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골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거듭난 삶 2009. 10. 29. 16:59
728x90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예수님의 마음)

 

(빌 2:9-11)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빌2:5)고 말한 후 그리스도의 마음을 세 가지 양상으로 묘사했습니다.

 

① 만물이 존재하기 전에의 그리스도의 상태, 곧 영원토록 아버지와 동등한 지위에 있던 상태를 말씀했고(빌2:6),

 

②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아버지께 복종한 것을 증거 하였고(빌2:7-8),

 

③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일로 말미암아 지금은 물론이요 영원토록 그리스도께 더해진 영광을 말했습니다(빌2:9-11).

인류의 구속은 구세주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구세주가 되고자 그 자신을 확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임을 당한 어린양"(계13:8)이십니다.

 

"그리스도"(기름부음 받은자)는 아버지와 함께 있었으나 그의 마음이 그렇게 되고자 결정하셨기 때문에 "예수"(구세주)가 되신 것입니다. 그 결정은 억지로 내린 것이 아닙니다. 타락한 인류에 대한 사랑에서 결정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고 주님은 말씀했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2:16)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1. 왕과 종

 

(1) 왕과 종은 양극의 위치에 있습니다.

왕은 제일 높은 자이고 종은 제일 낮은 자입니다. 왕은 제일 존귀한 자이고 종은 제일 비천한 자입니다. 왕은 가장 强한 자이고 종은 가장 弱한자입니다. 왕은 가장 부한 자이고 종은 제일 빈한 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왕의 자리를 버리시고 종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는 참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시고 마굿간에서 태어나시고, 목수의 아들로 자라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2:6-7)라고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세상에 오신 구세주요 왕이시지만 섬기고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과연 섬기기 위해 세상에 오신 주님이시기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병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돌보셨으며 마지막에는 자기 목숨을 버려 성부의 뜻에 복종하여 죄에 빠진 인생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과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은 종으로서 왕이 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이 주님일진대 그들은 종이며, 예수님이 스승일진대 그들은 제자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다투는 주제는 항상 "누가 크냐"(막9:34)였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주님의 발을 씻어 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기대한 것은 現實的 王國이었고 좌정승 우정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취하신 종의 모습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의 나라도 하나님의 왕국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그들에겐 自我中心의 慾望과 눈에 보이는 나라의 높은 자리뿐이었습니다.

 

(2) 왕이란 으뜸이요, 우두머리요, 주권자요, 지배자를 일컫는 말입니다.

자기위에 아무도 없을 때 왕이 되는 것이니 眼下無人이 되거나 오만하게 되기 쉽습니다. 왕의 습성은 군림하는 것으로서 백성을 섬기려 하기 보다는 부리려하고 사랑하고 돌보기보다는 수탈하고 노예화시키려는 것입니다(삼상8:10-18).

 

모든 것을 自己中心으로 백성을 동원하고 노역을 시키고 재산을 징발하고 백성을 압제하기도 합니다. 이런 왕이 신뢰하는 바는 오직 권력뿐입니다. 권력은 무소불능이라고 믿습니다. 자기를 주권의 원천이라 여기고 여기에서 권력의 세습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런 왕들은 자기위에 하늘의 왕이 계신 것을 모르고 결국 그 까닭으로 종국에는 패망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늘에 참 왕이 계시며 이 땅의 모든 인생은 다 그의 종들임을 믿는 것입니다(골4:1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배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마23:1-12).

 

(3) 종이란 주인에게 예속된 자입니다.

종의 본분은 섬기는 것입니다. 종의 의뢰하는 바는 오직 주인뿐입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해달라고 기도했듯이(눅22:42),

모세가 하나님의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여 인정받았듯이(히3:5) 종의 자세는 그런 것입니다.

 

르호보암왕이 솔로몬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려는 욕심으로 세겜에 나아 갔을 때 在野지도자 여로보암과 백성들이 청원하기를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부친이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지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면 우리가 왕으로 섬기리이다" 했습니다.

