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 갈대
마 12: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하나님께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신다는 것은 상한 갈대처럼 약하고 믿을 수 없는 인간이라도 그것을 꺾지 못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독일 철학자 '니체'는 약자를 도와주고 돌보는 것을 악이라 하여 말하기를
"너희가 길을 떠나 가다가 나이 많거나 병들어 자기 步行도 잘 못하는 사람을 보거든 그를 도와주려고 하지 말고 밀어 넘어뜨려 이런 弱子와 病者를 하루 속히 사회에서 없어지게 하라 그래야만 우리가 사는 사회가 건전한 사회가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상은 상한 갈대를 꺾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상한 갈대'란 어떤 특정한 사람을 통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나약한 인생들'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상한 갈대와 같은 존재라는 뜻입니다.
오늘도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는 한 가지 이유로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값을 너무 낮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죄인이다', '사람의 지혜와 힘은 제한되었다', … 등 인간 스스로가 자기의 값을 평가 절하하고 있음에 대하여 현대인은 지극히 싫어합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사상가 '파스칼'은 "사람은 한 개의 갈대에 지나지 않으니 만물 중에서 가장 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요단강 강변에는 지금도 넓은 지역에 갈대밭이 있습니다. 바람이 불거나 물결이 치면 갈대는 이리저리 휘어지고 또는 꺾어지고 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갈대는 습기있는 곳에는 어디서든지 자라는 식물로서 유대땅 도처에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연약하고 상한 갈대 같은 존재가 바로 인간이요, 우리들 자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단 강변에서 유대 민중에게 침례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고 하였습니다. '갈대'는 '유대 민중'을 가리키고, '여러 가지 인생고에 허덕이는 백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약한 존재인데 "인생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으며"(약 4:4), 육체는 풀과(사 50:6) 같습니다. 아침에 돋는 화초가 낮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매인 바 되어 말라 버립니다(시 90:6).
갈대 같은 존재! 이는 인간의 軟弱性을 말합니다. 인간은 갈대와 같이 약한 것인데 더구나 상한 갈대는 무력하고 나약한 인간성을 표시한 것입니다. 갈대는 바람에 꺾어지기 쉽습니다. 바람이 한 번 지나가도 상하기 쉽습니다. 인간 역시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전쟁이나 슬픔 인생의 폭풍우가 지나갈 때 마음과 육체에 상처가 나고 깨어집니다. 생각하면 모든 사람은 상한 갈대입니다.
사람은 이처럼 이같은 나약한 갈대같은 존재이건만 주님은 꺾지 아니하신다고 했으니 그 말씀의 교훈을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갈대는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갈대'란 '약한 무리'를 가리키는데, 특히 '상한 갈대'는 '나약하고 무력한 인간성'을 가리킵니다. 조금만 과로하면 피곤해 하고, 질병으로 노쇠합니다.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세운 마라톤의 신기록을 깬 인간 기관차 '아베베'는 새로운 신기록을 세운 후 얼마 안되어 황금같이 귀한 그 다리가 마비되어 훨체어를 타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또 인간 중에 정신적으로 강한 자가 있다 하나 이것도 상대적인 말이지 절대적인 말은 아닙니다. '네로'皇帝도 의지가 강한 것 같으나 실상은 의지가 약해 우울증이 심했다고 합니다. '네로'는 그것을 해소키 위해 죄인을 불태워 사람의 기름을 밤에 횃불로 사용하는 등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무자비한 폭군으로 변했습니다. '다윗' 같은 성군도 범죄하였고, '베드로' 같은 수제자도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인간은 상한 갈대입니다. 그러나 이 상하고 약한 갈대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꺾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시고 나서 베드로를 제일 먼저 찾아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시고 더 큰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나약함 속에 그의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만신창이 처럼 상한 '어거스틴'을 불러 회복시켜 오늘의 기독교 사상을 지배하는 위대한 신학자로 만든 것입니다. 진리의 붓으로 만든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빈궁과 실패와 병과 슬픔과 죄에 상한 인간들을 불러서 죄를 사해 주시고 회복시켜, 하나님 나라의 귀한 일꾼으로 삼는 것이 우리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들도 주님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으니 내가 상한 존재라고 自暴自棄 하지 말고, 상한 자이지만 주님의 손에 붙잡힌 존재가 되었으니, 그분의 능력을 힘입어 생존하는 날까지 주의 일을 힘써 해야 할 것입니다.
2. 상한 갈대는 모든 인생의 모습입니다.
