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하나라도 그에 의하지 않고서 창조된 것은 없었다

거듭난 삶 2019. 6. 25.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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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장의 대의

 

요한복음 해석의 열쇠는 서문 1 1절에서 5절까지에 있다.

 

'처음에 (말씀) 있었다.

도는 하나님과 상대하여 있었다.

도는 하나님이었다.

도는 하나님과 상대하여 있었다.

만물 그에 의해 창조되었다.

창조된 것으로서 하나라도 그에 의하지 않고서 창조된 것은 없었다.

그에게 생명이 있었다.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빛은 어두움에 비쳤다.

하지만 어두움은 이것을 알지 못했다'

 

 

'' (말씀) 만물의 영이다.

 

그러므로 우주가 있기 전에 하나님과 상대해 있었던 이로서, 자신이 하나님이시다.

 

영에 의해 만물은 창조되고, 하나라도 그에 의하지 않고서 창조된 것은 없다.

 

영이 육체를 취하여 나타나신 이가 나사렛의 예수이시다.

 

그는 생명의 근원이셨다.

실로 생명 그것이었다.

생명이시고 빛이었다.

빛이 어두운 세상을 비추셨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 비추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슬퍼해야 일로는

어두움에 빠진 죄의 세상은 빛을 빛으로서 인정하지 않았다고.

 

요한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것이다.

 

다시 이것을 요약하여(간추려) 말한다면, 예수에 대해 다음의 3 사실을 말하려 했던 것이다.

 

1, 예수는 하나님이시고 만물의 창조주이시라는

2, 그는 생명이시며 빛이시라는 ,

3, 그의 체현하심을 보고도, 세상은 그를 받지 않고, 도리어 그를 배척한 .

 

주의하여 요한복음을 읽는 자는, 장에 걸쳐 이상의 3 사실의 실증을 보는 것이다.

 

언제나 난해로서 일컬어지는 요한복음 6장도,

이것을 마음에 두고서 읽는다면, 해득하기 어렵지 않은 것이다.

 

, 저자가 목적으로 하는 예수에 관한 이상의 3 사실을 표명하는 것으로 보고,

의미를 찾기는 어렵지 않은 것이다.

 

요한복음은 신약성서 중에 있어서 가장 조직서 있는 ()이다.

일정한 취향(taste) 전편을 통해 관철하여 있는 것이다.

6장도 취향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예수는 만물의 창조주라는 것은, 장에 기록된 (혹은 ) 기적에 의해 명시되었다.

 

예수는 조금의 빵과 물고기를 배증하여 이것으로서 대충 5천인을 먹게 하신 것에 의해, 그가 분명히 만물의 창조자이심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만물이 그에 의해 창조되고, 창조된 것으로서 하나라도 그에 의하지 않고서 창조된 것은 없다'(1:3) 것은,

 

기적에 의해 증명된 것이다.

예수는 여기서 그가 만물의 창조주이심의 자격과 실력을 표명하신 것이다.

기적이야 말로,

이는 처음부터 하나님과 상대하신 ,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신이신 예수에게 있어서는 아주 쉬운 일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예수, 빵을 가지사, 기도하시고 제자에게 주시니, 제자 이것을 앉은 사람들에게 주니라'(6:11) 있다.

 

그동안에 아무런 떠들썩거림은 없다. 수선스러운 바는 없다. 놀라운 기적은, 고유히 아주 쉽게, 아무런 노력도 요하지 않은 듯이 행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때는 이러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가 말씀하시니 되어졌다'(시편33:9) 있다.

 

사람이 물건을 만드는 때에 소음이 많다. 제조장의 연기가 오른다.

기계가 돌아간다. 제조인은 땀을 흘리면서 일한다.

성대하게 제품을 광고한다.

시끄럽게 떠들썩거리며, 사람은 소리를 내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없다.

 

이에 반하여, 자기 자신 안에 모든 능력을 보유하신 하나님은,

사물을 만드시려 이를 만드시는 것이다.

그는 천연의 순서를 따름의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말하고자 말하듯,

하나님은 만들고 만드시는 것이다.

 

'예수, 빵을 가지사 기도하시고 제자에게 주시니'라고 있다.

 

실로 하나님다운 행위이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놀라운 기적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으로서는 당연한 행위이다.

그리고 예수는 여기서 행위로 나오심으로서,

그가 참으로 하나님이신 것을 나타내신 것이다.

 

빵을 지으시고 고기를 지어,

자신이 만물의 창조자이심을 증거 하신 후에는,

예수는 다시 수상에 보행하시고 배를 나아가게 하시어,

그가 우주의 주재자이심을 보여주신 것이다.