 

르호브암은 3일후에 대답하겠다고 하고 부친 솔로몬왕의 생전에 보좌했던 원로 중신들에게 자문을 청했을때

"왕이 만일 오늘날 이 백성의 종이 되어 저희를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저희가 영원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 했으나 르호보암이 자기의 측근들에게 다시 물으니

 

"나의 새끼손가락이 내 부친의 허리보다 굵으니 내 부친이 너희로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 찌라. 내 부친이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고 조언했습니다.

 

어리석은 르호보암은 백성의 종이 되라는 원로들의 자문을 버리고 가혹한 왕이 되라는 소년들의 자문을 따르므로 나라의 절반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미디안의 압제에서 나라를 구원한 기드온은 백성들이 세습왕조의 왕이 되기를 청했지만 현명하게도 단호히 거절했습니다(삿8:22-23)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23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사사기에서 감람나무, 포도나무, 무화과나무는 나무들 중에 왕이 되어 달라는 요청에 기름과 열매와 포도주를 내는 귀한 역할 때문에 왕 되는 것을 거절했지만 가시나무만은 거드름을 피우며 수락코자 했습니다(삿8:22-23).

 

이처럼 자기 분수를 모르는 자만이 왕이 되려 하고 또 그 때문에 망합니다. 그러나 지혜자는 자기의 받은 달란트대로 겸손히 봉사하는 삶에 만족할 뿐 왕이 되려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마음은 종의 마음입니다. 세상에 오신 메시야는 군림하는 왕의 모습이 아니라 고난 받고 봉사하는 종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누릴 수 있고 그 권리를 주장할 수 있고, 대우를 받으실 수 있지만 모두 다 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도 이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4) 예수님은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종의 형체란 존재의 모든 것을 완전히 하나님 뜻에 예속시켜 버린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그 뜻만을 이 땅에서 행할 수밖에 없는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그 뜻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나타내시고자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의 역사에 오셨습니다.

 

☞어떤 청년이 하나님의 사람 되심과 예수님이 人性과 神性을 가지심이 이해가 되지 않아 의문을 가지고 번민하고 있을 때 봄 동산을 거닐다가 개미둥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따뜻한 봄날 개미들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이 청년의 그림자에 개미떼들은 위축되어 갑자기 활동이 둔화됩니다. 청년은 속으로 말합니다.

 

"개미들아 내가 너희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야, 두려워하지 말아라" 했으나 소용이 없습니다. 이때 이 청년이 깨달았습니다.

 

아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려 하실 때 사람이 되지 않고야 어떻게 말씀하실 수 있겠는가? 비로소 도성인신의 진리를 깨닫고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을 입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영원자존 하신 분이며(출3:14), 없는 가운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요, 만물을 보존하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을 입으시고, 우리와 같이 되셔서 우리의 구주가 되사 영생을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이해하실 수 없거나 동정하실 수 없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와 같이 되사 모든 시험과 고난을 몸소 체험하신 하나님이십니다(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롬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우리의 구속자가 되시기 위해서 그는 사람의 모양이 될 필요가 있었습니다(히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2. 죽기까지 복종

 

(1) 복종의 의미

순종은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것이요, 복종은 납득이 가지 않지만 따라가는 것이요, 굴종은 억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복종과 순종에 한계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예수께서는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忠誠盡命이란 말이 있습니다. 충성은 목숨을 다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복종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위대한 믿음의 선각자들과 믿음의 선배들은 순종의 사람, 복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삼상15:22)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순종의 차원이 아니라 복종의 차원이었습니다.

"네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창12:1)했을 때 떠났습니다. 100세에 낳은 아들을 모리아산에서 와서 번제로 바치라고 하나님 말씀하셨을 때 "예!" 하고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발걸음을 향했습니다(창22:1-14). 가는 도중에 이삭이 묻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제물은 어디 있나요?"

