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거듭난 삶 2019. 3. 29. 00:18
728x90

속된 것에 대한 견해

 

: [ 14:13-14]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14) 내가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 14: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 이것은 단락의 권면을 간결히 요약한 것이다.

 

또한 부분은 10 하반절부터 12절까지의 내용에서 끌어낸 결론으로서

이제 이상 서로 판단(비판)하는 습관에 빠지지 것을 권면하고 있다.

 

(10-12 네가 어찌하여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그리고 권면은 강한 자와 약한 ,

집단 모두에게 주어진 교훈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Godet, Dunn, Althaus, Gaugler, Cranfield).

 

7:1 병행구에 나타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예수의 말씀에 본문이 의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Dunn).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 이것은 특별히 강한 자들에게 주어진 경고이다(Murray, Cranfield, Godet).

 

사람의 행동이 형제에게 미칠 있는 영향,

특히 자유를 누리는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에게 미칠 있는 영향력에 대해서

특별한 주의를 상기시키고 있다(Cranfield, Godet, Murray).

 

예컨대 바울은 다른 형제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행동 방식을 택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바울은 다른 형제의 신앙 성장에 방해되거나 그를 넘어뜨리는 원인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단호하게 피할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비록 바울이 믿음이 강한 형제라고 직접 지적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형제 앞에 거치는 것을 놓치 말라는 훈계에서

믿음이 강한 형제를 염두에 두었음이 틀림없다.

 

바울은 앞에서도 믿음이 강한 형제들에게 연약한 형제들을 업신여기거나

경멸하지 말라고 경계한 있다.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10 네가 어찌하여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이제 본절에서 바울은 걸음 나아가

'부딪힐 '이나 '거칠 '으로 연약한 형제 앞에 두지 말라고 주의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부딪힐 '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스콤마'

글자 그대로 사람의 발에 걸려 넘어지게까지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stumbling block;KJV, RSV).

 

그리고 '거칠 ' 해당하는 헬라어 '스칸달론'

어떤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마련된 장애물 또는 (obstacle;NIV) 뜻한다(Meyer, Murray).

 

용어는 죄로 끌어 들이기 위해 유혹하는 어떤 것을 나타내는 묘사이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예수의 십자가 지는 것을 만류하려 했을

'스칸달론' 베드로에게 사용했었다.

 

(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그리고 용어는(프로스콤마, 스칸달론) 의도적으로 형제를 꾀어

그에게 죄가 되는 것을 행하도록 유혹하는 것에 대한 단호한 경고로서 사용된 것이라 하겠다.

 

비록 어떤 행동을 동기가

형제를 '연약한 ' 범주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순수한 열망에 있다 할지라도

그로 인해 형제의 신앙 성장에 방해가 되거나 그를 넘어지게 하는 원인이 된다면

그것은 그릇된 것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본절에서 믿음이 강한 성도들에게 촉구하는 것은

 

(1) 그들이 다른 형제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행동 방식을 택해야 한다는 것과

(2) 다른 형제들의 신앙 성장에 방해가 되거나 그를 넘어뜨리는 원인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단호하게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바울의 훈계는 강한 자들의 어떤 행동이

다른 성도들을 걸려 넘어지게 수도 있고 근심되게 수도 있으며

심지어 파멸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바울은 강한 자들이 어떤 일을

먼저 ' 일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가 일을 한다면 믿음이 약한 형제들은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인가?'

생각하여 공동체의 건덕을 위해 사려깊은 행동을 것을 촉구한 것이다(Harrison).

 

 

 

[ 14:14] 내가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내가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 이는 강조적 문구로서 절대적인 자기 확신을 말한 것이다.

 

'확신하다'(페이도)라는 말이 신약성경에서 대표적으로 사용된 용례를 보면,

 

5;10; 2:24;살후 3:4에서 강조 완료 능동태 1인칭으로

' 안에서'( 퀴리오)라는 어구와 뒤에 '호티'(that)절과 함께 쓰여 자기 자신의 의지에 의하여 능동적으로 확신함을 나타낸다.

 

( 5;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2:24 나도 속히 가기를 안에서 확신하노라;

 

살후 3:4 너희에게 대하여는 우리의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행할 줄을 우리가 안에서 확신하노니)

 

그러나 본절에서는 '페이도' 완료 수동 1인칭 단수인 '페페이스마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오이다 카이'('내가 알다') 앞에 놓임으로써 '페페이스마이' 의미가 강조되었다.

 

본절에서는 ' 퀴리오', (' 안에서') 다음에 '예수'라는 호칭이 덧붙여졌다.

이는 '호티'(that)절의 내용에 커다란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없이 보여준다.

 

그렇다면 ' 예수 안에서'라는 말을 덧붙이고 거기에다

'확신한다' 말을 수동형으로 표현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다음을 의미한다고 있다.