상한 갈대란 인생살이에 찌들대로 짜든 자신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또 크든 작든 자신의 허물을 감추고 마치 善하고 義로운 사람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말하자면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 뿐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위선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발가벗어 보십시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不義·추악·탐욕·악의·시기·살인·분쟁·사기·악독·비방·증오·능욕·교만·자랑·우매·배약·무정·무자비… 등으로 가득찬 것이 우리의 진정한 모습 아닙니까?(롬 1-29-31)28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이러한 것들이 나와 상관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제 보다 더 겸허해 져보십시다.
더 이상 자신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과 이웃을 속이지 말고 겸허한 자세로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만을 의지하며, 겸허하고 꾸밈없이 살아가는 것이 상한 갈대의 올바른 인생살이입니다.
예수님은 땅에 계실 때 인생고에 허덕이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 광야 같은 세상에 상한 갈대처럼 쓰러지고 버림받은 인간들의 모습이 수없이 비춰올 때 주님께서는 눈물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무리를 보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한 쪽 손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불쌍한 불구자였습니다. 상처 난 인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사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펴라"고 하시사 저가 손을 폈고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게 되었습니다(마 12:4).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상한 갈대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상처난 인간들에게 향한 온유하신 성품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물론 이 예언은 그리스도의 온유하신 모습을 설명한 것이지만, 우리 인간 편에서 보면 우리 자신이 또한 상한 갈대들입니다.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의지하는 성도, 교회 그리고 민족을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시 51:17)에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상한 갈대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전적 무능을 느껴 아는 사람이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통회하고 용서를 비는 심령인 것입니다. 이런 상한 심령을 주님은 꺾지 아니하시고 내어 버리지도 아니하십니다.
'카알라일'의 '분수론'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분수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사람들은 보통 분자를 높이고자 한다. 그러나 분모를 낮추는 것이 합당하다. 일(1)도 영(0)으로 나누면 무한이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상한 갈대에서 우리 편의 바른 자세를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즉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여서 주님을 향할 때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과 능력을 받을 것입니다. 상한 갈대는 보기조차 싫은 정상적이지 못한 비인간적인 사람의 모습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그러한 사람은 싫어합니다.
자신이 직접 피해를 당하지 않았더라도 그들을 업신여기고 미워하고 때로는 증오하기도합니다. 그런 사람을 쉽게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속성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주님의 무한한 자비나 긍휼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 역시 이러한 무한한 주님의 자비와 긍휼에 힘입어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형제를 쉽게 비난하고 증오하는 우리의 행위를 멈추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곧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라고 하는 격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이같은 못된 심령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4. 주님은 상한 갈대라도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 세상은 자기에게 유리할 때는 이용하려 들지만 조금도 상처가 나서 흠이 있으면 버림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 人心입니다.
한 형제가 이른 아침부터 회사를 위해 열심히 뛰고 일했습니다. 그런데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게 되자 위로는 커녕 해임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뉴질랜드에서는 심장 수술을 받고 병상에 누워 있는 직원을 찾아가 해고를 통보한 사장님이 있어 너무한 게 아니냐는 비난이 일고 있다. 23일 뉴질랜드 言論들에 따르면 크라이스트처치에 사는 머레이 가디너(60)는 지난 달 초 1주일 정도 가슴에 통증을 느끼다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 이중 바이패스 수술을 받고 병상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11년 동안 몸 담아온 회사의 줄리안 프록터 社長이 갑자기 병상으로 찾아와 解雇를 통보했다. 프록터는 가디너에게 해고를 통보하면서 심장 수술이 부분적으로만 성공했기 때문에 일어나도 더 이상 회사에서 정상적으로 근무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강도는 그에게 상처를 입히고 다 빼앗아 버리고 갔습니다.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상처난 인간, 쓰러진 갈대처럼 되어버린 인간을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부었습니다. 이 이야기에 예수님의 상한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상처 난 인간을 외면하고 귀찮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여러 모양으로 상처 난 인간들을 찾으시고 그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약한 자를 택하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 없는 것을 택하여 있는 것을 폐하려고 하셨습니다(고전 1:26-30).
(시 34:18)에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도다" 하시었습니다. (시 147:3)에서 "하나님은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도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상한 갈대처럼 쓰러질 때 불쌍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잘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연약한 갈대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긁은 건장한 사나이였기에 용기도 있었습니다. 그는 장담하기를 "다 주님을 버릴지언정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이 잡히시던 날 밤 닭 울기 전 연약한 소녀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주님의 시선은 베드로를 돌아보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 말씀이 생각나서 뒤돌아서서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그는 상한 갈대가 되었고 연약한 소녀 앞에서 부러진 갈대처럼 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신 후 베드로에게 나타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속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다시 큰 사명을 맡기셨으니
"내 양을 치고, 내 양을 먹이라"고 분부하였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오히려 회복시키셔서 귀한 직분을 맡기셨던 것입니다.
5. 주님께서는 상한 갈대를 향한 기대가 있습니다.