"하나님께서 준비하실 것이다" 아브라함의 대답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수풀에 걸린 수양을 예비하사 이삭을 대신하게 했습니다.

 

(2) 예수님 마음은 복종의 마음입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8)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시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화려한 왕궁도 아니요, 안락한 곳도 아닌 초라하고 외로운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머리조차 둘 곳 없이 초라하게 사셨습니다(마8:20). 이것으로도 모자라 죽기까지 복종하리 만큼 낮추셨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사망이 인류에게 내렸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롬5:12,19).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을 死亡에서 生命으로 옮겨 주기 위해서(요5:24) 사망의 자리까지 내려갈 정도로 복종하셨습니다(신21:22-23,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죽기까지 복종, 이것이 예수의 마음입니다. 순종 뒤에 고통이 따를지라도 주님의 뜻이라면 순종해야 하고, 손해라도 봐야 하고, 고통을 견디어야 하고 희생할 수 있어야 함을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물론 환란 때 순종도 중요하지만 편안할 때 즐겨 순종함 또한 중요합니다.

 

번영과 풍요가 하나님의 축복일 수도 있지만 또한 하나님을 거역하는 위험일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을 향하여 행진하면서 말할 수 없는 고생과 어려움을 겪는 동안 그들의 신앙자세는 건전하며 긴장과 인고와 투쟁과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단 가나안을 정복하고 그 땅에 정착하고 생활이 안정되면서 그들은 정신적으로 해이해지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등 온갖 타락의 구렁에 빠져든 것입니다.

 

하나님보다는 자기를 살찌우고 자기만족의 허영은 마침내 하나님의 분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암3:14-15, 4:1-2, 신32:12-16).

 

(3) 복종하는 자세의 훈련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복종하는 자세를 훈련받아야 합니다.

 

① 하나님의 뜻을 찾는 자세의 훈련입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막12:29-31).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했습니다.

 

②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나를 맞추는 훈련입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롬7:22,23)고 바울은 탄식했습니다.

 

어려워도, 힘겨워도, 피 땀이 나도 주님의 도우심 속에서 나를 쳐서 복종시키고(고전9:27) 하나님의 말씀에 나를 맞추는 노력고 훈련을 해야 합니다.

 

③ 구원의 조건이어서가 아니라, 그 은혜에 응답하는 마음으로 쳐서 복종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독자 이삭까지도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드렸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열국의 아비가 되는 축복과 함께 많은 믿음의 후손들로부터 믿음의 조상이란 칭호를 아브라함은 받았습니다(창22:1-19).

 

삭개오는 포기하지 못했던 부당한 재물을 포기하고 주님 앞에 결단함으로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는 축복을 받았습니다(눅19:1-10).

 

이와는 달리 한 부자 청년과 초대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포기의 결단을 내리지 못하여 불행한 인간이 되고 만 것입니다(막10:17-22, 행5:1-6).

 

① 욕심을 포기합시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했습니다.

 

② 미련을 포기합시다.

롯의 아내처럼 소돔성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뒤돌아보다가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생명을 잃어버리고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창19:1-28).

 

③ 포기한 자에게 주시는 상급이 큽니다.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으며 눈물 흘린 마리아(마26:7-12, 막14:4-5, 눅7:36-46, 요12:5)가 있습니다. 이 향유는 그의 평생에 몸을 팔아서 모아둔 값비싼 보화였습니다. 이 귀한 옥합을 깨뜨렸을 때 한 제자는 미련한 짓이라고 꾸짖었으나 예수님은 그 여인을 칭찬하시고 아낌없이 축복하셨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사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했습니다(빌3:8),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동등한 보좌를 포기하시고 왕의 신분에서 종의 신분으로 오셨으나 萬王의 王이 되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의 마음을 가집시다.

'에덴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혜의 여인 룻  (0) 2009.11.05
상한 갈대  (0) 2009.10.29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0) 2009.09.21
이 마음을 품으라  (0) 2009.08.31
내게 구하시는 것  (0) 2009.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