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거듭난 삶 2019. 5. 9.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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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성육신

 

: [ 1:14-18]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것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 본문은 9절에 서술한 성육신 사건을 다시 언급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육신' 육체적 존재를 의미한다.

 

( 4: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신을 의미한다.

 

바울도 용어를 하늘이나 영의 영역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고 있다.

 

( 1:3-4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우리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육체의 지혜, 하나님의 권능과 육체의 무기는 서로 반대되며 서로 대적한다.

 

(고전 1:24-31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자랑하는 자는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10:4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육체' 결코 부합 없다.

 

( 9:8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그러나 용어가 그리스도에 대해 쓰일 경우에는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체' 의미하지 않으며,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단지 인간적인 한계성과 연약성을 지닌 존재임을 나타낸다.

 

(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이는 그리스도의 완벽한 성육신을 나타낸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증으로서 본서는 그리스도의 인성(人性) 보여준다.

 

(1) 피곤 - (4:6 거기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육시쯤 되었더라)

(2) 갈증 - (4:7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달라 하시니)

(3) 하나님께 의존 - (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4) 슬퍼 눈물을 흘리심 -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5) 분노하심 - (11: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6) 갈등 - (12:27 지금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때에 왔나이다)

(7) 수난과 죽으심 - (18, 19) .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우리 가운데'(엔 헤민)라는 표현은 10절의 '그가 세상에'라는 말과 내용상 일치한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세상에서 이루어졌으며, 우리 인간들 속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우리가 영광을 보니 - '보니' '놀라운 상태에서 실제로 목격했다'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는 아마도 저자 요한이 예수님의 변모(Transfiguration) 대한 회상을 기초로 하여 사용한 용어인 같다.

 

( 17:2-8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얼굴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나아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9:2-8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3)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

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

7)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 문득 둘러 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9:28-36 말씀을 하신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 문득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32) 베드로와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함께 사람을 보더니

33)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34)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

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것을 무엇이든지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예수는 거룩한 광채와 함께 나타나 보이셨으며, 하나님의 사랑스런 아들이심을 나타내셨다.

 

이는 시편 기자의 '주의 영광을 저희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90:16)라는 간구를 연상케 한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와 부활은 자체로서 어둠 속에서 빛이 환하게 비치듯이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사건으로서 우리 성도들의 영광을 위하여 예정된 것이었다.

 

(고전 2: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벧전 5: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 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근원이 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에 있음을 재천명한다.

 

1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나타냈듯이 본문에서도 그리스도의 영광이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대당함을 보여주고 있다.

 

요한에게 있어서 용어는 오직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으며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누가복음과 히브리서에서 보다 심오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1) 하나님의 자녀중 하나가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서 중보자적 사역을 담당하시는 유일하신 분이며,

 

(3:17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26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지니신 대등하신 분이며,

 

(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5: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 세상에 하나님을 완벽하게 계시하신 유일하신 분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2:6-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은혜와 진리'(카리스 카이 알레데이아)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였다.

 

(삼하 2:6 너희가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

 

사도 요한은 문장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이 대등하고 등질적(等質的)임을 묘사한 후에 이어서 하나님의 성품인 은혜와 진리가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성품과 일치함을 보여준다.

 

이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그의 지상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성을 드러내셨음을 시사한다.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특히 기독교적 측면에서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이 인류 구속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일방적인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한편 '가득차서 넘치는'이란 은혜와 진리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 속한 은혜와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차고 넘치게 흘러 나와 성도들에게 임하여 역사(役事)한다는 것이다.

 

 

 

[ 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것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 사도 요한은 침례 요한의 사역을 극적이고도 생생하게 재현시킨다.

 

그리고 그의 증거 사역이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과 일치됨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내가 전에 말하기를 - 원어상으로 본절은 '내가 전부터 그에 대하여 증거해 왔다'라고 번역될 있다.

 

따라서 표현은 혹자들의 이해대로 침례 요한의 사역에 대한저자 요한의 삽입적인 해석(Westcott, Hort)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침례 요한의 부단한 증언이라고 봄이 문맥상 타당하다.

 

나보다 앞선 - 앞에서 언급한 ' 뒤에'라는 표현과 대조된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침례 요한보다 6개월 뒤에 태어나셨으며

 

( 1:36 보라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2) 침례 요한의 사역의 시작 뒤에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 1:14-15 요한이 잡힌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그러나 예수가 침례 요한보다 '앞선'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1) 침례 요한이 인간에 지나지 않는 반면에 예수는 창조 전부터 하나님과 더불어 선재하셨던 분으로서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시다.

 

(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2) 따라서 신분이나 권능에 있어서 당연히 침례 요한과는 비교도 없다.

 

특히 침례 요한은 예수의 우월성을 당연하게 시인하였으며(3:22-30),

 

예수를 가리켜

 

'나보다 능력 많으신 '( 3:16),

'하나님의 어린양'(29, 36),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 1:7) 등으로 호칭하였다.

