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골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거듭난 삶 2019. 6. 16.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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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의 원칙을 발견하십시오

 

 

요한복음 3 22-30 :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침례를 주시더라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침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침례를 받더라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저편에 있던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침례를 주매 사람이 그에게로 가더이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없느니라

28) 나의 말한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US News & World Report에서는

 

"살아있는 성자에게 죽음이 다가오다".

(Death comes to a living saint)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덧붙여진 소제목은

 

"Mother Teresa 가르쳐주는 (眞福):

 

천국은 가장 천한 자들을 섬길 발견됩니다".

 

(Heaven is found by serving the lowliest) 되어 있었습니다.

 

 

땅에서 87년의 세월을 지극히 아름답게 마무리한

Mother Teresa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실려 있었습니다.

1992 그녀가 뉴욕으로 날아갔습니다.

미국의 중요한 카톨릭 인사들로 구성된 단체(Knights of Columbus)에서

그녀의 Missionaries of Charity에게 10만불을 기부하기로 결정하고

그녀를 초청한 것입니다.

 

1000명의 말끔하게 차려입은 유명인사들이 그녀가 등장했을

마치 유명한 가수들이나 교황이 받는 같은 환호를 보냈습니다.

 

연회가 시작되기 ,

매우 몸집이 작은-그녀는 뼈의 성장에 이상이 생겨서 몸이 약간 뒤틀려 있습니다.

- 테레사 수녀가 나와서 들려 이야기는 모든 청중들의 축제의 감정을 숙연하게 만들어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캘카타에 버려진 연약한 사람의 몸에서

구더기를 떼어내고 뽑아내는데만 세시간이 걸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식사가 시작되기 그녀는 연회장을 떠났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호화로운 식사를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그녀가 생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자리에서 다시 십만불이 모금되어 후에 그녀에게 전달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주님을 향한 사역에만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

 

결코 권위를 부리거나 훌륭한 후계자를 지정해서 물려주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후 그녀는 모든 직책에서 자연스럽게 물러났고

그녀의 뒤를 니르말라라는 수녀가 이어받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The Missionaries of Charity(사랑의 선교회)

지속적으로 존속할 있을까라는 등의 미래를 염려했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세상은 알게 것입니다.

사역은 나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It is not my work.

이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일은 계속될 것입니다." .

 

 

오늘 본문 22절과 23절은 예수 그리스도와 요한의 사역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침례를 주시더라.".

 

뿐만 아니라 요한도 사마리아 북쪽에서 계속해서 그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침례를 주니"라고 했습니다.

각자 그들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요한의 제자 사람과 유대인들-어쩌면 예수님의 제자 사이에서 "결례" 정결 예법,

쉽게 말씀드리면 "침례를 줌으로 죄가 씻기는 " 관한 논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도, 침례 요한도 모두가 침례를 베풀고 있는데,

서로 지역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역을 동일하게 감당하고 있는데

무슨 변론할 꺼리가 있을 있겠습니까?

 

각자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데

서로 논박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25 말씀은 변론이 생겨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변론이 생겼을까요?

 

본문 26절을 보십시오.

 

"저희가-다시 말해 요한의 제자가-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저편에 있던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침례를 주매

'사람이 그에게로 가더이다'".

 

구절의 마지막 부분

 

"사람이 그에게로 가더이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출발점입니다.

이런 생각이 문제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언제나 비교하게 만드는 사람,

혹은 비교해서 우월과 열등함을 가려놓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하고 비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일만 하면 되는데 괜히 남의 일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비교합니다. 평가합니다.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 요한을 도와 회개케 하는 침례의 사역을 베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기 사마리아보다 남쪽인 유대지역에서 예수와 제자들도 동일한 침례를 베풀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보니까 점점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가서-요한과 자기들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침례를 받는 것입니다.

 

침례의 시작은 요한과 제자인 그들이었는데 자기들이 점점 밀려나는 것같은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자신의 역할들이 자꾸 줄어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은 일이 줄어드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들을 알아 주는 일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것이 문제였습니다.

 

시기심과 질투의 감정,

자신들이 무시된다는 생각들이 그들을 사로잡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감정이 일어나면 변론이 시작됩니다.

남의 사역을 반박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중요한 가지를 놓치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사역의 본질,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

오늘 말씀에 의하면 침례를 베푼다는 것이 죄를 깨닫게 하고,

그럼으로써 진정으로 하나님 앞으로 백성들을 인도한다는 사역자체의

중요성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일을 하는 곳입니다. 다른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정받으려고 사역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리고 시기심으로 일하는 곳도 아닙니다.