 

(1) 바울이 가진 확신이 스스로 자기 안에서 생긴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얻은 객관적인 진리임을 의미한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 복음 안에서 갖는 확신임을 뜻한다.

 

(2) 바울이 여기서 예수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사용한 것은

역사상의 예수의 어떤 특정 가르침,

15:10, 11, 15-20; 7:15-23 등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없다.

 

( 15:10-11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11)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15-20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16)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17)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7:15-23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16)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17)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비유를 묻자온대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19)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20)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23) 모든 악한 것이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3) 아울러 자기의 확신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다는 의미도 포함된 것이다.

 

바울은 위의 가지 요소를 포함하여 '내가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합니다'

강력하게 자기 확신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믿음에 근거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Godet, Meyer, J. Murray, Cranfield).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 말은 바울이 확신한다고 힘주어 말하는 진리로서 면밀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스스로'라는 말의 헬라어 ' 헤아우투'

' 자체가' 혹은 '본질적으로'라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먹을 있는 것으로 주신 음식물 자체' 말한다(Godet, Cranfield, Sanday).

 

바울은 여기서 인간들의 행위, 태도, 욕구, 사고 등에 대해서 논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 사용할 있는 피조(被造) 세계의 자원,

중에서도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먹는 음식으로 주신 모든

그것 자체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이든지 ...없으되', 혹은 '아무것도 ...아니다' 헬라어 '우덴'

본절에서 제한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코이논'('속된 ')이란 단어 역시 자체는 불결하고 순결치 못한

특히 율법의 의식에서 깨끗치 못한 것을 의미하나,

 

( 7:2 그의 제자 사람의 부정한 씻지 아니한 손으로 먹는 것을 보았더라,

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10:14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10: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여기서는 어떤 음식물도 자체는 () ,

불결한 것이 없다는 것을 천명한다.

 

결국 바울은 모든 음식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으니

먹을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먹을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본절에서 뿐만 아니라 딤전 4:4에서도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고

확언함으로써 같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이는 음식물에 대한 강한 자들의 기본 입장과 사도의 견해가 일치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취해야 정당한 원리가 된다.

 

다음과 같은 이유를 생각할 더욱 그러하다.

 

(1) 바울의 주장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다고 확신하는) 본질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들에게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7:15-23) 말씀하셨는데

 

말씀 가운데는 모든 음식물이 자체는 깨끗하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Harrison).

 

(2) 창조에 관한 말씀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견해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1:31) 창조 기사의 말씀과 원리를 같이하고 있다.

 

(3)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이제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바울의 확신은 아주 타당한 것이다.

 

(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이는 '속되다', '속되지 않다' 시시비비(是是非非) 따지는 구약 율법의

의식적 부분에 관한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시대가 도래하여 시대의 의식법(儀式法) 문자적으로 순종할 필요가 없다.

 

신약의 아래 사는 우리는 이제 구약의 의식이 증언하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그리스도 그분을 믿을 의식에 순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Calvin, Kasemann, Cranfield).

 

 

다만 속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 구약의 의식이 그리스도를 가리키기 위해

주어진 이상, 그리고 구약의 율법이 가리키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친히 영원하신 속죄의 제물이 되어 거룩한 사역을 완성하신 이상,

이제는 이상 구약의 율법 의식에서 불결한 것과 정결한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문자적으로 매일 필요가 없다.

 

따라서 이런 진리를 파악하여 믿는 신자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가하여

율법이 부정하다고 선언한 음식이 이상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복음 안에서 누리는 이런 진리를 아직도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한 신자들,

진리 안에서 내적 자유를 얻지 못한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의식법에 대한 문자적 순종을 소홀히 하는 것은 잘못이다.

 

다시 말해 과거에 종교적으로 불결한 것으로 금지되었던 고기들은(음식물은)

자체가 객관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이상 부정하지 않다 하더라도

스스로 속되게 여기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주관적으로 여전히 불결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스스로 속된 것이 없다' 바울의 확신을

모든 사람이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어떤 음식물을 깨끗하지 않다고 그의 마음에 확신한다면( 11 참조)

그에게 있어서 음식물은 깨끗하지 않은 것이 된다.

 

이는 각자의 믿음의 분량(分量) 함께 신앙 양심의 자유에 근거한

개인의 확신에서 행해지는 것이므로 누구도 판단할 성격이 아님을

양쪽 모두에게 절묘하게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Murray, Meyer).

 

이런 뜻에서 바울은 전반절에서 약한 자에게 강한 자의 믿음의 수준을

이해시키면서 음식물의 본질에 대한 진리를 설명한 반면

후반절에서는 강한 자에게 약한 자의 믿음 분량을 깨우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