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거듭난 삶 2019. 5. 14.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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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 예수

 

 

요한복음 1 1-18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것이 없느니라

4)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하려 함이라

8) 그는 빛이 아니요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자라

9) 세상에 와서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것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강탄절(Christmas)이라고 하면,

흔히 마태복음 누가복음의 기사를 송독(recitation)하는 것을 상례로 한다.

 

동방의 박사들이,

별을 보고서 유대인의 왕의 탄생을 알아,

와서 어린 아기를 경배하고,

황금, 유향, 몰약 등의 예물을 드렸다고 한다.

 

이는 마태복음이 기록하는 바이다.

 

양치는 목자들이 밤에 ()떼를 지키는 ,

천사가 와서,

주의 영광,

그들을 두루 비치고,

천군이 나타나 찬송가를 부르니,

그들이 급히 가서,

구유에 누인 어린 아기를 찾아보았다는 ,

이것이 누가복음이 전하는 바이다.

 

이자 모두 극히 아름다운 기사이다.

 

하지만, 사람 만약 강탄절의 진의를 맛보려 것인가,

마땅히 이자에 더하여

 

뒤에 요한복음 1장을 읽어야 것이다.

이는 한가지로 귀하고 혹은 일층 귀한 기사이다.

 

이는 강탄절의 절호의 제목이다.

 

'처음(태초) (말씀) 있었다. 도는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도는 하나님이시다. 도는 처음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만물이 이에 의해 창조되었다이에 생명 있었다. 생명은 사람의 빛이시다. 빛은 어두움에 비치고, 어두움은 이것을 억압하지 못했다'(1-5)

 

대저 사람의 손으로 이룩된 문자로서 이것보다도 깊은 것은 있을 없다.

어떠한 견지에서 대도, 이는 사람이 말할 있는 극치이다.

인류의 언어도 이에 이르러서 그치는 것이다.

 

'' 무엇인가?

 

이것을 문자의 의의에서 천착(searching) 것인가?

의문은 의문을 낳아 필경 정지할 바를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주의해야 것은, 전체 위대한 저서의 기술의 순서이다.

 

필자의 흉중사상 횡일(exuberanec)하고,

마침내 포장 없어지기에 이르러 이것을 (pen) 맡긴다.

 

그러므로 가장 주의해야 것은 모두의 십행이다.

 

여기서 필자의 사상의 정화가 환발(brilliance)되는 것이다.

그리고 기타는 모두 주해이다. 설명이다.

 

그러면 모두의 난구는 최후에 읽어 비로소 능히 의의를 포착할 수가 있다.

 

요한복음도 역시 그러하다.

최초의 5절은 본서 전체의 생수(the essence)이다.

그것을 바짝 조린 것이다.

이것을 해득하는 것은 전서를 아는 일이다.

 

''(말씀) 무언가?

이것을 문자의 의의에서 살펴 해득하지 것이다.

이것을 요한복음 전체의 정신에 비추어 보고서 비로소 이해(understanding) 수가 있는 것이다.

하자,

혹은 도를 해석하여 심원한 로고스설을 주창한다.

 

그러나 요한복음 기자의 진의는 그러한 학설의 제창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말로서 아직 이름 붙일 없었던 것을 나타내자고 했던 것이다.

 

아직 세상에 출현되지 않은 감추인 상태에 있는 어떤 ,

존재는 가장 확실하지만,

아직 명명(naming)하고자 하지만 없었던 ,

이를 그가 일컬어 로고스(Logos) 것이다.

 

강탄전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이름을 부르려 하나 부를 없어,

부득히 당시 사람들의 사상을 더듬어,

가장 적당하다고 인정될 문자를 이해 해당시킨 것이다.

 

그는 세상의 처음부터 있었다고 한다.

 

그리스어(헬라어) '있었다'(계셨다) 것은 아주 무계 있는 말이다.

'존재해 있었다' 뜻이다.

 

그는 세상의 처음 만물이 있기 전부터 존재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과 상대하여 계셨다고 한다.

 

자체가 하나님이었다고 한다.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창조되고,

그에게 생명 있고,

그가 사람의 빛이며 그의 빛은 항상 세상의 어두움에 비치고,

어두움은 이를 악박할 없어,

마침내 자신이 세상에 출현하시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세상에 처음부터 그리스도 출현까지의 사실을 간단히 죄다 말한 것이다.

실로 놀라운 기사이다.

 

그는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라,

천사가 아니라,

영계의 위인이 아니라,

그는 하나님 자신인 것으로서,

 

그의 강탄이란,

하나님 자신이 육체로 되어 우리들 사이에 나타나신 것이라고.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근저는 여기에 있다.

위인이 아니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강탄절(Christmas) 위인의 탄생의 날이 아니라,

만물의 창조주가 육체로 되어 인간 중에 거하시게 날이다.

'빛은 어두움에 비치고, 어두움은 이것을 억압(압박)하지 못했다'.

 

이것을 유다의 역사에서 보면 아주 명료하다.

 

모세, 엘리야, 이사야, 예레미야,

모두 그리스도의 빛을 세상에 전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이것을 압복하려 여러 가지 방법을 취했지만도,

마침내 압복할 없었고,

빛은 빛으로서 세상에 임하기에 이르렀다.

 

다만 유다의 역사 아니라,

어느 나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에도 사실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 루터(Luther2 277), 사보나롤라(-1 237) 없다 해도, 그래도 허다한 의인은 배출되었다.

