으신 뜻을 알고자 엎드려 기다리오니
내 눈을 뜨게 하소서 성령이여"
믿음은 마치 눈을 뜨는 것과 같습니다. 보이지 않고,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믿음을
가지기 전에는 전혀 깨달을 수 없었던 것들을 깨달아 알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의 눈이 열리면 의심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의
혹의 눈길들이 신뢰의 눈길로 바뀌어 지는 것입니다.
신령한 눈으로 사물을 보고 세상을 보고 역사를 보고 영원한 세계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신령한 눈으로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2) 조건을 선택했습니다.
10절을 보면 롯이 눈으로 보고 선택한 곳의 조건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그 조건이란 거기에는 물이 온 땅에 넉넉했고, 여호와의 동산이었던 에덴동산처럼 아름답고 애굽땅 처럼 비옥했습니다.
건조한 기후로 사막이 많은 중동지방에서 물이 넉넉하고 땅이 비옥하고 아름답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 조건입니다.
롯은 바로 그 조건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롯은 조건이나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 어떤 돈 많은 재벌의 총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건강과 장수를 위해 물은 제주도 한라산의 生水만을 마셨고, 쌀이나 채소는 직접 무공해 농사로 재배해서 먹었고, 생선은 남태평양에서 잡은 것을 먹고, 그리고 補身을 위해 가장 좋은 것들을 먹고, 마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누구나 처럼 100년도 못살고 세상을 떠나야 했습니다.
장수, 건강, 행복의 비결은 환경이나 조건이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썩은 물보다는 생수를 마시고, 중금속 등으로 오염된 쌀을 먹는 것보다는 무공해 쌀을 먹는 것이 건강과 장수의 조건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행복이나 건강이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 맑고, 공기 좋고, 경치 좋기로 친다면 노르웨이나 오스트리아, 스웨덴, 덴마크 그리고 호주, 뉴질랜드, 미국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 사람들에게 행복한가, 만족한가를 물으면 그들은 그들 나름의 인생고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정신병자, 사기꾼, 자살자 등등의 문제를 안고 살고 있습니다.
롯이 선택했던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 물이 넉넉한 만큼 죄도 넉넉했습니다. 먹거리 볼거리가 많은 것만큼 타락과 범죄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유황불로 멸망을 당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돈만 있으면 만사가 형통이라는 사람들과, 환경문제만 해결되면 지상은 낙원이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경종이 될만한 것입니다.
☞ 가난한 시골 젊은이가 열심히 공부해서 모 명문대학 법대에 진학했습니다. 그리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그리고 사법고시에 응시하여 3년 만에 합격했습니다.
그는 내세울 것 없고가난한 자기네 집안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장가만은 명문집안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떵떵거리고 세도부리며 살고 싶었습니다.
어느날 중매가 들어왔습니다. 돈 많은 이름 있는 기업 회장의 손녀 딸이며, 그 재벌 계열회사의 사장의 장녀였습니다.
그녀는 일류대학은 아니지만 대학을 나왔고, 나이는 남자보다 다섯 살 위인 노처녀였습니다. 얼굴은 고등학교 때 입은 교통사고로 턱 밑에 흉터가 있었답니다. 그리고 사고로 왼쪽 팔이 약간 굽어있었습니다. 결혼 조건은 4개의 열쇠와 은행 통장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50평 아파트 열쇠, 자동차 열쇠, 별장 열쇠, 금고열쇠 그리고 예금통장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젊은이에게 더없는 조건과 환경이었습니다. 신부감은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건을 선택하기로 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 후 그가 그녀와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을 것인가 불행해졌을 것인가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보다 조건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보다 조건을 더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롯의 삶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롯이 선택한 그곳을 가리켜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고 했습니다.
물이 넉넉하고 아름답고 비옥한 그곳을 택하였었지만 거기 사람들이 악했기 때문에 결국 불 소나기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흔적도 없는 곳이 되고 만 것입니다.
롯은 잘못된 선택 때문에 패가망신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내도 소금 기둥으로 되어 잃었고 재산도 불타버렸습니다. 선택을 잘 해야 한다는 교훈을 발결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 땅에는 많은 불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배우지 못한 것 때문에 평생토록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든
든한 財力이 없기 때문에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좋은 나라에서 태어나지 못한 것 때문에 상대적으로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불행한 사람은 어쩌면 믿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남을 믿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사람, 남을 날마다 의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 믿음의 비밀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가장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2. 아브라함의 선택
1) 양보했습니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아브라함은 훌륭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갖은 신앙인이라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70% 이상의 신앙인의 자격을 갖춘 것이라고 인정해 줄 수 있겠습니다.
2) 말씀을 순종했습니다.
그는 선택을 자신의 의지나 판단으로 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하시면 떠나고, 머물라면 머물고, 바치라는 하나님 절대신뢰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창세기 12: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고 하는 말씀에서 보면 하란을 떠나라는 말씀 한마디에 즉시 고향을 떠났습니다.
창세기 22장을 보면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쳤습니다.
그는 눈으로 보고 머리로 생각하고 利害得失을 따져가며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멋대로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순종했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모든 것을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이 아브라함에게서 신앙이 무엇이며, 순종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롯은 자신의 의지와 결정에 따라 행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되도록 자신의 意志와 思考와 決定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고 순종했습니다.