 

누가 열심히 하니까,

그래서 사람이 인정을 받는 같으니까 사역을 자청하는 곳이 아닙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사도들이 권능을 베풀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자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은혜 받은 자들이 자신의 재산을 팔아 어려운 이들과 함께 나누어 쓰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칭송을 받기 시작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재산을 팔아 함께 나누어 쓰는 모습을 통해 사도들과 사람들에게

그들이 인정받게 되자 아나니아와 아내 삽비라에게도 그런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재산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팔고 보니 마음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아깝다는 생각이 들게 것입니다.

그래서 소유의 얼마를 감추어 두고 사도들 앞에 전부인 것처럼 바쳤습니다.

 

원래의 의도가 순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챙길 것을 챙기면서도 칭송은 얻고 싶은 충동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성령이 정확하게 그런 마음을 지적합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도 당신의 땅이고,

후에도 당신이 임의대로 있는 땅이 아니냐?',

 

그런데 그런 마음으로 속였냐고 물은 것입니다.

아나니아가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교회에서 하는 사역은 주님을 위한 것이지

우리 행위의 크레딧을 따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침례를 베푸는 요한의 제자들은 이것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그리스도에게로 몰려가자 시기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자신들이 행하던 일의 크레딧이 무너지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유혹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이런 유혹에 무너지면 곤란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위해서 사역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역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

정말이지 주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땅을 팔기도 하고,

재산을 팔기도 해서 어려운 이웃과 나누기로 하는 것이지

다른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은 교회 안에서 주님을 섬기는 사역의 원칙에 관한 것입니다.

 

실망하지 않으면서, 시기심을 벗어나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쓸데없는 질투의 감정으로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사역을 어떻게 감당할 있을 것인지를

침례 요한의 마지막 증언을 통해서 배우게 것입니다.

 

번째 원칙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없느니라".

 

주님을 섬기는 사역의 번째 원칙은

"다른 사람의 사역을 그대로 인정하라" 것입니다.

 

성도가 어떤 일을 감당하는 것을 보시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워가는데 필요하시기 때문에 사람에게 허락하신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시기할 일이 아닙니다.

 

침례 요한의 제자들이 시기하면서 얘기했습니다.

 

"사람이 그에게로 가더이다. 어떡하시겠습니까?

당신 이러다가는 엉터리 선지자라고 낙인찍히고 말것이요.".

 

그러나 침례 요한은 자신이 행하는 사역과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사역의 핵심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내가 하는 것만이 중요한 사역이고,

혼자만 해서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하던지 주님을 위한 사역은 소중한 것임을 그는 알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침례 활동은 하늘의 사역입니다. 중요한 것입니다.

 

침례요한의 침례보다 훨씬 의미가 깊은 것입니다.

그러나 침례요한의 제자들은 그런 본질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나에게로 많이 오는지,

사람에게로 많이 가서 침례를 받는 지가 관심거리였습니다.

 

내가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내가 하는 일이 번쩍이는 조명을 받아야 하는데,

다른 사람이 받게 되면 안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쳤습니다.

골리앗을 물리치고 돌아오는데 여인들이 이스라엘 성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작은 북을 치면서 징을 울리면서 환영합니다. 노래하기를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사울이 말을 들은 반응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삼상 18 8절을 그대로 옮기면

 

"사울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이렇습니다.

 

사실 사울에게 골리앗을 물리쳐 다윗은 은인 중의 은인입니다.

골리앗을 물리친 것은 사울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한 아닙니까?

 

그런데 사울이 불쾌하여 심히 노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사울은 다윗의 사역을 인정할 있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시기심과 질투에 사로잡히자 사역의 핵심을 놓치고 것입니다.

 

침례 요한도 마찬가지 상황에 부딪쳤습니다.

자신이 먼저 광야에서 외치면서 회개의 침례를 베풀면서 명성을 더해갔습니다.

 

그러다가 얼마있지 않아 예수가 나타났고, 그와 동일한 침례를 베풀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말대로

 

"사람들이 그에게로 가더이다".

 

여인들의 노래 가사로 바꾼다면

 

"요한의 침례는 천천이요, 예수의 침례는 만만이로다". 이런 것입니다.

 

동일한 상황을 만난 사울과 침례 요한이었지만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침례 요한은 사역의 핵심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가 아니면 그렇게 없다" 침례 요한은 고백한 사람이었습니다.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도 하늘에서 주신 바가 아니면 그렇게 없다고

사울이 말할 있었어야 했습니다.