스가와라 미찌자네(-9 69)같은 이는 일례이다.

그들도 역시 우리들 사이사이의 빛이었다.

 

우리들의 구주로서 우러러 (작은 ) 거기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두움은 종내 이것을 억압하지 못하고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를 영접하고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아들 되는 권리를 주셨다'

 

교회는 자칫하면 가르쳐 말한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다, 다만 이것을 잊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주시어 사실을 자각케 하신 것이다'라고.

 

이는, 어떤 의미에서 귀한 가르침이 아닐 없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성서의 가르침은 아니다.

이것은 20세기의 종교이다.

 

16세기의 종교 또는 사도시대의 종교는 말했다.

사람은, 모두 본래 하나님의 적이라고.

사람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자녀 없다고.

 

차이는 작은 같으나 작은 아니다.

사이에 근본적인 상위가 있다.

 

도대체 하나님의 아들이란 과연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 말하는 것일까?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물론 그것만의 뜻은 아니다.

참된 하나님의 아들이란 실은 다만 사람 있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분이다.

 

기타의 인류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의미에 있어서는,

사람도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받아(영접하여)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아들 됨의 권리를 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가지 의미에 있어서 우리들 각자는 하나님의 아들로 있는 것이다.

 

다만 청결한 인간으로 있는 것만이 아니다.

이미 하나님의 아들 됨을 자각 받게 뿐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같은 의미에 있어서 우리들도 아들이 있는 것이다.

이는 실로 은혜의 절정이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에 의해 이것을 자각케 됨을 입는 것이라든가,

사람은 모두 본래 하나님께 거역(배반) 자이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와 가지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로 있다고 해도,

차이는 외형상 현저는 아니다.

 

그러나 현재 마음속에 감추인 세미한 구별이 후일 드디어 위대한 실현을 보는 것이다.

지금은 다만 하나님의 아들 됨의 권리를 얻음에 (권리가 주어지는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권리야말로, 드디어 사실로 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너희는 보라. 우리가 부르심을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있도다.

이는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어떠한 사랑이랴!

사랑하는 자여,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후에, 어떠랴! 아직 나타나지 않았도다.

그가 나타나시는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과 같을 (닮을 ) 안다.

그것은 우리들이, 참된 모습(진상) 것임으로이다'(요한23:1-2)

 

지금 우리들의 마음에 깃들인 신앙의 맹아(bud),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이에 의탁하여 죄에서 멀리 떠나고 있는 신뢰의 배종(germ),

그것이 시작이 되어 마침내 그리스도와 같은 의미에 있어서의 아들 됨의 지위에 달하는 날이 오는 것이다.

 

그리스도 재림의 때가 날이다.

일은 너무나도 위대하고 말로 없다고 하지만,

대체로 마음에 추측할 수가 있다.

여기서 강탄절(Christmas) 더욱 의미 깊은 것으로 되는 것이다.

, 다만 하나님, 육신이 되신 것은 아니다.

 

우리를 한없이 하나님과 함께 있는 자의 가족으로 참여케 하시기 위해,

그리스도는 강림하신 것이다.

 

이러한 것은 눈으로 아직 보지 못하고,

귀로 아직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에 아직 생각하지 못한 은혜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이보다 이하를 전하지 않는다.

본래부터 우리에게 있어서는 1 의미에 있어서의 강세만으로도,

망외(unexpectedness) 전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것에 머물 없었다.

하나님은 몸소 사람이 되심과 동시에,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 되게 하심의 약속을 주신 것이다.

 

인민의 도탄(extreme distress) 고를 구원하시기 위해 왕자를 평민으로 주셨을 아니라, 나아가 평민을 왕족으로서 영접하실 것으로 약속하신 것이다.

 

평민의 희망과 행복은 여기 이르러 절정인 것이다.

 

'아직 하나님을 사람 없다.

하지만 낳으신 독자 아버지의 품에 있는 자만이 이를 나타내셨도다'(18)

 

특이(distinct) 대조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보려 하여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항상 자기를 보여 주시려 하시고 그리고 적당한 때에 스스로 자기를 나타내셨다.

사람의 눈이 흐려져 없는 때에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주시어 자신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제 우리들은 하나님을 보는 눈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눈으로서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함을 따라 하나님의 모습은 더욱 명료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회화음악을 감상할 있는 능력이 주어진 자가,

날이 지나감을 따라,

드디어 가치를 미해(appreciation) 있음과 동양이다.

 

죄로 흐려진 마음의 눈이 열리어,

영광의 하나님을 있기에 이르는 ,

이는 실로 얼마나 은혜인가!

 

은혜 입은 사람이란,

생활의 행복을 향수(enjoyment)하는 사람이 아니라,

품성(character) 고결을 유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가 낳으신 독자로서 아버지를 여실(reality)하게 나타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마음을 가질 있는 사람 이것이다.

 

이는 사람의 생각으로서 측량해 없는 은혜이다.

그리고 강탄설(Christmas) 기쁨은 은혜를 깨닫고 맛보는데 있는 것이다.

 

성서는 여기에 명백하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고 있다.

 

'말씀은 하나님이시다',

'말씀, 육체로 되어 우리 사이에 거하셨도다' 말하고 있다.

 

성서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라는 명언(declaration)없다는 근대인의 주장은 성립되지 못하는 것이다.

 

내촌감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