3)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나 조건들을 선택한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 자신을 선택했습니다.
이 신앙이 바로 성숙한 신앙입니다.
환경이 나빠지고 조건이 악화되고 난관이 앞을 가로 막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주님으로 선택한 사람은 원망하거나 쓰러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롯과 같은 사람은 조건이 나빠지고 환경이 불리해지면 금방 신앙도 포기하고 하나님을 떠나기 쉬운 인물입니다.
앞에서 얘기했던 젊은이의 결혼 뒷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래 愛情이 없는 결혼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정권이 바뀌면서 처가집 가운이 기울고, 회사가 부도가 나서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6개월 만에 아내와 이혼을 하고 말았답니다.
우리는 분명히 우리의 선택과 목적을 신중하게 선정해야 합니다.
최고 최상의 신앙은 조건이나 환경을 다 빼앗겨도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앙이라야 하나님의 끝없는 은총과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본문이 그것을 설명해 줍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은 참으로 큰 것이었습니다.
1)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셨습니다.
14절을 보면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혈육인 롯은 환경과 조건이 좋은 소돔 땅을 택해서 아브람을 떠난 뒤에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눈에 보이는 조건들은 그를 떠났지만 그 조건들을 다스리시고 만드시는 하나님이 그에게 오신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2) 복을 주셨습니다.
14절-17절을 보면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17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주리라.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네 자손을 땅의 티끌같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롯에게는 땅을 주신다는 약속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롯의 후손에게는 그 번영을 보장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롯의 가슴에는 하나님을 모실 마음의 자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맞췄던 아브라함은 땅도 받았고, 건강도 받았고, 아들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신령한 축복도 받아서 믿음의 후손들을 낳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성경에서의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도 채찍질을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패배와 실패와 고통의 경험을 주어 구원으로 인도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믿음의 관계를 맺은 사람은 그러한 역사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無氣力하게 원수의 손에 넘어가 고통과 죽임을 당한 십자가가 패배의 상징이 아니라, 그 비극 속에 하나님의 最後의 勝利가 숨어 있는 것을 우리 개인의 생활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신앙의 진리인 것입니다.
"(히12:5)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 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속에 담겨있는 깊은 뜻을 우리가 발견해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하나님의 모든 것이 다 옳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의 하는 처사가 다 옳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 왜 그렇게 하십니까? 나는 건강해야 될 사람인데 왜 병들게 하십니까? 하며 반항을 한다면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믿음은 받아들이는 것으로 상대방이 100% 다 옳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다소 불만이 있고 아픔이 있어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입니다. 만약 나의 의견으로 상대방의 의견을 굽혀 보겠다고 한다면 이것은 믿음과는 어울리지 않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언자 사무엘이 활동을 始作할 무렵이었습니다.
"(삼상4:3)....장로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하면서 패배의 원인이 무엇이었던가를 헤아려보는 말씀 기록되어 있습니다.
"戰鬪에 결함이 있었던 걸일까?" 아니면 "軍備가 부족했을까?"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패하게 하셨을까?"하는 질문은 '나'와 '하나님의 믿음(신앙)의 관계'에서만 나올 수 있는 질문입니다.
나의 생활 전반에 걸쳐 종종 이런 질문을 하고 해답을 얻어 살아가는 것이 信仰生活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 직업을 주셨을까?"
"왜 나에게 실패의 쓴 잔을 마시게 하셨을까?"
나의 생활, 나의 인생, 내가 당하는 모든 사건을 하나님과의 믿음의 관계에서 그 의미를 찾고 하나님의 뜻에 따른 새 출발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순종함으로 자손만대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본래 자기가 이스라엘 노예의 자식이었으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애굽의 王室에서 成長하고 고등교육을 받게 된 것이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쓰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임을 알고 민족 해방 전선에 용감히 나선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밤낮 서너 가지 병에 시달리는 허약한 몸이었으나 이 육체의 가시가 자기의 교만을 부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봉사하게 하는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순종하고 세계로 뻗어가는 福音의 初代 宣敎師가 된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인물들의 共通點이 바로 이 점입니다.
질병으로 시달릴 때나, 감옥에 갇힐 때나, 아기를 낳았을 때나, 일이 잘 될 때나, 실패했을 때나, 전쟁을 겪을 때나, 재난을 당했을 때나, 기쁜 일이 생겼을 때나, 슬픈 일을 만났을 때 넓은 眼目으로 그것이 주는 의미를 찾아 내어 나 자신의 생각이나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사건에 어떻게 적응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여러분!
눈에 보이는 조건 때문에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환경이 변했다고 또한 원망하지 맙시다. 조건만 바라보고 조건만 따르다가 신앙을 버리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않케 되시기를 바랍니다.
조건이나 환경은 사라져도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신합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서남북에 편만한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만 바라보고 넙죽 선택해 버리는 롯과 같이 되지 맙시다.
'에덴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한 갈대 (0) | 2009.10.29 |
---|---|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0) | 2009.10.29 |
이 마음을 품으라 (0) | 2009.08.31 |
내게 구하시는 것 (0) | 2009.08.31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0) | 2009.07.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