 

주님을 위한 사역은 누구에게서 이루어지든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우리의 친인척이 아니면 어떻습니까?

주님의 사역이 이루어지는데 무슨 상관입니까?

 

주님의 사역이 이루어지면 우리는 함께 기뻐할 알아야 합니다.

감사할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일을 이루었느냐에 관심을 갖지 마십시오.

오히려 주님의 사역이 이루어졌는지 아니면 이루어지지 못했는지에 관심을 두십시오.

 

 

예수님의 음성이 이렇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사람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그러자

 

"누가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태 12;5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와 동생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한 사역이 이루어지는지, 그렇지 않은 지가 문제입니다.

사역의 핵심을 놓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번째 원칙을 보시겠습니까?

 

28절입니다.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무슨 말일 같습니까?

번째 사역의 원칙은 "자신의 정직한 태도를 끝까지 유지하라" 것입니다.

 

변덕스럽게 바꾸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역을 하다가 자신이 손해보는 듯해보이고,

자신에게 이익이 아니라 해가 것처럼 보이면

잽싸게 사역에서 손을 털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동일한 마음의 중심을 간직하면서 사역해야 한다고

침례 요한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말하지 아니하였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나는 그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일 뿐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오히려 말할 있는 사람이 바로 침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는 시기심 때문에 냉정한 정신과 건강한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태도를 갖지 않았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감정에 따라 주님의 사역을 감당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내키는 날은 열심히 섬깁니다.

그러다가 마음 상하는 날이면 영락없이 주님의 사역을 포기해 버립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분에 따라 열렬한 주님의 제자가 되기도 하다가,

가롯 유다 같은 배신자 역할도 서스럼없이 감당합니다.

 

감정의 up and down 따라 주님을 위한 사역도 오르락 내리락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한 사역에 필요한 것은

' 마음, 언제나 동일한 마음'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위한 사역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손해 알면서도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예수 믿는 것을 비밀로 해야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많은 박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아프리카 기독교인 사이에 사용되던 암호 하나가 있었는데

 

"당신의 풀밭은 여전히 푸릅니까?"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숨어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숲속에 들어가 모임을 가졌습니다.

말하자면

 

"당신의 풀밭은 여전히 푸릅니까?"라는 암호인사에는

 

"당신은 박해 속에서도 여전히 신앙을 버리지 않고 숲속 예배당에 들어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까?"라는 뜻이 담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리의 감정따라 주님 향한 예배가 죽었다가 살았다가 하지는 혹시 않습니까?

 

처음과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사역을 감당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모택동이 정권을 잡자 예배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끼리 3백명이 모여 공동 농장을 경영하는 부락이 있었는데

그들은 명령을 거스리며 예배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당원들이 와서 예배를 계속할 경우 주일 사람씩 총살할 것이라고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주일에도 이들은 여전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약속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음 주일 약속한 대로 총을 당원들이 예배의 현장에 몰려왔습니다.

 

그러자 그때 장로님이 앞으로 뛰어나가며 소리쳤습니다.

 

"제일 먼저 천국에 가는 영광을 나에게 주십시오.",

 

장로는 자리에서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런데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장로님의 엄청난 믿음에 충격을 받은 공산당들은

이후 기독교인의 공동 농장에 대해서만은 손을 대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사역은 감정의 변화따라 이루어졌다가

혹은 순간에 포기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위해 비록 천국에 먼저 가겠다고 말하는 용기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해 우리의 태도를 동일하게,

변함없이, 감정에 따라 흔들림없이 고정시킬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침례요한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나는 그의 앞서 보냄을 받은 자일 뿐입니다.".

 

귀한 음성에 귀기울이며 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번째로 만날 있는 침례요한의 가르침은

29절과 30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번째 사역의 원칙은

 

"사역의 목표는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는 것이어야 한다" 것입니다.

 

우리의 사역 전면에 나와야 하는 분은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가 영광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영광을 취하여야 합니다.

 

테레사 수녀님의 말대로 그녀가 평생 헌신한 사역은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지 자신의 영광을 위한 사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후계자를 정하는 문제나 미래에 어떻게 꾸려질 것인지에 대한

염려로부터 자유로울 있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면서 때때로 낙심하고 염려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역을 하다가 포기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사역을 통해서 존귀하게 되고 싶은 욕망 때문입니다.