 

이처럼 침례 요한과 예수는 결코 비교할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침례 요한과 예수가 상호 비교되어 묘사되어 있는 것은

 

(1) 예수의 공생애 직전 침례 요한의 추종자들이 많았다는 점과

(2) 그에 따라 침례 요한이 메시야로 오인(誤認)되었다는 , 그리고

(3) 초대 교회의 선교 당시에도 침례 요한의 제자들이 상당수 존재했다는 등에서 기인한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비교를 통하여

 

(1) 예수께서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2) 요한 사역의 핵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에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 1:16] 우리가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 '충만한' '차고 넘치는 완전한 분량' 의미하며 14절의 '충만 하더라' 표현과 연관된다.

 

그러나 14절의 '충만 하더라' 그리스도의 본성과 관련하여 사용된 반면, 본문에서는 바로 그리스도의 충만하신 은혜가차고 넘쳐서 성도에게 미치는 상태를 의미한다.

 

사도 바울의 말을 빌자면, 충만함은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신' 것이며( 1:9)

'측량할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이다( 3:8).

 

그리고 루터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아무리 물을 퍼내어도 고갈되지 않는 ' 비유했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 -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씀은 문자적으로 '은혜 대신에 은혜'라고 있다.

 

이는 ' 받은 은혜가 능력을 발하고 나면 다른 은혜를 받게 된다' 의미로서 '은총을 받고 받았다'라는 뜻으로 번역될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이는 넘쳐 흐르는 충만함으로 인하여 성도에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은혜임을 요한은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제 성도는 성자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존재인 자신을 자각케 된다.

 

당시 유행했던 인본주의적 이방 종교와 이방 철학들 그리고 형식주의적 유대교라는 어두움을 뚫고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구원의 빛과 은혜를 성도들에게 끼치신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라고 선포하였다.

 

 

 

[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것이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 6절부터 16절까지 침례 요한과 그리스도를 비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충만한 은혜를 묘사한 저자는,

 

이제 구약의 율법 시대와 신약의 은혜 시대의 대조를 통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도래하는 시대의 특성을 간략하고도 명확하게 밝혀준다.

 

먼저 사도 요한은 율법 시대의 대표자인 모세를 통하여 율법의 특성을 간명하게 규정한다.

 

율법은 피조물인 인간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3:20),

'몽학 선생'( 3:24)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것이라 - 율법에 대조되는 은혜와 진리란 단순한 은사의 차원보다 높은 것이다.

 

은혜와 진리의 근원은 하나님의 속성에서 발견될 있고 이는 예수 안에서 구체화되었다.

 

어떤 면에서 예수 자신이 은혜와 진리라고 말할 있는 것이다.

 

은혜와 진리는 율법의 경우처럼 수동적으로 주어질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 선교(Mission) 가운데 임했던 것이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임함으로써 기독교가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이는 바로 형식과 위선에 치우친 유대교의 근거를 뿌리채 뽑아버리는 말씀임과 아울러 교회의 근거를 확고한 참신앙의 반석 위에 세우는 말씀인 것이다.

 

 

 

[ 1:18] 본래 하나님을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본래 하나님을 사람이 없으되 - 문자적으로는 '결코 보이신 적이 없는 하나님'이란 의미이다.

 

비록 모세가 여호와와 대면했다는 명성을 얻기는 했으나

 

( 33:11 사람이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34:10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역시 하나님의 본체를 본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유한하고 죄악된 인생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 33:20 가라사대 네가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자가 없음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내신데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이 예수를 죽이려고 정도로 격분하였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10:20-33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말을 듣느냐 하며

21) 혹은 말하되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있느냐 하더라

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3) 예수께서 성전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26) 너희가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 양은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저희를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저희를 주신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없느니라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3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아버지 품속에 있는 - 표현은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1절의 '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는 말씀과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는 표현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존재하고 계셨던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암시하며 또한 그리스도의 신성까지도 함유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 품속에 있는'이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구절이다.

 

독생하신 하나님 - 14절의 '아버지의 독생자' 상호 연관되는 칭호는 바로 은혜와 진리의 부여자(附與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것이라)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의 본성인 은혜와 진리로 교회를 형성하신 분이라는 의미를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 속에서 드러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와 같은 신앙은 기독교가 당시의 이방 철학이나 종교 그리고 율법주의 로마 제국주의에 대항할 있었던 힘의 원천(源泉)이었다.

 

특히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 성도들 사이에 암호로 통용된 물고기 그림에서 당시의 신앙을 발견할 있다.

 

헬라어로 '물고기' '잎뒤스'로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주'(에에수스 크리스토스, 데우 휘오스, 소텔)라는 말의 약자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굳건한 신앙 고백을 토대로 교회가 온갖 박해를 이기고 어두움 속에 빛을 비추었듯이,

 

오늘날의 물신주의와 이데올로기(ideology) 와중에서도

교회가 있는 기반이 바로 '독생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믿는 신앙이라는 사실은 말할 나위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