 

'일리(한국) 저어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았다'(6:19) 있고,

 

'그가 배에 오르시매, (배는) 가려하는 땅에 닿았다'(6:20) 있다.

 

천연의 주는 천연의 법칙에 매임 없이 이것을 지배하신 것이다.

그는 수상을 보행하시어 삼킨 바로 되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는 바람과 (oar) 의함 없이 배를 나가게 하실 있는 것이다.

불가사의 (a wonder)라면 불가사이(기적)이다.

 

하지만 '만물이 그에 의해 창조되었다' 하신 분의 행위로서는 결코 이상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한 행위를 목격했기에 만이, 요한복음의 기자는 말한 것이다.

 

'말씀()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도다. 우리가, 영광을 보니,

실로 아버지께서 낳으신 외아들(독자) 영광으로서, 은혜와 진리() 가득하더라'(1:14).

 

예수께서 하신 기적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의 증거였다.

영광의 표현이었다.

 

처음에 하나님과 상대하여 계시고,

만물을 창조하신 이가,

인류의 구원 주로서 세상에 나타나신 표적으로서,

이러한 기적을 행하신 것이다.

 

예수는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우주의 주재자이시다.

 

이는 요한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첫째이다.

 

그리고 6장에 있어서는,

 

이것은 가지의 기적으로서 명시된 것이다.

 

빵과 물고기와의 배증의 기적과,

수상보행, 단정(a boat) 착안의 기적으로서, 보여주셨던 것이다.

 

다음에 명시될 것은 예수께서, 생명과 되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서는 그가 생명이심이 특히 명시된 것이다.

그가 빛이신 것은,

다른 기적에 따라 다른 곳에서 명시되셨던 것이다(요한복음 9장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생명을 세상에 주는 것이다'(6:33)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생명의 빵이라고'(6:35)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6:41)

 

'나는 생명의 빵이라'(6:48)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참으로 너희에게 고한다. 만약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생명 없고,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 있도다.

내가 날에 이를 다시 살릴 것이다'(6:53-54)

 

이렇게 하여 예수는 생명이시라는 것이 허다한 방면에서 서술되었던 것이다.

생명은 예수에 있어서(예수 안에) 있는 것이다.

 

그를 떠나서 생명은 없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빵이시다.

생명의 빵이시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빵이시다.

 

그리고 그를 먹음으로서 영세가 있다.

부활은 그로 말미암아서만 행해지는 것이라고.

일은 거의 지나치게 세밀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까지 면밀하게 진술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에 무익한 중복이라고는 일언도 없는 것이다.

실로 생명은 모든 방면에서 절연하게 서설된 것이다.

특히 생명의 정점이라고도 칭해야 부활에 대하여 서설된 것이다.

 

'내가 날에 이를 다시 살릴 것이라'.

 

예수는 거듭 여기서 말씀하셨던 것이다.

 

생명의 근원(원천)이신 그이므로, 그렇듯 분명하게 일에 대하여

말씀하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

 

사람의 부활은 예수 독특의 사업이시다.

이는 그를 떠나서 행해질 수는 없다.

사람은 천연적으로 부활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에 의해 부활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하신다.

 

'내가 날에 이를 다시 살릴 것이라'.

 

'그에게 생명 있다' 하신 예수가,

 

그가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말이다.

 

부활을 자연적 현상으로서 해석할 이것을 해득할 수는 없다.

부활은 생명의 공급이다.

신발전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 말미암아 행해지는 일이다.

 

'내가 날에 이를 다시 살릴 것이라' 한다.

 

사람의 말로서는 망언의 극이다.

 

하지만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말로서는 당연한 말씀이다.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생명의 빵이시다.

그를 먹고, 사람은 생장하여 마침내 영생에 달하는 것이다.

 

빵과 물고기의 배증의 기적을 기회로 하여,

예수는 여기서 자신이 생명이신 그것을 서술하고,

역설하셨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만물 그에 의해 창조되었다' 것에 이어서

 

'그에게 생명 있다' 것이 진술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계속하여

 

'빛은 어두움에 비추고, 어두움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더라는 것에 진술되어야 순서이다. 그리고 그것이 60 이하에 있어서 진술 되어 있는 것이다.

 

'제자들 , 여러 사람이, 이것을 듣고, 말하기를, 이는 너무 심한 말씀이다.

누가 능히 이것을 들으랴'(6:60) .

 

이는 회의의 시작이다.

 

' , 제자 많이 돌아가고, 예수와 함께 행하지 않았다(6:66) .

 

이는 회의의 실현이다.

 

심중의 의혹은 여기서 배반의 실행으로 되어 나타난 것이다.