내가 인정받는 것에 우리 사역의 초점이 맞추어지면

언제인가는 반드시 낙심하고 시험에 빠지게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사역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름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 위한 사역은 간단합니다.

주인공이 내가 아니라고 말하기만 하면 됩니다.

간단한 원칙을 무시하기 때문에 우리 사역이 흔들리게 됩니다.

 

마음에 신부를 취하는 신랑을 보면서 기쁨을 갖느냐

아니면 내가 신부를 취하려고 하는가에 따라서

사역이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지난 주에 제가 소속될 노회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노회에서 저는 알지 못하지만 어느 교회의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

분들이 갑론을박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노회 회기에서 문제는 마무리 되었으면 좋겠다고

모두들 일치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거의 화해의 분위기가 익었습니다.

 

그런데 일에 연루된 분이 엉뚱한 모함을 받게 되었다는 주장을 하시면서

모함을 사람의 공개적인 사과가 없으면 용서할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화해의 분위기가 긴장상태로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일을 보면서 자신의 목회 사역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주님의 일을 하면서 무엇에 가장 관심을 많이 두는가하는 질문을 던지게 것입니다. 만일 그것에 대한 대답을 제가

 

" 자신과, 나의 이름과, 나의 명예"라고 답하게 된다면

저도 분처럼 나의 명예가 실추된 것에 대한 사과가 없이는 용서할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님의 사역에는 때때로 오해가 있을 있고 모함도 있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해결하면서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사역은 내가 당한 모함,

나의 실추된 명예를 해결해주기 위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함이 있으면 인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고난의 가시라 할지라도 견디면 주님이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일의 목표는 주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집사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안수 집사, 장로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그것 때문에 주님 위해 섬기는 우리의 태도에 변화가 있어야 합니까?

이런 때문에 직분이 생긴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어도 나의 섬김을 통해 주님이 드러나기만 하면

주님은 잘했다 칭찬하시지 않겠습니까?

 

나와 여러분은 쇠하여져도 좋다고 고백하면서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시기만 한다면,

나의 사역을 통해 높임을 받을 분은 주님밖에 없다고 고백하면서 교회를 섬기기만 한다면

우리의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주님이 흥하시기만 한다면 나는 쇠하여져도 좋습니다.".

 

우리는 정말 이렇게 고백합니까?

정말 이렇게 고백하기를 원하십니까?

 

침례요한은 사역의 원칙을 너무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원칙에 너무도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변의 질투섞인 이야기를 들어도, 시기심을 자극해도,

그리고 충분히 질투의 감정대로 나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변함없는 신실함으로 주님을 높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 있을까요?

이런 태도가 정말 침례요한에게서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이루어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까?

도를 닦으면 됩니까?

 

닦는 얘기 한번 드려볼까요?

 

강태공이 시기를 기다리면서 낚시로 도를 닦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마씨라는 부인이 있었는데

강태공이 낚시만 하면서 집안을 돌아보지 않자 도망가버렸습니다.

 

후일에 강태공이 공을 세워 제나라 왕이 되어 돌아왔을 마씨가 다시 나타나

자신의 죄를 빌며 받아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이때 강태공이 동이에 담긴 물을 땅에 부으며 마씨에게

"주워 담아보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당황하면서 어찌할 모르자 강태공은

 

"당신의 행동은 마치 엎질러진 물과 같은 것이오"라고 말하면서 용서해주지 않았습니다.

 

覆水不返盆이란 말이 여기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낚시로 도를 닦아도 용서할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34절을 보시면 대답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라.".

 

하나님께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수가 있습니다.

침례 요한은 그런 말을 수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그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확실히 분께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렇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자에게는 성령을 날마다 새롭게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있습니다.

긍정적 사고방식에 의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우리들에게 성령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수가 있습니다.

 

나는 없을 것이라고,

이전에 너무나 많이 실패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을 위한 사역을 새롭게 다시 시작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만 생각하면서,

남이 나를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주님을 위한 사역에 동참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제가 새벽 기도를 마치고 돌아갈 때면 언제나 교회 주변의

쓰레기를 줍는 교인 분을 만납니다.

 

분은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 언제나 동일하게 교회 주변의

쓰레기를 정리합니다.

 

주님을 위한 사역은 거대한 것만 아닙니다.

작은 것에서 시작합니다.

곳에서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게 것입니다.

 

여러분을 주님을 위한,

주님만 높이는 거룩한 사역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오셔서 함께 사역에 동참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