갈대는 곱게 자랍니다. 꺾이면서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비록 상한 갈대일지라도 잡초와는 다릅니다. 갈대는 약하지만 특성을 지닌 식물입니다. 아무것도 아니게 보이지만 무엇인가 쓸모 있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향하여 흔한 것 속에서 그 가지의 존귀성을 인정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실 때 소금은 흔히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참으로 존귀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나부끼는 갈대, 요단 강가의 바람에 상한 갈대! 그러나 그 갈대는 참으로 감추어진 쓸모가 있었습니다. 갈대는 대나무처럼 곧게 자라서 길이를 척도로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주님의 심정은 이 연약한 갈대를 통하여 이 세상을 재는 자(尺)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을 바라볼 때 자신의 양심과 생활을 판단해 주는 표준 측정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는 오늘의 사회를 저울질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 돌아가면 부정한 남편이나 방탕한 자녀들이 기도하는 어머니의 정결한 마음과 신앙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직장에 가면 그리스도인의 선한 양심과 진실 때문에 모든 직원들이 자신의 하는 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요 3:20)에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양심을 재는 자(尺)와 같습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설 때 자신의 행위를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오늘 이 세상을 측정하는 자(尺)로서의 사명을 다할 때 세상은 우리를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행위의 심판을 스스로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곳에서는 정의의 '자'(尺)가 되어야 합니다. 어두움이 있는 곳에 빛의 '자'(尺)가 되어야 합니다. 갈등이 있는 곳에 평화의 '자'(尺)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不正한 良心과 거짓된 자로 살려고 하나 義로운 자 앞에서 자기 위선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바른 '자'(尺)로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비난하고 핍박하고 때로는 죽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난받고 핍박받고 죽게 되더라도 이 세상을 바르게 살도록 우리는 곧은 자(尺)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이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임무를 하라고 우리를 불러 주시었기 때문입니다.
6. 예수는 갈대를 긍정적으로 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상한 잡초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상한 갈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대는 크게 자라납니다. 속이 비었습니다. 갈대는 약한 바람에도 쉽게 흔들려 연약하기 그지없는 식물입니다. 그러나 갈대는 약한 존재지만 무엇인가 희망적이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 같지만 무엇인가 되려고 하는 존재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대 같은 체험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고후 4:8-10)에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고후 6:8-10)에서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며 유명한 자 같으나 죽이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은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상한 갈대를 교회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피의 거름 위에 선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 역사는 수난의 역사입니다. 우리 교회는 상했어도 갈대입니다. 무엇인가를 지니고 있는 갈대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의 원리'를 발견하고 박학들이 모인 곳에서 한 유명한 연설이 있습니다. "나치스의 독재에서 독일인을 구원한 곳이 어디인가? 먼저 대학 교수에게 기대를 걸어보았다. 그러나 독일의 지성인들은 쉽게 나
치스에게 굴복하고 말았다. 다음에 신문 기자들에게 기대를 걸어보았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독일 신문은 붓을 들어 나치스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향기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평소에 무시당했던 교회였다. 교회만은 항거하며 수 백명의 목사가 감옥으로 가면서도 교회만은 진리와 자유를 사수했다. 나는 처음에 교회를 경멸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 없는 존경으로 교회를 바라본다"고 외쳤습니다.
교회는 작으나 크나 소망이 있는 곳입니다. 신자에게는 믿음이 작으나 크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7. 주님은 상한 갈대를 되살리십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신다"는 말씀은 심판받아야 마땅하지만 불쌍히 여겨 심판만은 면제해 주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값싼 동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상한 갈대에 새 생명을 불어넣어 그 생명을 소생케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시 23:3). 이것이 무한 자비하신 주님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세상은 할 수 있는 한 형제의 허물을 빌미로 그들을 짓밟고 인격적으로 매장해서라도 자신을 더 높이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려 하지만 (눅 18:11), 주님은 그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고, 온전한 인격체로 살아가게 하십니다(눅 18:13-14).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따라서 우리가 진정 주님의 제자라면 형제를 비방하고 정죄하는 일을 중지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형제의 허물을 감싸 안아야 합니다. 형제가 자신의 단점을 딛고 한 인격체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상한 갈대는 누군가 좋게 보아 주고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는 일 없이는, 굳이 꺾지 않아도 저절로 죽어갈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왜입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좋게 봐 주셨기 때문입니다. 꺾지 않고 생명을 불어 넣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은혜만을 받고 안주하지 말고, 우리 주위에서 주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이 귀한 진리의 말씀을 전해주고 표현하는 증인이 되 주어야 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사명으로 맡겨진 존재들인 것을 명심하고 더욱 능력있는 신앙으로 매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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