' (가룟 유다) 열둘의 하나로, 예수를 팔려한 자이다'(6:71)라고.

 

이것은 배반의 극점이다.

 

여기서 예수의 직제자의 사람은,

그의 적과 결탁하여 그를 십자가 위에 박고,

그로 하여금 굴욕의 죽음을 마치게 것이다.

 

실로 '어두움은 이를 깨닫지 못한지라'이다.

 

세인은, 만물의 창조주, 우주 주재자, 생명과 빛의 보유자의 체현을 만나,

이를 영광의 주로서 우러러 받들지 않았다.

 

도리어 이것을 욕되게 하고,

이를 죽이고, 이를 인류의 기억에서 장사해 버리려고 것이다.

 

죄의 , 악의 악이란 이것이다.

세상의 심함은 물리친 여하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다.

세상은 생명 그것을 거역하고, 그것을 물리친 것이다.

 

그들이 정죄되어야 함은 당연했다. 예수는 후에 말씀하셨다.

'내가 만약 와서 말하지 않았다면, 그들 없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죄에 대하여 핑계할 길이 없다'(15:22)

 

' 만약 다른 사람이 하지 않은 일을 그들 사이에서 하지 않았더라면, 그들 없으리라.

하지만 그들은 이에 나와 아버지를 보고 이를 미워했다'(15:24)

 

이때 유대인은 예수의 기적을 보고,

말씀을 듣고서 그를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죄란 실로 크도다이다.

 

오늘날 그리스도 신자라 일컫는 까지가

예수의 기적을 의심하고 부인하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장에 기록된 기적 같은 ,

사실로서 이를 믿는 자는,

식자로서 자임하는 중에 아주 드문 것이다.

 

하지만, 다른 경우는 그대로 두고서,

 

경우에 있어서, 예수가 행했다는 기적을 부인하고서는.

전장의 구성을 깨뜨리지 않을 없는 것이다.

 

문제는 과학상 또는 역사상의 것은 아닌 것이다.

신앙상의 그것이다.

예수가 기적을 행하지 못하셨더라면,

그의 구주이심에 자격은 소멸되는 것이다.

 

그는 생명의 근원으로서 영생의 공급자라는 것이다.

신자는 그에게 부활을 요망하고 영혼을 그에게 맡기고 죽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예수가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가지지 못하셨다면,

신자의 희망은 전혀 헛것이 되는 것이다.

 

신자는 (말일) 그에게서 최대의 기적이 시행되기를 바라고 죽는 것이다.

 

신자가 '주안에서 잠잔다' 것은 이것이다.

 

그리고 최대의 기적인 부활을 행하시는 이는,

지상에서 보다 작은 기적을 행하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신자의 부활에 비교하여 , 빵과 물고기의 배증은 작은 기적이다.

 

이렇듯 보다 작은 기적을 아주 쉽게 행할 있는 까닭에

신자는 예수를 우러러 구주로 모시며,

그에게 영혼을 맡기고,

그의 부활의 약속을 믿고서,

안에서 평안이 잠드는 것이다.

만약 예수께서 장의 시초에 기록된 같은 기적을 행하지 못하셨더라면,

그는 후에 이르러

 

'내가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거듭했더라도 아무 효력도 없는 것이다.

 

빵과 물고기조차 만들 없는데 死者를 어찌 부활케 있으랴이다.

예수에게 기적을 행함의 힘이 없고서는, 그는 인류의 구주는 아닌 것이다.

 

좋은(선한) 도덕의 교사만으로는 사람을 영원히 구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구원은 영의 일이다. (육체) 일이다.

사람에게 완전한 영을 주고 이에 가함에 있어서 영구히 썩지 않는 완전한 몸으로 ,

구원은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완전한 구원을 실시함에는 만물의 창조자 이하로서는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자유로 기적을 행하시어,

그가 인류의 요구하는 완전한 구주이심을 명시하신 것이다.

 

기적을 부정하는 자는 학자답게 보인다.

물론 의미 없는 기적은 모두 부정해야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기적은 의미 없는 기적은 아니다.

 

이에 인류의 영원한 희망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에게 능력이 있었기에 만이,

그리고 지금도 있다고 믿기에 만이,

죽음은 만사의 끝이 아님이 신봉되는 것이다.

 

우리들은 기적을 행할 없는 같은,

그러한 약한 구주를 믿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의지하는 구주는 강자이시다.

그는 만물을 자기 장중에 잡고 계시는 이시다.

그리고 권능이 있기 까닭에 그는 말씀하여 주저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무릇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은, 내가 하나도 이를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 이를 다시 살게 것이다'(6:39) 라고.

 

*내촌감삼의 글에서